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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나 Nov 19. 2019

산의 톰씨와 교환일기장





오랜만에 일요일에 혼자 집에 있는 행운을 누렸다. 

나는 느긋하게 어젯밤에 만들어둔 감자샐러드와 식빵을 꺼내고 커피를 타서, 영화를 보며 아점을 먹었다.

영화는 일본영화 '산의 톰씨'

별 정보없이 고른거였는데 틀자마자 느낌이 좀 싸하다 싶다 했다.

잠깐 멈추고 이거 혹시 내가 꺼려하는 그 카모메식당 감독인가 찾아보았더니 그건 아니었다.

그래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계속 보았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왜이렇게 영화가 카모메식당이나 안경하고 비슷하지.


시골생활에 대한 환상때문에 현실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는 인위적인 느낌이었다.

영화 속에서 시골집에 놀러온 아이들은 얌전히 헝겊인형을 구경하거나 바느질을 배우고싶어한다.

밭을 망치지 않게 조심히 뛰어다니고 음식도 흘리지 않는다.

그림책도 아닌 긴 동화책을 읽어주자 다같이 집중하여 조용히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영화속 아이들은 귀엽고 얌전하고 듣기 좋을 정도로 조근조근 떠든다. 

하지만 이건 어른의 환상속의 아이들이지 살아서 실제하는 아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주인공인 고양이 톰씨는 등장인물 중 누구와도 애착이 없는 듯 보였다. 

'톰, 죽으면 안돼' 라고 장염에 걸린 고양이에게 말할 때에도 정작 고양이는 영문을 모를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고양이에게 대단한 연기를 바란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동물의 자연스러운 편안함이나 행동이 보이지 않았다.

특히 어린 아기고양이에게 일반 우유를 먹이라는 장면에서 나는 막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이런 영화 때문에 우리 '교'가 죽었었다.

물론 반은 내 탓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매체를 만들거면 정확한 정보를 줘야지.

유당분해효소가 없는 아기 고양이에게 일반 우유를 주면 죽을 정도로 위험하다.






아주 오래전 당시의 남자친구와 나는 비 오는 산책길에서 울고 있는 아기고양이를 발견했다.

어미를 찾았지만 보이지않아 5분쯤 망설이다 데려왔었다.(그러는게 아니었는데..)

데려와서 잠시 생각해보니 티비나 책에서 고양이에게 우유를 데워주는 장면을 많이 본게 기억났다.


그래서 우리가 마시던 우유를 따뜻히 데워 떠 먹였고,

다음날에는 작은 젖병을 구해서 본격적으로 따끈한 우유를 두시간마다 먹였다.

고양이는 안타까울정도로 계속 설사를 했고 인터넷을 찾아봤을땐 너무 늦었었다.

아가 고양이는 일주일만에 죽었고, 우리 둘은 말없이 고양이를 땅에 묻고 돌아왔다.


그때 우리는 슬프다기보다는 지쳐 있었다.

어떻게든 살려보려는 노력으로 인해 잠은 부족했고 서로에게 짜증도 냈다.

차라리 고양이가 편안히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죄책감만이 나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렇게 된 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데려와서 우유를 먹인 우리의 책임이었고

그리고 이런 인위적인 영화 때문이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화면을 꺼 버렸다.













마침내 마지막 교환일기 세 권을 마저 찢어 버렸다.


마음이 내킬때마다 물건 줄이기를 하는데 애착이 있는 물건이라 해도 마음에만 묻어두자 싶어 대부분 없앤다.

그런데도 무슨 물건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중학교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5-6년을 우리 셋은 붙어다녔다.

그리고 둘씩 짝지어 총 3종류의 교환일기를 썼다.

그렇게 모인 교환일기가-내가 갖고있는것만 해도- 열 권정도 되었었다.

나는 산만하고 외롭고 불안한 내 어린시절을 들춰보기가 싫어 다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모두 잘게 찢어서 정리하고 버렸다.


그리고 세명 중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나머지 한 친구에게는 차마 전화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번주까지는 전화해서 셋이서 만나려고 한다.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나는 청소년기에 정말로 말할 것이 별로 없어진다.

늘 붕 떠있고 감정적이던 나를 지켜봐주고 곁에 있어주던 친구들이었다.

그 친구들이 나에게 상처를 준 것이 아니었다.

상처를 받았다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내가 그랬다.

좋아, 괜찮아, 하며 무리해오다가 견딜수없어 도망쳐버린 나의 문제였다.



뭔가를 되돌리거나 새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마무리를 잘 해두고 싶었다.

우리는 내일 어떻게 될지,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아무도 모르니까.





5년만 지나면 있으면 한 친구의 큰 딸이 우리가 만났던 나이, 중학교 2학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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