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엿보기6.

르네 클레망 감독의 「금지된 장난」

by 강화석

“동심(童心)으로 빗대 본 전쟁의 비극”


1952년에 개봉된 금지된 장난(Jeux Interits)」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이다. 그러나 영화의 주 내용은 어린 소년 소녀의 숨김없는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오히려 드러내놓고 다루지 않은 전쟁의 속살에 대한 슬픔과 분노를 자극하는 고도의 절제미를 표현해 낸 ‘반전(反戰)영화’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영화는 굳이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진다. 다만 인간의 야만성과 탐욕으로 인해 발생하는 전쟁의 민낯을 전쟁의 참여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의 세상살이와 사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여 주면서, 또한 아이들의 천진하고 순수한 동심의 에피소드(?)를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애잔하고 덤덤하게 보여주면서 전쟁의 참혹함과 역기능을 부각 하고 있는, 꽤나 수준 높은 구도와 문법을 가진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나르시소 예피스”가 연주하는 “로망스(Romance)”의 아련한 선율이 영화 전편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한 몫을 하고 있으며, 그해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대상)을 수상하였다.

금지된 장난(포스터)수정.png 금지된 장난, 영화포스터

나(필자)는 이 영화를 꽤 오래 전에 보았다. 1970년대 후반, 스무살 무렵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이 흑백영화가 풍기는 무채색의 우울하거나 또는 담백한 분위기와도 같은 처지에서 지내고 있었다. 밝고 활기에 넘칠 청춘의 시기였음에도 개인과 사회 환경 전반에서 도무지 흥이 나지 않던 때였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지만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운영하던 프랑스 문화원이 사간동의 경복궁 돌담 건너편 큰길가에 있을 때 그 3층짜리 문화원의 지하에 있는 작은 영화관에서 보았다. 그때의 감정이나 분위기를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거나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감정은 영화의 분위기나 내용만큼 흔쾌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울하여 마음만 더 쓸쓸해했던 기억은 난다.

전쟁은 인간의 피치 못할 만행임이 분명하다. 지금도 우리는 전쟁과 함께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70년째 휴전상태에 있고, 현재 유럽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전쟁은 3년째 지속하는 중이며, 중동의 국가들 역시 그들의 야만성과 잔인함을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며 싸움에 열중하는 중이다. 그런데 전쟁을 일으킨 의사결정 당사자들은 때론 만면에 미소를 지우며 태연하고 여유있게 일상적인 제 일을 하듯이 전쟁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인데, 전쟁에 참가하는 군인들의 참혹한 죽음이나 부상, 그리고 전쟁과 상관이 없을 아녀자나 노인 등 민간인들의 심각한 피해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을 회피하면서 “전쟁놀이(Jeux de guerre)”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인다. 일반 대중들 역시 영화와 같은 미디어를 통해 생산된 전쟁을 다룬 예술작품이나 기록물에 지금까지 수도 없이 노출된 탓인가, 그저 일상의 한 콘텐츠처럼 여기며 즐기는(?) 중인 듯 무덤덤할 뿐이다. 또 누군가는 인류의 보다 안정적인 생존과 환경의 유지를 위해 전쟁 불가피성을 거론하면서 전쟁에의 당위성을 논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우리는 매우 냉철하고 잔인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금지된 장난”이라는 영화는 인간이 일으키는 전쟁의 부조리한 속성이나 참상을 에둘러 노출시키면서 그에 대한 비난적인 경각심과 함께 인간세상의 비극적 단면을 전쟁 상황과 연결하여 바라다본 감성적 서사의 일부로 받아들일 만 하다고 할 것이다.

“금지된 장난”은 프랑스의 르네 클레망(Rene Clement)감독의 입봉 초기작에 속한다. 그가 감독한 작품들, “목로주점(1956)”, “태양은 가득히(1960)”,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1966)”, “파리는 안개에 젖어(1971)” 등 여러 편의 수작(秀作)들 중에서도 특히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그가 견지하고 있는 영화문법으로 세상에 던지고자 하는 주제의식을 치밀한 구성과 전개에 있어 절제력을 잃지 않고 펼쳤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클레망(Clement) 감독은 극영화를 연출하기 전에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경력덕분인지 이 영화에는 다큐멘터리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다. 도무지 들뜨지 않고 과장이 없으며 감정 콘트롤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도 본질에 가까운 영화의 메시지를 매우 심층적으로 구성하여 전달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의 메시지는 고도의 구조적 얼개를 짜놓고 마지막까지 그 템포(tempo)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유지해 가는 끈기와 뚝심을 보여주고 있다.

