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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화석 Oct 04. 2024

20대의 기억을 더듬으며

내 삶의 안쪽_4. 박이문의 『파리의 작가들』

군대에 입대하면 곧 바로 훈련소에 입소하여 4주간 신병훈련을 받게 된다. 이 훈련을 마치고 훈련소를 퇴소하면서 근무할 병과가 결정되는데 그 분야가 다소 전문분야에 속하는 경우 추가 교육을 받아야 하고 이를 후반기 교육이라 한다. 모두가 다 받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교육이 없이 곧바로 근무하게 될 부대에 배치되었다. 나는 여러 번의 과정을 거치며 30개월 가까운 군 생활을 하게 될 부대에 배치되었는데, 그 모든 것이 결정될 때 마다 거치는 과정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논산의 훈련소에서 퇴소한 후 야간열차를 타고 이동하는데, 북쪽을 향하는 것에 왜 그랬는지 초조와 불안감을 느꼈다.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한 염려였을까? 당시 세상물정 모르는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보이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터였다. 아무리 여유를 찾고 부딪쳐 보자, 당당히 맞서자 하는 심정을 가진다 해도 그것과 실제의 본능적 반응은 다르지 않았겠는가? 낯설고 불안한 마음은 누구라도 쉽게 내려놓기는 어려운 기본적인 감정일 것이니, 그때의 나는 그런 상태로 용산역에 내려 다시 트럭을 타고 의정부의 보충대에 도착 하였고, 보충대에서 며칠을 머무른 후, 앞으로 소속하게 될 사단의 보충대, 그 후엔 사단에 속한 부대 중 최전방에 위치한 포병대대에 배치된 것을 확인하면서 마음은 하얗고 무언가 텅 빈 듯한 심정이 되어, 그야말로 흙먼지 날리며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들과 야산 사이로 나 있는 작은 길을 달리는 군용트럭을 타고 있었다. 누구는 그래도 깨끗한 버스가 와서 데려가거나, 또 트럭이라도 거칠고 다소 마구 다룬 듯한 것이 아닌, 즉 깨끗하며 얌전히(?) 물건이나 실어 나르는 듯한 트럭도 아닌, 나중에 보니 야전포를 끌고 다니는 대형 트럭을 타고 사람이 살지도 않는 민간인 통제지역을 통과하여 달리는 중에 내가 느낀 심정은 마치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로 향하는 듯한 비장한 심정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도착한 부대는 그야말로 깜짝 놀랄 정도로 수많은 군인들이 복닥대고 있었는데,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어서 그랬지만, 식당 안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대안의 여기저기에 흩어져서, 흙바닥이건, 언덕비탈의 한 켠이 건, 막사의 그늘 밑이건, 어디라도 자리를 차지하여 식사를 하고 있었고, 그 군인들의 군복은 흙을 온통 뒤집어 쓴 작업복 차림이었다. 마치 한참 전투를 벌이다가 겨우 식사라도 하는 군인들 같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대 안에 포 벙커bunker 공사가 마무리 단계였는데, 예정일에 맞춰 완공하기 위하여 사단장의 지시로 사단내의 예하 부대 군인들이 대거 지원 나와 있었던 것이었고, 그 수많은 군인들이 작은 대대에 와서 함께 생활하고 식사를 하게 되니 이처럼 식사할 자리조차 없이 되어 그랬던 것이었다. 쉽게 구경하고 경험할 수 없는 장면을 접하면서 나의 군대 생활은 이렇게 인상적으로 시작하게 된 셈이었다.      


실은 훈련소에서 훈련 중인 동안, 훈련을 마친 후 근무하게 될 부대들 중, 어느 정도는 편하고(?) 좋은 보직을 받게 될 부대에서 미리 자기들 병력을 선발해 가려고 심사를 하거나 인터뷰를 하였는데, 나도 당시에 대학생 신분이었기에 그랬는지, 몇 번의 그런 기회가 주어졌었다. 사람이 편하고 유리한 것을 찾고자 하는 심사는 어쩔 수 없는 가 보다. 평소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달리 그런 곳에 배치 받을 수 있기를 많이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 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물론 그 좋은 보직이라는 것이 국방부에서 근무한다는 통역병, 휴전선 공동경비구역에서 근무하는 한미연합사소속 군인, 군 사령부의 사령관 당번병 등등, 내가 원한 것이 아닌, 누군가가 나의 인적사항을 보고 임의로 선정하여 심사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기대에 차서 인터뷰에 응하였던 것에 스스로 부끄럽고 한편 나의 그런 심보에 실망하기도 하였었다. 그저 3년도 안 되는 시간을 누구와 다를 바 없이 견디고 버티며 생활하면 된다는, 또는 남자들이 거치는 당연한 과정이니 똑같이 지내면 된다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는지에, 그 비겁함에 좀 머쓱하기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지의 군 생활이 전개되려는 순간을 맞게 되었다. 나는 조금의 우여곡절 끝에 포병중대의 포수로 근무할 예정이었지만 대대의 본부상황실에서 근무하기로 변경이 되었다. 그리고 부대는 전방 골짜기에, 전방이라 할 남방한계선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최전방 포병대대였으나 주위환경은 야산과 너른 평야, 한탄강이 흐르는 평화롭고 조용한 곳이었다. 북한을 맞서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군대생활 자체에서 오는 묘한 긴장감과 어색함, 그리고 부자유한 통제와 규율 등에 의한 구속에의, 또한 그것을 견뎌야 하는 인내심에 따라 나를 옥쥐는 생활환경에의 두려움은 크나 큰 부담이었다. 


