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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나 Feb 04. 2020

친구가 되어준 종이들

과거 얘기를 하면 괜히 고개를 숙이게 된다.

과거의 나는 지금보다 몇배는 더 미숙하고, 지루하고, 불안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처음으로 꾸준히 일기를 쓰던 때는 고3때였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수능공부를 혼자해보겠다고 하던 그 해. 

물론 목적은 내가 아니었다. 부모님 기쁘게 해주기 + 나한테도 좋겠지. 이 정도였다.

그래서 마음이 크게 동하지 않았고, 마음이 동하지 않으니 공부는 늘 지루하고 답답했다.

하루 하루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고 아무도 내 기분을 알아주지 못했다.

그래서 문구점에서 눈여겨둔 두꺼운 노트를 사서 처음에는 드문 드문 쓰고 싶을때만 썼다.

그러다 외로워지니 거의 매일 일기에 털어놓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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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학교에서 민경이랑 혜정이랑 주희랑 '미래'에 대한 얘길 했었어.

(말하다가 선생님한테 떠든다고 걸렸지만)

난 커서두 민경이랑 같이 얘기하구 우리 넷이 모여서 놀구 싶은데

그게 그냥 지금뿐일까?

아님 그때가서 새로운, 더 좋은 친구들이 생길까?

그것도 아님 인생에 있어 '친구'란건 유효기간이 있는거구 필요없는 걸까?

그래 어쩌면...

2000.10.2 (PM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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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의 내 일기장에는 친구와 좋아하는 남자애, 공부, 자기혐오, 그리고 온통 어리광 뿐이었다.

펼쳐보기조차 싫던 내 일기장을 오늘 펼쳐보니 거기엔 그냥 여자애가 있었다.

자기를 미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던 보통의 열아홉살 여자애.








열아홉 이후로는 일기를 잘 쓰지 않았었다.

그러다 24살때 두번째로 취직한 웹디자이너 일을 하며 죽어라 힘들때가 있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정말로 지나가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시간이 반드시 흘러가야했고 어디로든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지나간 일기를 읽으니 확실히 시간은 성실히 흘러갔다.


그 일기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외박하거나 여행할일이 있으면 편지지에라도 써서 일기장에 따로 붙였다)

15년동안 이어졌다. 일기장은 매년 차곡차곡 쌓였다.


그 중 스물 아홉의 나는 이렇게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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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도서관에 같이 갔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생기 있게 지내는 것 같은 날엔 기분이 좋다.

반대로 일요일 저녁같은, 우울함이 보이면 나도 우울하고.

2010년 7월 14일 수요일 PM 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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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샜다. 그리고 드디어 교원 일 끝냈다. 표지수정까지 싹.

누가 시키지도 않은 표지 벽지무늬 그리느라 밤을 샌거다. 아 미련해. 어지럽다.

어제 새벽 4시반이 넘어 자고 아침 10시반에 기상해서 화장실가고 세수만 하고 바로 일했다.

정말 거의 쉬지도 않고 17시간을 일만 했다. 거기다 오늘 최고 더웠다.

2010년 8월 6일 금요일 새벽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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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에서 돌아와 엄마와 아버지와 지내며 일을 했었다.

그리고 인천에 살던 친구와 함께 운동을 하겠다고 인천까지 왔다갔다했다.

자주 술을 마시거나 일을 하며 밤샘을 했다.

몸에 무리가 오거나 손가락이 부러지기까지 했었다.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고 쉬는 날마다 취하시는 아버지의 멋쩍은 얼굴을 보기가 괴로웠다.

우리 가족의 가장 불안한 해였지만 중간중간 재밌었고 가슴 뛰던 일도 기억난다.








생각해보면 내가 힘든 이유는 '이렇게 힘들 이유가 없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늘 내 생각에 다 자란 어른이었고 아무도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조차 내 어리광을 받아주는 법을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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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무사히 잘 다녀왔다. 사실 엄마는 여행중 어디를 봐도 그리 감탄하지 않는다.

작은것에 번번히 감탄하는건 바로 나다.

어쩌면 연휴마다 엄마와 가는 여행이 효도여행이 아니라,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내 자기만족을 위한걸지도 모르겠다

2020년 1월 27일 월요일 AM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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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영어 때 안드레아가 나에게 해준 말이 생각난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아.

너는 외국에서 네가 원하는 경험을 할 자격이 있어.

내가 언제 네 말을 못 알아들은적 있어? 없지?

그러니까 해봐. 내가 언제든 도와줄게.

라고.

2020년 1월 28일 화요일 AM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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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른아홉의 내가 며칠전에 쓴 내 일기장.

여전히 엄마와 살고 있고 여전히 그림으로 근근히 버티는 나.


지난 일기를 읽다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여기에 적힌 얘기들은 내 인생의 극히 일부분일 뿐인데도

이 글씨들이 내 모든걸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일기를 쓰는 방식은 25살 이후로 감정보다는 거의 일상의 기록 수준이다.

무얼 먹었고 언제 일어나고 잤으며 무슨일을 했고 누굴 만났고 얼마를 받고 썼는지.


나에 관련된것만큼은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해왔던 나인데도

일기를 읽으면 전혀 생소한 부분을 읽어 깜짝 놀랄때가 많다.

그만큼 나는 얼마나 많은 작은 부분들을 잊고 지내는 걸까.


이 종이들은 나를 반영하고

내면의 나는 누가 뭐래도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다.



서른아홉의 지금의 나를 십년후에 내가 볼 때 어떤 생각을 할까 생각해봤다.

나이같은것에 매이지 말고 너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너는 죽을때까지 덜 자란 사람이자

너는 죽을때까지 완벽한 사람이라고.

아마 그렇게 말할 것 같다.


그러니 오늘밤도 별것 아닌 일기를 쓴다.

누구보다도 십년후 이 글을 읽어줄 나 자신을 위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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