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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화석 Oct 04. 2024

새 무덤

내 삶의 안쪽_3.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

처음엔 '새의 무덤'이라 생각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학교교지에 시를 투고했었던 것은 기억났는데, 시의 제목부터가 뚜렷하지는 않았다. 대략의 그림이 어렴풋이 그려지듯 떠올려지기 시작하더니 부쩍 가끔씩 이지만 생각이 났다. 


어떻게 썼을까? 아니 어떻게 쓰여 졌을까? 벌써 40년 전의 일이니 기억에서 희미해진 것이 당연한 일일 정도로 세월은 흘렀다. 그러나 그 시가 궁금하고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없어서, 제대로 쓸 수 없어서 스스로 답답하기도 했고 또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워 시를 쓴다는 것조차 언급하지 못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니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시를 쓰고자 매달리던 그 생각과 정신이, 그런 간절함이 중요하고 필요한 삶의 원천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서, 그런(?) 시이나마 쓰여 질 수 있는 순간이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그래서 이전의 그런 상태가 그립고 의미롭다고 스스로 위로하게 된 지금에 난 시답지 않았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던 시라 해도 그런 시를 쓸 수 있었던 그때가 그립다는 것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시를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찾았다. 그때의 간행물을 모두 디지털방식으로 다시 저장하게 되면서 인터넷으로 검색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야말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40년 전에 발행되었던 학교의 잡지(교지)일망정 영원히 존재하고 그 콘텐츠를 언제라도 필요할 때면 접속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인터넷으로 학교도서관에 접속하여 책이나 논문을 검색하고 필요한 경우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활용하곤 하는 데, 어느 날 혹시 하여 도서관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해 보니 그 시 제목이 뜨는 것이었다. 또한 그 시 전문을 볼 수 있는 파일이 나타나니 당시의 책 상태 그대로는 아닌, 근래에 디지털 스캐닝digital scanning으로 저장작업을 했을 테니 시간이 흘러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오히려 마음에 울림이 더 전해지는 분위기로 그 시를 볼 수 있었다.


 이문열이 《젊은 날의 초상》을 쓸 무렵, 아마 그도 스무 살 초반이었을 것이다. 다행일 지 그렇지 않을 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를 글로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내ㆍ외적 문제꺼리들이 그를 감싸며 편치 못하게 억압하던 때였을 것이다. 누구는 돈이 없이 가난해서 누구는 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어서 고민인 경우가 있을 테지만 이것은 고민거리도 못된다. 현실적이고 문제해결방법이 이미 드러나 있는 것들은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일 뿐이라면 그것은 매우 단순한 고민상태일 뿐이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눈에 확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뭔가 복잡하고 얽혀있고 하나가 아닌 몇 가지가 순차적이든 동시적이든 하나의 덩어리로 주어진 문제의 경우는 언뜻 보기에도 간단치가 않다. 스스로 몰입되기도 하고 뭔가의 올가미에 걸려있는 듯하다면, 젊은 청춘은 그저 막연하고 암담하여 넋을 놓은 듯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문열은 이런 것을 소설로 정리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세월의 20대는 그저 막막했다. 먼 끝이 아득히 보이는 긴 신작로 한 쪽 끝에 서있는 듯한 기분.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도달할 수도 있으련만, 그저 멀다고만 느껴지는 순간들 뿐인 그때 그 젊은 날. 어처구니없어 초라하기만 하고 현실과 달라질 것 사이가 멀거나 길다고 할 수 있으니 그 두 모습은 분명 데칼코마니는 될 수 없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드러날 모습. 우리의 지난 날, 젊은 날은 무엇 때문에 힘들고 서글펐던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내가 그동안 바뀌었나 싶다.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 내 안에 숱한 자아가 있다더니 어느 순간 다른 녀석이 자리를 바꾸어 차지하고 나니 그리 드러나 버린 것인가?  아무튼 시간이 그 사이 그렇게나 흘렀으니, 그리고 무슨 일이 그간 있었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 같기도 한 정신머리이기는 하지만, 달라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겉모습이 늙어서 만은 아니고, 그때는 까칠하고 시크chic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까다롭거나 절제된 모습이 보여 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헛헛하고, 좋게 말하면 소탈하고 그저 말하면 쉽고 부담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웬지 허탈하고 아니 공허하고 그저 모든 것이 낯설고 손에 안 잡히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구로동 공단근처 어느 허름한 교회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친구들과 야학을 함께 하며 학교는 오는 둥 마는 둥 할 때였다. 70년대 후반이다. 어쩌다 오는 학교의, 임시로 지은 작은 가건물에는 책과 문구들을 팔고 있는 학교서점이 있었다. 그 서점은 캠퍼스 안의 유일한 작은 동산 입구근처에 있었다. 그리고 그 동산의 경계는 하수구로 연결되는 콘크리트로 된 도랑으로 구분되고 있었다. 서점을 나와 동산으로 진입하려는 데 거기 도랑에 새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쨌든 죽은 시체이긴 했으니 모른척하고 지나가고 싶었는데, 그때 난 그렇게 하지 않고 무언가로 그 새의 시체를 싸서 일단 동산 안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그 반대편 쪽 기슭에 작은 덩어리의 새의 시체를 묻어주었다. 오후쯤이었고, 사람들도 없어 그저 나만의 행동과 의식에 대해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혼자만의 행사, 즉 장례의식을 치른 것이다.


그것에 대한 이런 저런 의미는 갖다 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무언가를 마무리 했고, 무언가의 서글픔이나 떠나보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 느껴졌었는지, 뭐 그런 것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나고, 그 다음해에 군대를 갔다. 우울하고 신이 나지도 않았던 스무 살 중반을 향하는 그 당시는 나라사정이나 분위기도 어수선하고 깔끔하지가 않던 때였다. 그저 어서 보내버리고 싶었던 시절, 왜 그런 식으로 그때를 보냈는지는 모르겠는데, 나의 젊은 날은 그랬었다. 그리고 3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다시 학교로 돌아왔고, 그곳이 생각났으니 가보았던 것이다. 만 3년이 넘은, 거의 3년 반의 시간 후에 가본 것이었는데 얼핏 흔적이 있을 뿐, 딱 그곳의 일이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세월이 그리 가는 것이다. 어쨌든 지구가 돌며 해가 뜨고 지는 일이 반복되면 시간이 흐르듯이, 그러나 단지 그뿐 만은 아닌 것이다.


마음도 정신도 어느 틈에 조금은 달라지거나 새로운 무언가가 어느 자리이든 대체하거나 채우게 되는 것이다. 다행이라면 조금은 성숙해지고 스스로를 붙잡아 덜 흔들리게 하고 그러면서 너무 비워서 휑하지 않게 무엇이든 채워서 든든하게 할 상태로 달라져 가려한다는 것이다.  잃고 얻는 것, 얻고 잃는 것, 순서의 차이와 관계없이 결국 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유연하고 관대한 상태로서 그저 세상을 바라보며 존재와 현상을 확인하고 자 하는 지금, 그때의 것을, 그 시간적 거리를 확인하며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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