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켜, 도시의 빛

by 강고요

사원들을 둘러본 후, 옛 건물과 현대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 사이 현대 미술관이 하나 있어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나름 전공자 코스랄까. 미술관 이름은 어반뮤지엄(Urban Museum). 외부 간판엔 줄여서 'UR-MU'라고 쓰여 있었다. 총 5층으로 꽤 큰 공간이었다.


우리가 갔을 땐 <Strategies of Dissent>라는 제목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작품들은 Ng Seksan(응섹산)이라는 말레이시아 출신 조경건축가의 컬렉션으로 구성돼 있었다. 전시 제목에 쓰인 Dissent가 주로 정치적 맥락에서 '저항'이란 뜻으로 쓰이니, 역사적 내러티브가 담긴 작품들이 많겠구나 싶었다. 역시나 말레이시아 역사를 바탕으로 예술가의 사상적 역할을 고찰하게 하는 작품들이 대다수 눈앞에 펼쳐졌다.


전시를 흥미롭게 둘러보고, 주변에 있는 몰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우린 마데카 광장(Merdeka Square)으로 향했다. 마데카 광장은 1957년,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 영국 국기를 내리고 말레이시아 국기를 게양한 장소라 한다. 즉, 말레이시아 독립을 상징하는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가보니, 광장 한편에 위치한 말레이시아 국기가 엄청난 높이와 크기로 바람에 따라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고개를 높이 들어 웅장한 깃발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한 나라의 독립이 지닌 의미와 가치가 새삼스레 와닿았다.

마데카 광장 내 게양된 말레이시아 국기. 마데카는 말레이시아 어로 독립이란 뜻이다.


광장 멀리로 파란색의 유독 높은 건물이 하나 눈에 띄었다. 바로 '마데카 118(Merdeka 118)' 빌딩. 높이 678.9m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2023년 완공됐는데, 현시점 말레이시아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높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마천루라 한다(첫 번째는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다).


마데카가 말레이시아 어로 독립이란 뜻을 지닌 만큼, 과연 말레이시아 사람들에게 독립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건축 외관은 말레이시아의 송켓(songket)이란 전통 직물 모양에서 영감을 받아 삼각 형태의 패턴을 적용한 것이라 한다. 페트로나스트윈빌딩도 이슬람의 아라베스크 디자인을 연상시키도록 형상화했다 했는데, 한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세계적인 마천루 설계에 더한 부분이 과하지 않으면서도 독창적인 건축 외관을 탄생시킨 주요 매개가 된 것 같아 왠지 더 멋져 보였다.

광장 주변엔 마데카 118 같은 최신식 건물뿐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건물들도 즐비해 있다. 이게 바로 쿠알라룸푸르의 공간적 매력인 듯했다. 식민지 시기 지어진 유럽풍 건물부터, 말레이시아 건축 양식이 적용된 전통 건물, 그리고 마천루까지. 마데카 광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건물들이 모여 앉아 한 나라의 역사적 흐름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었다.


한편, 광장에 무척 고풍스러워 보이는 분수도 하나 눈에 띄었다. 바로 빅토리아 분수. 1897년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영국에서 제작되어 1904년 쿠알라룸푸르에 설치되었다 하는데, 다채로운 청록색으로 어우러진 색상 조합이 무척 오묘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바라봤다.


꽤 큰 동선으로 쿠알라룸푸르를 즐긴 우리는 더운 날씨에 슬슬 지쳐 다시 그랩을 잡아타고 수리야몰(에어컨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몰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하며 휴식을 취한 뒤 지인들에게 줄 선물 쇼핑도 좀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이라 숙소에 있는 야외수영장에 수영을 하러 갔다. 고층 수영장에 들어서자, 난간 아래 빼곡히 펼쳐지는 마천루의 향연이 마치 말레이시아가 자신의 기술 성장을 맘껏 뽐내고 있는 듯했다. 그 와중 바로 눈앞에서 거대하게 반짝이며 서 있는 페트로나스트윈빌딩은 가까이 있기도 했지만 높이와 크기가 압도적으로 커 문득 공간감이 사라지며 오묘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보석처럼 반짝이던 페트로나스트윈빌딩 야경

신비로운 도시 배경 속에 오랜만의 수영을 마음껏 즐긴 우린 마지막 밤, 쿠알라룸푸르의 스펙터클한 야경 시티뷰를 여러 번 눈에 담고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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