대체적인 영화의 줄거리를 정리해 보면, 때는 1940년 6월이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勃發)하고 1년쯤의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며, 프랑스 국민들의 일부가 독일의 침공으로 피난길에 나선 상황이다. 민간인 피난행렬에 독일의 공군기는 기총사격을 가한다. 피난민 행렬에는 꼬마 여주인공 5살짜리 “폴레트(브리지트 포시)”와 그녀의 가족이 섞여 있었는데, 적의 공습으로 길가에 숨어 있는 중에 폴레트가 안고 있던 강아지가 품에서 벗어나 길 한복판으로 달아나자 이를 폴레트가 잡기 위해 뛰쳐나가고, 위험한 상황을 감지한 부모들이 함께 폴레트를 잡기위해 쫒아 나가게 되었을 때, 독일공군기의 사격으로 부모와 강아지가 죽게 되고, 폴레트만이 혼자 살아남게 된다. 이렇게 영화의 앞부분에서 잠깐 동안 전쟁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 보여 진 뒤로는 전쟁에 대한 직접적인 장면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어린 소녀에게 순식간에 일어난 참화는 기가 막히게도 어떤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는 폴레트의 반응을 통해 간접적으로 비쳐지도록 전개가 된다. 부모가 강아지를 살리려 한 폴레트를 구하기 위해 위험의 한 복판에 뛰어 들었다가 대신 죽고 난 후 그녀는 천애(天涯)의 고아가 되었지만, 그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체 지나가던 농부부부에게 건사되지만, 죽은 강아지를 찾으려는 폴레트는 다시 그들로부터 헤어지게 되고, 곧 이어 어린 남주인공 “미셸(조르주 푸즐리)”의 눈에 띄게 되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게 될 운명이 된다. 이런 상황 전개에 따라 폴레트에게 호감을 가진 11살짜리 미셸은 강아지가 죽어 슬퍼하는 폴레트를 위해 강아지를 묻어주기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십자가가 필요하게 되고, 강아지가 외롭지 않게 강아지 무덤 주변에 또 다른 동물들, 곤충들의 무덤을 추가로 만들면서 동물들의 공동묘지가 생기게 된다. 또한 그 무덤의 숫자만큼이나 십자가가 필요하므로 그 소년과 소녀는 닥치는 대로 주변의 십자가들을 훔쳐오기 시작하고, 결국 멀쩡한 십자가를 도둑맞은 동네에서는 소동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일상적이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어른들이 벌이는 전쟁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동심(童心)으로 진지하고 이유있는 장난(Jeux)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장난(Jeux)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우여곡절들이 발생하는 중에 결국은 십자가가 사라지는 소동의 주인공들이 밝혀지게 되고, 이어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폴레트는 고아원에 가게 되었으므로 미셸과 헤어져야만 할 처지가 된다. 그러나 폴레트와 헤어지기 싫었던 미셸은 어떻게 든 폴레트를 놓지 않으려고 애써보지만 소용없게 되고 말자, 미셸은 슬픔에 못 이겨 그간 훔쳐온 동물들의 무덤 앞에 세워두었던 십자가들을 모두 냇가에 던져버리고 만다. 그가 막을 수 없는 폴레트와의 이별에 대한 절망감을 표현하는 방식인 셈이다. 이는 또한 전쟁 중인 비일상적인 삶에서의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끝이 난다는 의미였으며, 그들이 스스로 중단한 것이 아닌 타인들(어른들)이나 전쟁이라는 외부 힘으로부터의 금지된 놀이(장난) 임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은 전쟁 때문에 피난길에 올랐고,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불행한 상황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미셸과 폴레트는 잠시라도 그들만의 동심의 세계에서 즐겁고 행복한 한때를 보낼 수 있었지만, 결국 전쟁의 상처는 그 둘을 다시 갈라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금지된 장난’은 그 두 사람의 장난을 금지시킨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아가 모든 것을 갈라놓고 사라지게 하고 슬프게 하면서, 잠시의 순수한 사랑이나 행복조차도 금지시켜 놓게 된 것이라는 생각으로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즉 십자가를 훔치는 장난을 금지시킨 것과 더불어 그들의 동심이 만들어 놓았던 천진한 놀이, 사랑, 즐거움, 행복 등을 금지시키게 되는 것인데 이 모든 원인은 곧, 전쟁에 의한 참혹한 영향이었다는 것을 클레망 감독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셸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결국 폴레트는 고아보호센터로 떠나게 된다. 미셸보다 더 철이 없는 어린 폴레트 역시 미셸과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미셸을 부르며 찾아보지만, 곧 엄마와 닮은 누군가를 보자 엄마를 부르며 따라가게 되는데, 원천적인 관계로서의 엄마에 대해 자각한 폴레트가 엄마의 존재를 느끼게 되지만, 그녀에게 이미 일어난 엄마의 부재를 앞으로 깨닫게 되리라는 것을 제3자인 관찰자들이 확인하게 되면서 어린 폴레트의 운명을 슬퍼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어린 폴레트가 미셸을 찾다가 엄마를 찾아 어딘가로 이끌려가는 뒷모습과 함께 “maman(엄마)”, “maman(엄마)” 하는 소리가 같이 사라지는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나게 하는 가슴 쓰린 결말이다.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이 라스트 씬(last scene)을 떠올릴수록 전쟁의 잔인한 후유증이 가슴에 파고들게 된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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