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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화석 Oct 04. 2024

책에 대한 소회(所懷)

내 삶의 안쪽_1

나는 책에 대해 어떤 채무라도 있는 듯이, 그다지 책을 탐하며 즐기는 편이 아니면서도 무엇보다도 책에 대한 짐을 안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을 비교적 깨끗하고 단출하게 정리하며 살고 싶어 하는 아내의 바람은 곧 내 소유의 너저분하고 낡아빠진 책 더미 때문에 좌절하곤 한다. 그것들이 깔끔하게 어느 한 곳에 잘 정돈된 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쌓여 있기 일쑤이고, 그 책이란 것도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도 않은, 오래된 그래서 곰팡이마저 슬어있는 문학 류의 책들인 것에 때론 분노하기까지 하니 한편으론 내게 인내하며 살아가는 내 삶의 동반자를 못된 성격의 사람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에 끌렸었다. 책에 대한 관심이 다른 것보다 큰 편이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주변의 또래들보다는 조금 더 읽기는 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책을 꽤 많이 읽는 편도 아니었고 오히려 관심에 비해 적게 읽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책을 읽으면 우선 아는 체를 할 수 있으니 좋았다. 나서는 편이 아니었어도 어떤 상황에서든 또는 누군가가 질문이라도 하면 답을 할 수 있으니 그것은 어린 마음에도 우쭐할 만한 일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니 그런 이유가 떠올려진다. 그럼에도 그 이상으로 책에 끌리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내가 중학생일 때 사는 곳이 서울 변두리였는데, 당시만 해도 논밭이 있고 야산이나 텅 빈 벌판이 꽤 있는 시골 같은 곳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와 보는 것이 좋았다. 어린 시절이라도 도시에 대한 궁금함과 선호할 무엇인가가 서울 도심에는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나도 꽤 호기심이 있는 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일도 없이 무작정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 도심으로 나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주말을 이용하여 남산도서관을 찾아오는 명분을 세워 나오곤 했고, 도서관에 와서 공부하거나 책을 보기 보다는 그런 장소에 와 있거나 그 분위기에 젖어보고자 하는 마음을 앞세웠던 것 같다. 그러면서 가끔 일찍 도서관을 나와 남산의 샛길을 통해 걸어 내려와 명동의 백화점을 구경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서울시청 앞이나 광화문에도 가보았다. 정확한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니 몇 차례 그랬던 것으로 추측이나 하는 것이다. 나는 누군가와 같이 다니는 것도 아니어서 홀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듯 둘러보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할 짓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데, 그때의 나도 그리 여겼던 지, 누구에게도 내가 그랬다는 것을 얘기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즈음에 덕수궁 근처의 어딘가, 그동안 변화가 많았으니 지금의 어디라고 특정하기가 어려운데, 덕수궁 근처 어느 건물에서 도서 전시회가 열렸고 나는 지나가다가 그곳엘 들렀었다. 생각해보면 길가 여유 있는 장소에 가건물을 짓고 전시장을 꾸몄던 것 같기도 하고, 덕수궁 안은 아니었는데, 마치 덕수궁 안의 어느 빈자리에 가건물의 전시장인 것 같기도 한, 아무튼 명확히 생각은 나지 않는다. 1970년대 초반의 일이니 한 오십년 전의 일이다. 나는 그때 그 도서 전시회를 둘러본 것이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


꼬마 중학생이, 교복입고 모자를 쓴 어리숙한 모습으로 대부분 성인용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 그곳에 뭘 알지도 못하고 책도 많이 읽지도 않았던 내가, 그 인파들 속에 끼어 책들을 구경하고 있었고 지금 생각해 봐도 스스로 어색한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에도 내 기억엔 강하게 그때의 인상과 나를 잡아끄는 무언가가 저장되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전시장에서 그 이전엔 누군지도 몰랐던,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의 작가 하인리히 뵐을 알게 되었고, “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은 그의 작품들을 알게 되었으며, 어느 출판사에선가 발행한 그의 문고판 소설을 하나 샀었던 것 같다. 문고판 책일망정 그 책을 살 돈이 내게 있었던가 보다. 그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가 생각나지 않는 것은 아쉬운 일인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전혜린이 쓴 동명의 에세이집을 고등학교에 가서 알게 되었고, 하인리히 뵐의 그 소설을 읽은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 일 가능성이 많은데, 그 책을 내가 언제까지 가지고 있었는지, 그 책을 읽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듯 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독서에 대한 몰두보다는 이런 경험들이 어느 정도는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여전히 지금도 책에는 관심은 있지만 보통 수준에서 독서를 하거나 필요에 의해서 적당히 읽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내가 책을 관심 수준에서가 아니라 더욱 가까이 하고 열심히 읽도록 했다면, 그래서 습관화해서 많은 독서량을 쌓을 수 있었다면 나는 보다 더 유능하고 의미있는 활동을 하는 지식인이나 문학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간에 나는 그렇게 하지는 못했으며, 지금 이 나이가 되었어도 나는 여전히 초보자나 아마추어 같은 수준에서 책을 대하고 있으니 아쉬움과 후회가 일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책을 가까이 하려하고 책을 통해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행이라 여기고 있다. 다양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뒤늦게 시간을 따로 내어 공부를 하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또 마케팅, 소비자 심리, 광고, 리더십, 소통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하면서도 시와 수필, 비평을 틈틈이 쓰다가 결국 문학지에 정식으로 데뷔하여 시인과 에세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책에 대한 관심을 유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람의 인생과 운명은 어느 정도 젊은 시절부터 방향 지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 지난 세월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고, 도전을 시도하면서도 결국은 어린 시절의 관심분야로 돌아오는 것과 그것에의 귀환이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느껴보면서 이미 운명의 기본은 오래전에 틀이 잡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더욱 해본다. 아무튼 지금 나는 고작 7평도 안 되는 연구실에 책을 쌓아 놓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이런저런 소재와 주제에 대해 수많은 글들을 쓰고 있는 중인데, 그 출발은 책으로부터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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