나는 근무할 부서에 배치되었고, 그리고 사단의 직속 행정부대에서도 지원 나온 마당에 당연히 우리도 벙커공사 현장에서 지원이 아닌 우리 부대의 작업에 직접 투입될 수밖에 없었으니, 신병은 당연히 빠질 수 없는 상태였다. 155미리 포병부대의 포 벙커이니 벙커의 크기가 웬만한 건물 크기만 했다. 건물 공사판의 작업인 셈인데, 젊은 군인이라 해도 그런 작업의 경험이 없으니 서투르고 헤맬 수밖에 없었으나 적응을 하려 해보니 곧 군인들 틈에 끼어 작업을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입대한 지 불과 한 달여에 불과한 시점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한 달여 만에 사회의 대학생 신분에서 전투가 아닌 포 벙커 공사판에서 질통을 매고, 또는 시멘트 포대 2개씩 어깨에 지고 나르는 일을 하는 군인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론 이 일은 앞으로 한 두 달 이내면 끝을 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다소 힘이 들어도 버티고 참으면 지나갈 일이었다. 


그러나 군대 밖에서는 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서울 뿐 아닌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투쟁이라는 데모가 벌어지고 있었다. 5월 초.중순이었으니, 나는 세상의 일들은 모르는 채, 군인으로 부대 안의 포 벙커 공사를 하는 작업을 하며 보내고 있었지만 세상에서는 온통 혼란과 갈등, 그 이상의 폭력적 사태가 마치 전쟁처럼 벌어지고 있었다. 군대 밖에서는 그때, 전쟁이 일어난 듯 대 혼란 상태였고, 얼마 후엔 5.18 사태가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어쩌다 보게 되는 TV뉴스에서는 군인들과 대학생 시민들이 대치하여 싸우는 장면들, 심지어는 전쟁을 벌이는 장면들이 수시로 나오고 있었다. 학교의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분명 무슨 일들이 있을 것이고, 내가 다닌 학교에 관한 소식은 들을 수도 없었지만, 염려되고 궁금하였지만, 그뿐이었다.        


그럴 때쯤이었다. 부대에 배치를 받고, 곧 바로 공사판에 투입되어 주.야간 구분 없이 작업을 하면서, 힘들고 괴로워도 그것을 말하고 의지할 사람조차 없이 눈치만 보며 군 생활에 적응해 가던 때, 부대에 온지 2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을 그 무렵에 나의 부모님께서 면회를 오신 것이다.       

부대배치 받고 며칠 뒤, 안부편지를 보냈을 뿐이고 편지는 도착되었을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차였는데, 그 주말께 두 분께서 내가 있는 그 골짜기 부대를 찾아오신 것이었다. 너무나 신기할 정도였다. 주소라고 해봐야 군대용 우편번호와 부대이름과 소속 포대밖에는 안 적혀있는, 그 주소를 보고 찾아오신 것에 반가움에 앞서서 놀라웠다. 여기 저기 주변에 물어봤다고는 하지만, 누구든 주소만 보고는 부대위치를 쉽게 알 수가 없을 텐데, 찾아오신 것이다. 나는 이것에 더욱 감동하였다. 


물론 스물 몇 살의 군인이니 다 큰 성인이라 할 수 있다고 해도 부모님에게는 어린 자식이라 여기셨을 테니, 그간 얼마나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으면 그리 빨리 면회 올 생각을 하신 걸까. 적응이 덜 된, 이제 막 전입을 해온 어리숙한 신병이 면회 나가는 것도 어색하고 주삣거릴 일이니, 그 절차도 잘 모르는 상태였으나, 어찌 하여 외출 외박을 나가게 되었다. 민통선 밖에 있는 면회소는 내가 있는 부대에서 4 km를 걸어 나와야 하고, 외출 외박을 할 수 있는 문혜리라는 곳은 거기서 4 킬로를 다시 나와야 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기는 해도 두 달 가까이 군대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니 나름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속박과 자유의 차이인가? 그 홀가분함과 풀어지는 기분의 소중함이 슬쩍 느껴졌다. 군인이 된 자식에게 먹이기 위해 준비한 음식들을 먹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 하루 밤을 묵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자세하진 않다.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가 오전에 가셨는지, 점심식사를 함께 하고 오후에 가셨는지 등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뒤론 두 분께서 면회는 다시 오시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처음의 그 면회에 대한 기억은 내게는 일생 동안 아주 특별하였다. 


