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 정답 깨는 망치 어디 없나?

합법과 자본이 쌓아올린 과학의 철옹성이 발표하는 권력형 정기 간행물 정답

by 강하단

대학에서 조차 등수 정하기 시험을 봐야 하고 그것도 정답을 찾는 시험을 치른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난 이후 사회의 삶은 정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와 다르다. 달라도 크게 다르다. 물론 정답을 계속 찾는 직업을 택하는 사람이 가끔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발생하면 해결하는 정답이 단 하나인 그런 직업이 아직 이 지구상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직업이 있다면 아마 기계 로봇으로 가장 먼저 대체될 것이 확실하다. 여러 다른 정답이 가능하고 그 정답들이 결정되는 문제의 조건이 간단하다면 그 또한 인공지능 로봇에 의해 자리를 조만간 내줘야할 것 같다. 하나 또는 몇가지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창의적이고 특이한 해결책을 요구받는 사회지만 교육은 여전히 정답찾기 리허설을 하고 있는 꼴이다. 무대와 리허설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의 주체가 교육체계와 교육행정, 그리고 교육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정답 찾는 방법을 온 힘을 다해 알려 주고 연습시켜 주고는 사회 초년생에게 창의성 없다고 나무라는 꼴이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 정말 답이 없다.


수능문제 정답이 여러 개가 있으면 효율성과 혼란이 생길 것이라 할 것이다. 아니다. 그냥 그런 문제를 출제할 능력이 기성세대에게 부족한 것 뿐이다. 주관식 문제가 수능에는 부적합한 이유를 채점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힘들 것이라 한다. 아니다. 그냥 공정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수능 그리고 기껏해야 내신, 학적부와 면접을 이용하는 선발 정도로만 대학입시를 이해하는 지금 교육체계의 한계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용감하게 자신을 밝히라고 학생에게 가르치고는 기성세대는 제대로 작동가능한 교육체계를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급급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바꿔야할지 해결을 말해 보자.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되어 버렸다. 지금 대학 중심의 교육체계는 얼마 남지 않았다. 교육은 백년대계인데 백년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지금의 교육체계는 기반부터 흔들릴 것이 확실하다. 마치 철옹성 처럼 보이던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 숫자 60만은 3-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학생없는 대학은 존재할 수 없다. 이를 지방대로 축소, 한정해서 문제를 보면서 수도권, 특히 서울내 대학은 건재할 것이라고 안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심하지만 비판하기 보단 그냥 두는 편이 나아 보인다. 억지로 변화시키는 것 보다는 뿌리가 흔들려 무너지게 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효과적 변화는 때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효율적이다.


대학은 건재할 것인가 하고 질문하기 보다 대학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묻고 답해야 한다. 묻고 답해야 하는 주체가 정치권, 교육행정, 교육체계가 아니라 교육담당자인 교육자여야 한다. 그리고 교육자는 묻고 답하기 위해 정치권, 교육행정, 교육체계와 상의하지 말고 사회와 직접 대화해야 한다. 대화하여 길이 어렴풋이 보이면 그 때 정치권과 교육행정에 일을 시키면 된다. 그래서 만들어 지는 것이 교육체계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본이다.


사회에서 대학이 담당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묻고 답하면 모든 것은 풀린다. 사회는 정답찾기 게임이 아닌데 정답찾는데 귀신같은 재능을 가진 구성원을 양산해서는 안된다. 정답없는 사회에서 그들은 혼란을 겪다 합법과 돈이란 이름의 힘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법과 돈의 권력 속에서 정답을 찾는다. 그런 방법만 배웠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질서 보다 법이 먼저일 순 없다. 경제의 흐름보다 수단인 돈이 먼저일 수는 없다. 하지만 질서 보단 법, 경제 보단 돈이 우선이다. 현실이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질서와 경제 속에서 정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법과 돈 속에는 명쾌하게 떨어지는 정답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질서와 경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과학에는 정답이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냐고 한다. 이런 믿음은 법과 돈이 가진 환상보다 더한 중병이다. 과학을 곡해하면 그 어떤 병보다 고치기 힘들다. 법도 시대와 사회의 상황이 바뀌면 개정되고 돈은 흘러 재 배분되기도 하는데 과학만큼은 꿈쩍도 않는다. 과학은 지식인데 과학이란 이름 아래에서 지식으로 굳어지면 바뀔 줄을 모르니 과학만큼 고리타분한 정답찾기 경쟁도 없다.


합법과 자본이 쌓아올린 과학의 철옹성은 그들의 권위있는 정기 간행물 속에서 발표하는 정답을 세계에 공표하는 식이다. 이 정답을 제대로 익히면서 효율적이고 합법적으로 실행할 때 순위가 정해지는 성공이 따른다.


과학은 지식이고 지식은 쌓여 있는 재고더미에 불과하다. 지식이라고 말하는 순간 고인 지식이 된다. 문제는 고인 물 형태의 지식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고인 물 지식을 지켜주는 과학을 가장한 저수지 댐을 합법적으로 자본을 활용해 건설했다. 고여 냄새나는 지식을 저수지 문을 조금씩 방류해 하류 지역 주민들이 사용하게 한다. 고인 물 지식을 관리하는 과학 논리가 이런 모습이다. 당연하고 뻔한 진리지만, 과학은 본래 그런 것이 아니다. 과학이 지식인 것은 분명하지만 과학을 제대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지식에 수식어와 조건이 붙어야 한다. 지식이기는 하지만 인간의 지식이고 지식을 생산하는 인간은 자유로와야 한다. 자유로운 인간이 개념을 통해 만드는 지식이 과학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정의이다.


바로 알고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문제는 저절도 해결된다. 지금 교육이 안고 있는,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는 그 실체를 바로 아는 것에서 해결이 보일 것이다. 여전히 오리무중인데 수많은 정답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은 정답을 강요하고 강제하는 모습을 걷어내는 것 이상 따로 할 것이 없다. 해서도 안된다. 잘못된 정답을 믿고 여러 대책을 내면 겉돌고 오류를 반복할 뿐이다. 정답을 강요하는 법과 자본의 권력에 이제는 그만 휘둘리고 지금은 “정답 없음”을 바로 아는 것이 급한 용무이다. 그러면 우리의 본 모습이 서서히 다시 보이고 갈 수 있는 길들도 드러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용기와 인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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