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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Feb 23. 2023

<내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나를 사랑할 때>



“남보다 나은 글을 쓰려하지 말고 남과 다른 글을 써라.” 내 글쓰기 수업 중, 누누이 강조하는 말이다. 다른 글을 쓰라 해서 다른 삶을 살라는 게 아니다. 세상을 다르게 보라는 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복제(Reproduction Interdite)>라는 그림이 있다. 한 남자가 거울을 보나 거울 속에 얼굴이 없고 뒷모습만 보인다. 그는 비슷한 가짜인 시뮬라크르(simulacre, 복제물로 우리가 경험한 가상의 현실)의 눈만 지녔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의 눈으로는 자기를 찾지 못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과거에 경험한 형식과 규범의 문화가 너무 몸에 젖어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즉 세계를 보려는 주체의식이 없다는 말이다. 



‘남과 다른 글’을 쓴다는 것(내가 내 삶을 산다는 것)은 ‘나[내]’ 눈으로 세계를 의식한다는 말이다. 글 쓰려는 이라면 <매트릭스> 영화를 꼭 보았으면 한다. <매트릭스>는 우리에게 파란약과 빨간약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 지배질서에 잘 훈육된 자들이 서성거리는 가상과 실재 현실을 인식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빨간약을 먹으면 되지만 혼자만의 고독한 길을 순례자처럼 가야만 한다. 


파란약은 매트릭스(matrix, 그물망처럼 얽힌 가상의 현실)다. 모든 것을 기계가 통제해 준다. 모든 사람들처럼 적당히 생각하고, 몸에 깊숙이 각인된 관습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집단적 무의식 속에서 산다. 내가 거울을 보지만 내가 없는 것처럼. 몸과 마음이 조작된 일상 관습의 노예가 되어, 내 마음[생각]이 자유가 없는 감옥에 갇힌 것조차 모른다. 





       


        매트릭스감독릴리 워쇼스키, 라나 워쇼스키출연키아누 리브스, 로렌스 피시번개봉1999. 05. 15. / 2016. 09. 22. 재개봉 / 2019. 09. 25. 재개봉 / 2021. 12. 09. 재개봉




빨간약은 현실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는 빨간약을 먹고 현실을 인식한다. 예언자 오라클은 주인공 네오에게 “그노티 세아우톤γνω~θι σεαυτο´ν”이 ‘너 자신을 알라’임을 알려 준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너는 마음의 감옥에서 태어났다”라 한다. 자신을 알고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깨어 있으라는 주문이다. 빨간약을 복용한 네오는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가상의 공간인 매트릭스요, 일상의 현실이 모두 거짓이라는 끔찍한 진실을 안다. 그것은 고통이다. 깨어 있기 위해 네오는 목숨을 건 싸움을 한다. 우리는 집단 가사상태인 매트릭스에서 빠져나와야 원본인 현실을 비로소 본다. 


연암 선생의 「난하범주기」를 본다. 배를 타고 가던 사람들이 “강산이 그림 같은 걸”이라고 하자 연암은 이렇게 말한다.



“자네들이 산수도 모르고 또 그림도 모르는 말일세. 강산이 그림에서 나왔겠는가? 그림이 강산에서 나왔겠는가?” 이러므로 무엇이든지 ‘비슷하다(似), 같다(如), 유사하다(類), 근사하다(肖), 닮았다(若)’고 말함은 다들 무엇으로써 무엇을 비유해서 같다는 말이지. 그러나 무엇에 비슷한 것으로써 무엇을 비슷하다고 말함은 어디까지나 그것과 비슷해 보일 뿐이지 같음은 아니라네.



연암 작가의식의 한 단면이다. 연암은 산수와 그림은 비슷해 보일 뿐이지 같음은 아니라고 꾸지람한다. 강산에서 그림이 나왔지, 그림에서 강산이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강산을 보고 그림 같다 한다. 진짜를 가짜로 보고 가짜를 진짜로 보았다. 주객이 전도 되어 버렸으니 ‘사이비사(似而非似,비슷하지만 가짜)’다. 연암은 강산의 모사본인 산수화로 산수인 원본에 비기는 어리석음을 통박한다. 연암은 이미 이 시대의 ‘시뮬라시옹’을 저 시대에 말해 놓았다. 연암은 이미 빨간약을 복용 중이었다. 



일상의 눈을 버릴 때 그곳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 이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 바로 작가의식이다. 즉, ‘나’를 찾았다는 말이다. 이 ‘나 찾기’를 연암 선생는 「낭환집서(蜋丸集序)」에서 이렇게 말한다. 



“쇠똥구리는 스스로 쇠똥을 사랑하여 여룡(驪龍:몸빛이 검은 용)의 구슬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여룡 역시 그 구슬을 가지고 저 쇠똥구리의 쇠똥을 비웃지 않는다.”



‘강랑(蜣蜋)’이란 쇠똥구리이다. 쇠똥구리가 여룡의 구슬을 얻은들 어디에 쓰며 여룡 역시 낭환(蜋丸,쇠똥)’을 나무라서 얻는 게 무엇이겠는가. 내 재주 없음을 탓할 것도 없지마는 저 이의 재주를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하고 재주가 있다고 재주 없음을 비웃지도 말아야 한다. ‘강랑자애(蜣蜋自愛, 쇠똥구리는 제 스스로를 사랑한다)’하라는 말이다. 



누구나 똑같이 한번 사는 삶이지만 모두 다른 삶이다. 같은 삶을 사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 내 삶을 사는 마음, ‘내가 나를 사랑할 때’ 내 마음으로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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