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팟제를 뒤로 하고 간 곳은 '페낭 페라나칸 맨션(Pinang Peranakan Mansion)'. '페라나칸'은 말레이시아로 건너온 이민자와 말레이시아에 사는 현지인 간의 혼혈 후손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중국 이민자와의 후손이 많으며 남성은 바바(Baba), 여성은 뇨나(Nyona)로, 따로 호칭이 있기도 하다.
페라나칸의 상당수는 중개 무역이나 영국 식민지 시기 요직을 맡은 덕에 부유하게 지냈다 한다. 따라서 부를 과시하며 화려하게 살았고 그들만의 독특한 혼합 문화를 남겼다. 방문했던 페라나칸 맨션 역시 19세기말 부유했던 페라나칸 한 가문의 저택을 복원한 것. 그런 만큼 호화로웠던 생활양식을 쉽게 엿볼 수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중국식 안뜰, 유럽식 스테인드글라스, 말레이시아식 재료 등이 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뽐냈다. 내부에는 식당, 침실, 응접실 등 각종 생활공간부터 가구, 의상, 장신구, 공예품 외 크고 작은 일상 용품까지 약 1,0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한다. 다채롭게 섞인 유물들은 언뜻 봐도 혼재된 문화가 강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크고 복잡한 분위기에 압도된 때문인지, 아님 더위 때문인지 입구 중정에 나란히 놓인 의자들을 발견한 나는 자연스레 한 자리를 꿰차 앉았다. 커다란 선풍기가 오가며 시원한 바람까지 보내니 일어나기가 더 어려워져 한참을 앉았다 일어났다.
건물은 중정으로 이어져 꽤 넓게 퍼져있었고, 2층까지 둘러볼 수 있었다. 방마다 볼거리가 가득했는데, 개인적으론 물건들이 단순히 가득한 걸 넘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조금은 선별해 전시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한편 들었지만 나름 흥미롭게 둘러보고 나왔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간 곳은 서포크하우스(Suffolk House). 페라나칸 맨션과 달리 한적한 공원에 홀로 고고히 서 있는 건물이었다. 한 순간에 유럽 어느 저택 앞에 도착한 듯싶었다.
서포크하우스는 페낭 섬을 영국 식민지로 만든 페낭 초대 총독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라는 영국인이 거주했던 곳이라 한다. 이후 행정 중심 공간으로 쓰이며 확장돼 대저택으로 완성됐고, 총독 관저가 다른 곳으로 이전한 다음에는 학교, 병원 등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 방치됐다. 2000년대 들어서 페낭 정부와 단체가 건물의 가치를 깨닫고 복원했으며 현재는 레스토랑과 함께 여러 행사 공간으로 사용된다 한다.
우리는 레스토랑의 애프터눈티세트를 미리 예약해 뒀었다. 1층은 행사가 없어서인지 운영을 안 하는 분위기였다. 직원 분의 안내를 받고 2층으로 올라가니 자그마한 외부 공간이 먼저 반겼다. 서포크하우스의 역사가 간단히 전시돼 있어 한번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대감으로 들어서니 정갈하고 예쁜 공간이 펼쳐졌다. 우린 예약 확인 후 2인 자리로 안내 받았다. 직원분의 설명을 듣고 각자 먹고 싶은 티를 먼저 골랐다. 사실 점심을 다소 늦게 먹어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예약해 둔 탓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티가 나온 후 이어서 기다란 고깔 모양의 예쁜 뚜껑으로 덮인 애프터눈티 간식이 등장했다. 직원 분이 뚜껑을 여니 연기가 자욱이 새어 나오며 다소 요란하게 음식이 등장했다. 샌드위치부터 스콘, 브라우니 등. 보기만 해도 배불렀던 우리는 남기면 싸가자며 하나씩 맛보기 시작했다.(결국 몇 개 싸왔다.)
그때 배고팠다면 너무 맛있었을까? 사실 대단히 특별한 맛은 아니었고 맛있지만 아는 맛 정도였다. 좋은 분위기에서 차와 푸짐한 간식을 즐기고 싶다면 추천이다. 역사적 의미도 있는 공간인 데다 멀지는 않으니 한번 들러도 좋을듯!
그야말로 배가 터질듯 먹은 우리는 다시 택시를 타고 조지타운 시청이 있는 바닷가로 향했다. 페낭 '섬'에 왔으니 물은 한번 봐야지. 딱 봐도 시청 건물 역시 영국 식민지 시기 지어진 건물이었다. 현재는 조지타운 시의회 본부로 사용된다 하는데, 내부는 볼 수 없었다. 바닷가에 키 큰 야자수와 커다란 서양 고전식 건물이 우뚝 서 있으니, 서포크하우스 앞에 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가 또 어딘가 싶었다.
바닷가와 반대 방향으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콘월리스라는 요새(Fort Cornwallis)가 나온다. 페낭이 영국 식민지가 된 후 해적과 외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라 하는데 실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좀 더 걸어가면 커다란 시계탑도 구경거리다. 1897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것으로 한 부유한 지역 상인의 기부로 제작됐다 한다. 시계탑이 약간 기울어져 있어 페낭의 피사의 사탑이라는 별칭도 있다고 하는데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의 폭격 여파라 한다.
저녁때가 다가오자 날씨가 흐려지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펼쳐 쓰고 페낭 거리와 건물을 다시 눈에 담으며 집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짧은 일정이라 벌써 페낭에서의 마지막 밤. 집을 다시 나선 우리는 가벼운 안주와 함께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마시며 아쉬운 마음을 살짝 달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