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안쪽_2.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나는 22세 되던 해 봄에 군대에 입대하였다. 입대를 하루 앞둔 날까지, 나는 그동안 학교에서 해왔던 활동이 있었는데, 군대에 입대한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 역할을 지속하고 있었다. 8ㅇ년 봄이었다. 다소 비장하지만 한편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대학의 봄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밝히지 않고 내게 주어진 일을 해결하며 앞으로의 일정을 관리하는 중이었다. 나름 의미있는 역할은 그 해의 신입생환영회를 주요 대학교수님들을 모시고 강연을 듣는 방식으로 바꾸기로 하고, 서울대 H교수님과 경희대 K교수님을 만나 섭외하고 그 분들을 모셔와 강연을 하시도록 하였거나, 내가 속한 기획 분과에서의 임무에 적절한 일들을 추진하고 있으면서 어느 정도는 맡은 몫을 대략 해결해 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날이 되어 이를 알리고 그들로부터 헤어지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임시로 운영되던 조직이고 활동이었으며 나는 깊이 그 조직이나 활동에 관여한 것도 아니니 이런 식으로 나의 젊은 대학시절도 한 단락을 짓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어쨌든 난 그 활동조직의 책임자인 위원장 선배와 몇몇 지인들에게 입대 사실을 알렸고, 계획했던 대로 간단히 인사나 나누고 집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생각은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학교 주변에 각각 흩어져 있었을 여러 선후배들이 갑작스런 나의 입대소식에 환송회를 하겠다고 모여 들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 시대도 아니고 1980년 봄의 우리나라는 유선전화조차 제대로 보급이 안 되어 있던 시절이었는데, 어디에 있다가 어떻게 연락을 받고 나타난 것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저 슬쩍(?) 다녀오려는 듯, 소식조차 전하지 않고 떠날까하다가 입대 전 날에야 군대를 간다고 말한 것이었는데, 일이 커져버렸다. 집에는 비교적 친한 친구들이 나를 위해 온다고 했기에 학교는 잠시 다녀오면 되니까 그들이 집으로 온다면 만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예상치도 못하게 벌어진 일에 대해, 그들을 거절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술판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친구들은 밤이 되서야 올 테니 끝나는 대로 집으로 갈 수 있기를 은연중에 기대하면서도 마음은 흔들리며 그 혼란스런 술자리에 빠져들었다. 그때 학교에서 나의 입대를 환송하려는, 그리고 나와 가깝고 멀고 상관없이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러니까, 30~40명쯤은 되는 숫자의 사람들이 모여 한바탕 술잔치가 벌어졌다.
젊은 시절이니 치기가 높았다 해도 나의 주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량의 술을 마시고 나니 취한 정도는 말 할 것도 없고 집으로 가는 버스는 진즉에 끊긴 상태로 시간은 이미 꽤 흘렀으며 당시에 그 먼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갈 엄두도 못내는 상태에서 결국 학교 앞 하숙집에서 외박 아닌 외박을 하게 되었다. 내일 당장 새벽부터 일어나 논산 훈련소로 가기 위해 모이는 집결지까지 가는 것도 걱정이었지만 누추한 집에 와서 애써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에 대해서 무어라 할 말을 찾을 수조차 없이 미안하였다. 그 당시 전화는 매우 귀한 존재였기에 돈이 있어도 쉽사리 설치할 수 없는 나라 환경에서 우리 집은 전화가 없는 집이었고, 따라서 연락할 방법조차 없었으니, 집에 모인 친구들은 어떤 심정으로 그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또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의 걱정은 어떠하였을까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송구하기 짝이 없었다. 새벽 첫차를 타고 부랴부랴 집으로 갔더니 새벽까지 주인공 없는 집에서 괜한 술이나 마시고 있던 친구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튼 대책 없이 벌어진 말 같지 않은 사건이었고 나는 그렇게 요란(?)하게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날 나의 환송회에 왔던 친구와 선배들 중에는 내가 이름은 알고 친분은 별로 없었던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영문과에 다니며 문학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으로 듣고 있던 같은 학번의 친구가 왔다. 그동안 만난 적은 없었지만 나도 관심이 있었던 터라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또 그와 동행한 선배인 나의 지인도 내가 시를 쓴다는 것을 뒤 늦게 알았는지 꽤 반가워했던 것이 기억난다. 그 같은 학번의 친구 H는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나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나 역시 그것을 매우 반갑게 생각하였다. 그는 중간에 헤어질 무렵 내게 종이쪽지의 메모를 한 장 전해주었는데, 그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의 시 마지막 구절이 적혀 있었다.
