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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하단 Aug 24. 2023

“제사”, 제대로 욕 먹고 있는 문화

장남과 장손의 며느리에게 우린 큰 빚을 졌다

제사 만큼 힘들어 하면서도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문화가 이 시대 우리 사회에 또 있을까. 어찌보면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통과의례 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다. 제사가 죽음을 삶 속에서 이해하는, 삶과 죽음 사이 어디쯤 위치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하니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일방적으로 제사를 구시대 잔재 쯤으로 몰아 붙이고는 정리해 버리면 그동안 평생 제사에 힘과 정성을 쏟아온 우리 사회 맏며느리 분들에게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 꼭 집고 넘어 가고 싶다. 실컷 고생만 시키고는 마치 쓸데없는 일에 매달렸다는 굴레까지 씌우려는 한심한 인간들의 편리한 논리를 인정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서 죽음이 얼마나 깊숙이 일상 속 의미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는 젊은 세대라도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한 제사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새로운 시대는 죽음을 지우는 문화의 특징을 갖는데 건너기 힘든 삶과 죽음의 중간 경계지역에 마치 고속도로를 하나 둔듯 하다. 제사의 원래 목적은 분명했다. 망자와 함께 했던 기억을 쉽게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후 제사란 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굳어져 지키지 않으면 해를 당하거나 복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을 심어주게 되고 지켜야할 규범이 되기도 해 주위의 눈치를 봐야 하는 문화가 되어 버렸다. 그럼 왜 제사를 그만 두지 못했는가? 제사가 의미와 상징의 많은 것 이었던 시대의 유산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대에서 중단시킨다는 부담감도 한몫 했을 것이다. 이런 부담을 덜어준 계기도 있었다. 신 문명의 종교가 대표적인 예인데 우리 문화에 어렵지 않게 경착륙하는데 성공했다. 새롭게 접목이 된 다른 문명의 종교가 제사의식의 의무와 중압감으로부터 탈출시켰다. 우상숭배 금지라는 종교적 특성도 있겠지만 1년에 한번 조상을 기리는 대신 매주 기억하면서 마음으로 소환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납득이 갔을 것이다.


제사의식과 문화 규범에 나름 이해가 되다가도, 기억의 문제를 참 많이도 왜곡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망자가 된 조상의 기억이 삶의 여러 의미를 해석하는 매개 또는 강력한 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죽음을 매개로 한 의미 보다는 어느 순간 제사는 집안의 경제권과 정치권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특히 유교문화에서 심했다. 집안 경제권을 대물려 받는 사람과 제사를 맡아 책임져야할 사람은 다르지 않았다. 집과 땅을 물려 받는 것은 곧 제사를 물려 받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경제력 뿐만 아니었다. 제사를 주관하는 집안 여러 자손들의 대표가 정계로 나가 나랏일을 함으로써 집안을 더 번성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과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것이다. 집안 문중에서 정계 입문을 직접 추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훌륭한 스승을 모셔와 가르치게 했을 것이다. 산업화로 인한 농경사회의 붕괴는 그런 문화를 송두리채 바꿔 놓았다. 경제력과 입신양명의 여러 혜택은 사라진 제사만 남게 되었다. 권리와 의무가 함께 했기에 권리와 혜택이 사라지면 의무도 사라질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사에 대한 의무감은 사라지지 않고 형식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많은 장남, 장손들은 경제권을 물려 받지 못하고 한 집안의 가장 역할과 제사의 제주로서의 책임은 떠 맡았다. 가장과 제주는 조선시대의 권리와 의무를 동시에 가졌었다면 일제시대 이후 권리가 사라진 의무만 그들에게 남았다. 그리고 되물림되었다. 일제시대 태어난 장남, 장손의 자손이 대개 베이비부머 86세대다. 의무만 남은 부모시대의 제사를 물려 받아 “우리 장손은 다르다. 든든하다. 복받을거야”라는 말을 어린시절 부터 들으며 그렇게 착한 장손이 되어야 했다. 일제시대 태어난 부모는 자신들도 그랬다는 말로 제사를 물려 주고는 자식에 대한 미안함을 달랬다.


