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품은 페낭길

by 강고요

어느덧 페낭을 떠나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날 아침. 어제 받아둔 쿠폰을 챙겨 앨리카페로 향했다. 플랫화이트 두 잔을 시키고 한 잔은 쿠폰으로 계산했다.

맛있게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사장님께서 오시더니 어제 내가 산 원두와 같은 원두로 내린 드립이라며 맛보라고 두 잔을 건네시는 게 아닌가...! 센스쟁이 사장님 덕분에 기분이 좋아져 나오기 전, 맛있었다고 한 번 더 인사를 드렸다. 페낭에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꼭 들러야지.

원두 구매 영수증에 수기로 써주신 커피 한 잔 쿠폰


그동안 '찾아간 곳' 위주로 페낭을 소개했지만 사실 페낭을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바로 '길거리'다. 숍하우스들이 줄지어있는 독특한 거리 풍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페낭의 거리예술 때문이기도.

페낭 거리에서는 심심치 않게 벽화를 볼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어니스트 자카레비치(Ernest Zacharevic)라는 리투아니아 출신 작가 작업이 유명하다.

자카레비치는 말레이시아 페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거리예술(Street Art)과 순수미술을 결합한 작업으로 유명세를 탔다. 페낭에 있는 그의 벽화 가운데 '오토바이탄 소년(Boy on Motorcycle)'과 '자전거 탄 아이들(Children on Bicycle)'은 일종의 관광 명소가 되어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북적일 정도. 우리가 갔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토바이탄 소년(Boy on Motorcycle). 실제 오토바이 설치와 그림이 같이 작업됐다.
자전거 탄 아이들(Children on Bicycle). 마찬가지로 실제 자전거와 그림이 같이 작업됐다.


사실 거리예술은 태생부터 미술관 안에 있는 작품들과는 다르다. 미술관에 고이 모셔진, 손대면 큰일 날 듯한(실제 큰일이 날 수 있음) 작품들은 감상하고 교감하는 대상인 동시에 가격이 매겨져 있는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전시되고, 갤러리에서 판매되며, 옥션에서 노골적으로 사고 팔리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벽에 그려져 옮길 수도, 그대로 보존할 수도 없는 벽화는 사고파는 게 불가능해 이미 자본주의 시스템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몇몇 스트리트 아트 작가들은 반(反) 자본주의 메시지가 담긴 사회 문제를 다루곤 한다. 이는 벽화를 매체로 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벽화라는 장르를 활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오토바이 탄 소년'과 '자전거 탄 아이들' 두 작업은 실제 오토바이, 자전거가 설치돼 사람들이 걸터앉아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관객들과 상호작용 하는 작품인 셈인데 이것 역시 작품에 손 대면 안 되는 미술관 내 작품들과는 다른 지점이다.


뱅크시(Banksy)라는 영국 출신의 대표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있다. 뱅크시 역시 자신을 예술 테러리스트라 자처하며 이벽 저 벽에 반자본주의적 시각을 표출해 왔다. 그러던 그가 유명해지자 일련의 재밌는 일들이 벌어진다. 뱅크시가 누군가의 벽에 그래피티를 그리고 사라지면, 집주인들이 어떻게든 그래피티를 보존하고, 심지어 집값이 뛰거나 건물이 통째로 경매에 나오기까지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파급력을 확인한 뱅크시는 이를 조롱하듯, 센트럴파크에서 자신의 그림을 익명의 작가로 설정해 가판대에 두고 60달러에 팔았는데 단 세 명만이 구매했다고 밝혔다. 즉, 작품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작가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는 것을 그만의 위트 있는 방식으로 비판한 것이다.

뱅크시에 대한 또 하나 유명한 사건이라면 2018년 옥션에서 거래된 작품, '풍선을 든 소녀(Gilr with Balloon)' 관련 해프닝이 있다. 작품이 낙찰(한화로 약 16억)되자 갑자기 액자 속 작품이 아래로 내려가며 파쇄되기 시작해 중간쯤에서 멈춘 것이다. 현장 사람들의 놀란 표정은 당시 낙찰 순간을 담은 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뱅크시는 자본주의 미술시장을 비판하기 위해 퍼포먼스를 준비했는데 작동이 되다 말아 다 파쇄되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다. 재밌는 건 3년 후인 2021년, 반이 파쇄된 이 작품이 '사랑은 쓰레기통에(Love is in the Bin)'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옥션에 나왔는데, 화제성과 역사성까지 품어버린 이 작품은 이전보다 무려 18배 오른 가격(한화로 약 304억)으로 낙찰됐다. 뱅크시의 계획이 철저히 실패로 돌아간 셈이다. 이를 두고 뱅크시의 의도에 대한 의심도 있었다. 사실 반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작가라고.


다시 페낭의 뱅크시라 불리는 자카레비치로 돌아오자. 뱅크시야 너무 유명해진 탓에 자의든 타의든 현재 반자본주의 미술가라 할 수 있을는지 의문이 들지만 자카레비치는 아직은(?) 거리예술가의 성격을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며 도시, 사람, 환경 문제 등에 대해 다양한 매체로 다루고 있다.


사실 요즘은 과거에 비하면 미술관에서 품는 작품이 많이 다채로워졌다. 이것 역시 미술관은 그래도 비영리 공간이기 때문. 하지만 영리 공간인 갤러리와 옥션은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 결국 팔리는 작품에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곤 한다. 그렇지 않기엔 자본이 너무 달콤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 측면에서 페낭 거리를 밤낮없이 지키고 있는 자카레비치의 작품을 혹시 본다면 한번 더 눈여겨봐주어도 좋을 것 같다.

자카레비치를 대표로 언급했지만, 그 외 다양한 작가들의 벽화가 페낭 거리 곳곳에 있다.


카페에서 나온 우린 페낭의 거리 벽화 풍경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이제 새로운 도시, 쿠알라룸푸르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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