Le vent se l’eve, il faut tenter de vivre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내가 불문학을 전공하니 그리고 시를 쓴다고 하니, 아마도 그런 관련성을 고려하며 이 시구를 떠올렸을 것이다. 나의 입대에 맞춰진 적절하고 의미있는 메시지를 나름 선택하여 전해준 것이다. 어쩌면 만나자 이별이 될 수도 있는 인사를 한 셈이다. 그의 이 메시지는 비록 시의 한 구절이지만, 20대 초반의 젊은 감성은 자기 식으로 의미를 생산하고 또한 1980년 봄의 대학 분위기는 나름대로 비장하였으니 허튼 감정을 남발하는(?) 시적 메시지와 다르게 어느 정도의 상징성을 담고 있기도 하였을 것이다.
나는 이 쪽지를 꽤 오래 간직 하였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깊이 있는 성찰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꽤 오랫동안
바람의 의미를 새겨 보기도 하였다. 당시 김수영의 시 “풀”에서의 바람의 의미도 있었고, 지금은 그렇게 이해하지 않지만, 바람을 그저 감각적인 뜻으로 무력이나 압제로 받아들이는 치기어린 의미해석과는 다르게 보고자 하였다. 즉 다른 뉘앙스nuance의 의미와 비유를 또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인간의 생명인식이나 진리를 터득한 현자賢者의 의미를 빗대어 이의 메시지를 비교적 가벼운 수준이나마 연상해 보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한동안 우리는 바람을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그 어떤 힘을 대신하는 것으로, 그래서 바람과 그에 맞서는 대립 구조와 관련하여 연관시키기도 하였는데, 그런 식으로 바람을 연상한다면 시적 비유의 묘미가 다소는 부족한, 현실 언어적 표현으로 국한되기 쉬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저 언어를 빌렸을 뿐 참여적 관점으로 사용됨으로써 시의 깊이를 포기한 채 메시지나 선동의 언어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당연히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의 경우도 나름의 성찰의 깊이가 담겨 있으며 생명과 삶의 복잡함을 자연과 우주의 기운을 빌어 표현한 것이지 싶다.
나는 그때 그 많은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결국 그 시절과 그 사회로부터 이별을 고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의 환송으로 나의 젊은 날은 지나갔고, 나는 그 날들을 담아두었던 장소로부터 떠났다. 물론 불과 3년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 올 곳이지만, 그때 그 시절은 나로부터 영원히 멀어졌고, 그 자리를 채웠던 그 사람들, 알고 있었던 사람들, 잘 모르고 있던 사람들, 한때는 뜻이 같아 같은 방향으로 힘을 모으려고 했던 사람들과 뜻까지 모두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걱정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고 자리를 비워서 그들을 불쾌하게 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인생의 다양한 일들을, 때로는 영광스럽고 기쁘기도 하지만, 다르게는 어설프고 과오가 넘치는 일들을 벌리면서 이렇게 나의 시간을, 나의 생애 안의 내용을 채우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지금의 나는 어떤 내용물을 채우고 있으며, 그래서 지금 이 모습이 되어 살아 왔는가 하는 생각에 복잡한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내가 토로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알 수 없을 그런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굳이 끄집어내었다. 나의 어린 감성과 지난날의 서투름에 가끔은 인정이 안 될 때가 있다. 지금이라면 어떤 생각과 판단을 할까 비교해 보기도 한다. 지나간 일이고 어린 시절의 일이니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닐 터, 이 부끄러움을 내가 기억할수록 앞으로 나는 조금은 더 진중하고 무게감 있는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시간이 많지 않으니 어떨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그런 상황이 선택적인 문제였는데, 추억으로 남기기엔 아쉬움도 있고 지난 젊음의 시간동안 미숙하고 미완으로 끝났던 그 모든 것들에 용서와 미안함을 다시 쌓아두고자 한다면 조금은 상쇄가 될 수는 있을 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