제사의 의무는 이후 한국사회에서 반세기 이상 이어졌다. 베이비부머 86세대가 이제 나이들면서 조금씩 변화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가 미뤄왔었던 결심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자신들의 세대에서 의무 뿐인 제사라는 짐을 내려놓고 자신들의 자식세대에게는 더 이상 물려 주지 않겠다는 결단을 한 것이다. 물론 훨씬 이전에 종교적 이유로, 사찰에 맡기는 형식으로 제사를 잇지 않았던 베이비부머 86세대도 있었고, 제사음식을 모두 시장에서 구입해 어쨌든 제사를 지냈다는 구색을 맞춘 사람도 있었지만 힘들지만 정성을 다했던 사람들의 결심이 내려지는 계기를 팬데믹이 제공했다. 시장에서 장을 봐 몇일간 다듬고 제사음식 마련 후 제사에 참석한 가족들의 식사까지 담당해야 했던 장남, 장손의 며느리의 일은 자신들 세대까지만 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꽤 긴 시간이었다. 조선사회, 일제강점기, 해방 후 산업사회, 디지털 사회 초입까지도 이어졌다. 제사가 조선사회의 유교 문화였다면, 씨족사회, 마을사회가 산업화된 도시 문명으로 전환하는 시대 가족이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순간을 제사가 제공했다. 산업사회 문명으로 전환되는 경계선 역할을 어쩌면 베이비부머 86세대가 담당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서양 기독교 사회 가족이 만나는 기회를 크리스마스가 제공했다면 근대 이후 한국사회의 가족 상봉은 제사가 제공한 것이다. 가족의 만남이란 기회를 제공했던 제사는 장남과 장손의 며느리들의 희생을 전제로 가능했다. 이렇게 보는 해석, 시각에는 한가지 강력한 근거가 있다. 온전하게 의무만 가지는 의례는 분명 희생이다. 권리와 혜택없는 의무가 오롯이 장손과 장남에게만 부여되었다는 것은 의무를 질 필요가 없었던 장손과 장남 아닌 자손들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묘하게 다른 메타포를 가지게 해 준다. 사회에서는 민주화의 임무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과 닮아 있다. 제사를 중단했다는 일종의 죄책감과 민주화 시대 운동권 세대가 겪고 있는 이데올로기 굴레는 그렇게 묘하게 닮아있다.


어찌되었건 간에 제사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마무리는 필요해 보인다. 그 긴 시간을 그렇게 중요하게 온 정성을 다해 제사를 모셨다면 제사가 처음 만들어진 의미있는 배경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사회가 외부에 의해 끝이 나고 근대가 밀려 들면서 제사의 의미를 깊이 있게 고민할 기회는 없었다. 조상을 잘 모셔야 자손이 잘 된다는 믿음의 형식만 남게 되었다. 원래 의식을 만들어낸 의미의 근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제사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죽음이 삶 속에서 해석되는 과정이었다. 두렵고 두려운 죽음, 아픈 이별의 순간을 극복하기 위해 망자의 기억을 갖고 망자와 함께 슬퍼하고 추억할 수 있는 기억을 새기는 순간이었다. 소중한 순간이었기에 귀하게 모셨던 것이다. 이후 귀하게 모신 형식은 의미를 잃어 부담스런 허례허식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말이다. 새로운 시대 맥락을 잃어 의미를 상실한 형식은 정리할 수도 있지만 대신 그 형식이 원래 담당했던 역할은 어떻게 할지 고민해야 한다. 죽음에 대한 문제말이다. 죽은 사람에 관심없고 산 사람의 현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은 인류가 분절된 삶의 시간으로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믿음과 다르지 않다. 돈되는 아파트에 살고 정치인이 국가를 운영하고 재벌 경제인이 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믿음과 비슷하다. 평생 돈벌고 투표로 민주주의 지키고 재벌이 상장한 주식투자하는 삶이 모두라고 믿는 삶이기도 하다. 지식과 심지어 지혜까지 모두 데이터화되어 구름 클라우드에서 필요할 때마다 인공지능이 가져다 주는 세상의 코드가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다.


죽으면 생명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정말 그렇게 간단했다면 처음부터 제사란 의식도 없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로 전이하는 순간에도 죽음은 분명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디지털기술이 죽음 자체를 극복시켜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빅데이터에도 죽음의 개념은 분명 존재한다. 맑은 하늘 구름이 피었다 사라지는 것과 같은 빅데이터는 죽음의 코드와 알고리즘이 다르지 않다. 두 세상이 경계면없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그런 우주는 없다. 하물며 삶과 죽음 이겠는가. 제사는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뮤즈로서의 박물관 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의 역할을 어떤 형식으로든 담당할 제사를 대신한 존재가 재탄생할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 옆에 이미 와 있는데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확한 통계야 알길 없으나, 베이부머 86세대 장손과 장남 그리고 며느리가 산업사회, 디지털 시대 가장 자유로운 사고를 지향하리라는 추측은 결코 과하지 않다. 그들이 시대와 문화의 경계면에서 고민하고 역할을 기꺼이 담당했던 생존자 아닌가. 시대를 옮겨 새로운 경계면이 만들어 졌을 때 그런 위기의 순간을 그닥 힘들어 하지 않고 또한 동료의 아픔에 눈 돌려버리지 않고 귀기울이기는 역할도 담당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패미니즘, 성차별없는 사회, 좌우 이데올로기 극복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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