그리고 두 분과 헤어지고 귀대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문혜리를 잠시 둘러보다가 서점이 있기에 들어가 책 구경을 한 뒤, 내게 주신 얼마의 용돈으로 두 권의 책을 샀었다. 그 때 고른 두 권의 책 중에 박이문 교수가 쓴 "파리의 작가들" 이라는 책은 분명히 기억이 난다. 그러나 또 한권은 김붕구 교수의 "서울과 파리의 마로니에" 라는 책으로 알고 있었으나, 최근에 당시 구입한 날의 메모를 보니 날짜가 맞지 않는다. 내 기억이 틀린 듯하다.(그러면 그 다른 한권은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같은 해인 1980년은 맞는데, 몇 달 뒤인 것을 보니 부모님이 아닌 숙부님 두 분께서 면회를 다녀가셨는데, 아무래도 그 때 구입한 듯 하였다. 


아무튼 강원도 철원이라는 시골(?)서점에 에세이집일 망정 이런 책이 판매 서가에 꽂혀있다는 것이 놀랍고 반가웠다. 나는 그때 ‘박이문 교수’를 잘 몰랐다. 그저 책을 뒤지다가 비교적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불문학 관련 문학 에세이 이니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서문의 글에 그 박교수가 20대에 교수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도중에 한 두 해를 프랑스에 다녀오면서 프랑스에서의 느낀 자신의 관심 주제를 비평적으로 쓴 것이었는데, 그 분의 관심 대상은 자신의 허무의식에 대한 대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에 관한 주제의식을 쓴 것으로 여기게 하였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책들은 여전히 지금도 내 서가에 꽂혀있으니, 최근에 생각이 나서 박이문의 “파리의 작가들”을 꺼내 여기저기를 들춰 보았다. 낡고 바랜 종이의 책에서 오래된 세월의 냄새가 났다. 여러 번 읽은 것도 아닌데, 책 표지는 시간 탓으로 헤지고 뜯긴 곳이 있고, 속 종이는 삭은 듯이 보이게 약해져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여전히 젊은 시절의 느낌이 있었다. 요즘 누가 옛날 문학을 하겠다고, 인생의 뜻을 알기 위해 방황하고, 흔들리는 자신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안정적인 교수직을 내 던지고 다시 유학을 가는 사람이 있을 까 싶다. 이미 20대부터 이화여대 교수였던 박이문은 5년 동안이나 봉직했던 학교에 사표를 던지고 다시 프랑스로 가려는 중에 과거에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썼던 글들을 모아 출판을 준비하였으나,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출판한 책이었다. 그러나 책에 실린 글은 박이문 교수가 유학을 하던 20대 때 썼던 글들이니, 20대의 젊은 학생이자 교수가 쓴 풋풋하지만 진지한 사색과 성찰이 담긴 글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글에는 문학에 의지하면서도 삶의 방향과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해 번민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성찰의 여정이 담겨있다. 그리고 놀랄 정도로 자신을 잘 이끌고 철저하게 자기관리하며 분명한 인생의 방향을 향해 나아갔을 것 같은 저자가 허무의식이라든가 자기정체성이라든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는 지에 매달리는 순수하고 진지한 청년의 모습이 잘 담겨있는 듯 하였다. 


그러고 보니 나를 포함하여 많은 젊은이들에게 불가피한 것인지 젊은 날에 어느 정도의 갈등과 번뇌를 겪으며, 인생이나 삶의 허무를 느끼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이처럼 특정한 것이 아닌 대체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물론 박이문 교수 개인의 삶과 그의 독특한 환경이나 개인의 성향 탓 등에 따른 것이니 일반적인 것은 아닐지나, 이렇게 마치 과거 20대의 내가 흔들리며 방황하던 상황을 나보다야 훨씬 선배인 저자가 앞서서 겪었던, 물론 개인적이거나 상황적으로, 또 질적으로 다르다 하여도 그런 갈등과 허무의식에 빠져 있는 것이나 그를 벗어나고자 애를 쓴 모습들에서는 공감하는 바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에게서 확인하는 솔직하고 진지한 고민과 성찰은 지금에서도 신선하고 절실하게 와 닿고 있다. 이는 한편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만일 나의 생애의 시간이 잠시라도 멈춰 서 있었던 것이거나, 나의 현재가 다시 ‘백 투 더 퓨쳐 (back to the future)’를 위해 과거로 돌아가 나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거나, 다소 비현실적이지만 유연성있는 태도로 생각에 잠겨 볼 수는 있게 한다. 이미 사십여 년의 세월이 쌓였거나 지나가 버린 세월의 마법에 걸린 것들이지만 추억과 기억은 이미 묵은 세월의 옷을 입은 것이니 어쩌는가? 한편 자연스런 반응일 수도 있으니 잠시 시간 여행을 하듯 그때와 이때를 넘나들어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은가 싶다.  따라서 이미 생애의 관록이 쌓여 있다고 여기며 다소 여유 있게 시간의 넓이를 펼쳐보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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