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계절에 읽는,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
지하철을 탈 때 마다 자주 이용하는 역의 플랫폼 안전문에 게시한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을 자연스럽게 읽곤 한다. 아주 오랫동안 보고 읽었으니 그 친숙함이야 말 할 수 없다. 윤동주시인의 시들이 특유의 순수함과 질박한 성찰이 숨김없이 전달되니 감동적이지 않은 시들이 없지만, 특히 이 시는 잘 알려진 시는 아닐지언정 간결한 시임에도 생각하는 바가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1938.5.10.작시 「새로운 길」 전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윤동주는 28세 때인 1945년 2월 16일, 조국의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만주(북간도) 용정에서 1917년 태어나 광명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1941년 졸업한 후 일본 동지사대학교에 유학하여 영문과에 재학하던 중인 1943년 독립운동 사상범으로 체포되었는데, 1944년 3월 징역2년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에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새로운 길」은 1938년 5월 10일에 쓴 시로 알려져 있으니, 고향 북간도 용정을 떠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고 한 달 후에 쓴 시이다. 그 당시에는 발표되지 못하였다가 1948년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될 때 이 시가 포함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청년 윤동주는 조국의 해방을 누구보다 바라면서 타국의 지배를 받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처절하리만큼 참회하며 스스로 다그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애국청년이었다. 평소 조용하고 차분하며 내성적인 성격의 윤동주는 내면에서는 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으며 하시라도 이를 잊지 않고자 하였다. 그러하니 그의 시편(詩篇)들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거나, 나라 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상징적으로 담아 표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를 통하여 학생으로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해도 독립투사의 면모를 내면에 간직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새로운 길」 역시 그의 이런 정신이 많이 담겨있다. 일상적으로 다니던 고향마을의 어느 길을 걷는 자신의 모습이나 생활을 떠올리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날 수 없다는 자기 성찰적 인식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익숙한 고향마을로 가는 길을 이제는 옛날(어제) 자유롭고 평화로웠던 그때처럼, 오늘(지금)도, 내일(미래)에도, 예전처럼 그래서 ‘새로운 길’을 걷겠다는 염원과 각오를 담고 있는 시이다.
윤동주는 지금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와 있게 되니, 자주 마음속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고향 가는 길을 떠올린다. 서울로 유학 오기 전까지는 떠난 적이 없었던 고향을 먼 거리에 두고 지내야 하는 자신의 현 처지와 맞물리면서 일어나는 감정의 동요는 이렇게 나라 잃은 슬픔까지 이입되면서 감정의 깊은 골로 이끌고 가는 것이다.
윤동주가 걸었던 이 “길”은 고향마을로 가기위해 걸어 다니던 통행길이며, 학교를 가거나 읍내를 가거나 하려면 지나야 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일을 마치고, 학교공부를 마치고, 다시 편안한 곳, 부모형제와 가족이 모여 사는 마을로 가려면 시내를 건너야 하고, 숲이 나타나니 숲길을 지나야 한다. 숲은 한편으론 아름다웠고, 마음을 차분하고 평화롭게 해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이 숲길을 벗어나면 다시 언덕이 나타나고 그 언덕을 넘어야 하는데 다소 힘이 들지라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머지않아 마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런 길을 지나노라면 민들레가 피어있거나 까치가 날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간혹 어여쁜 아가씨도 지나간다. 청년 윤동주에게 젊은 아가씨는 가슴을 뛰게 하는 이성으로서, 마주하거나 스쳐 지나가는 순간일지라도 마음을 들뜨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즐거운 순간도 맞닥뜨릴 수 있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길이다. 이렇게 마음에 동요가 일 때면, 요행히 시원한 바람도 불어온다. 그래서 다시 진정하며 가던 길을 가게 된다. 이처럼 자연의 숨결이 언제라도 느껴지던 “나의 고향마을 길”, 또는 우리나라 산천 어디에라도 있을 그 길, 잠시 상상만 해도 평화롭게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산과 들, 마을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길을 일제의 지배를 받으며 자유롭지 못하게 지나 다녀야 하는 비통함이 있다. 이러한 정서를 윤동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정경을 그리면서 서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길”은 윤동주에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 즉 인생의 “길”이며, 나라의 “길”이다. 또한 개인 윤동주의 “길”이며, 이 나라 백성 모두의 “길”이다. 이런 “길”의 함축적 의미는 곧 시에서 표현된 “길”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전달되고 이해되기를 윤동주는 바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길」에서 “길”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땅에서의 일상적인 삶을 담고 있던 때의 “길”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 때의 그 “길”을 바라고 염원하는 것으로, “새로운 길”은 예전 그때와 같은 평화롭고 자유로운 나라의 그 “길”을 의미하므로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를 회복한 나라에서의 그 “길”인 것이다.
지금 윤동주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있는 중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머리 속에 떠올리면서 그 길은 결코 현재 상황에서의 길이 아닌, 현재와는 다른 ‘새로운 길’이어야 한다는 깊은 바람을 담고, 처절한 염원을 담아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잠시 윤동주는 기쁨에 잠긴다. 꿈을 꾸는 것이다. 그 새로운 길에는 민들레가 피어있는데, 실은 민들레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든 흔하게 피어 있으니 쉽게 찾아 볼 수가 있으며, 까치 또한 우리에겐 너무도 친숙한, 그러면서 까치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는 길조(吉鳥)로 알려져 있으니, 민들레와 까치는 상징적이랄 것도 없이 우리와 매우 가까운 자연의 친구와도 같다. 또한 젊은 남성에게 아가씨는 어느 때라도 가슴 뛰게 하는 좋은 상대가 아닌가? 이를 만나면 얼굴이 상기될 만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이렇게 가슴이 뛰고 즐거운 상황을 젊은 윤동주는 마음으로 그리워하며 상상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러고 나면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달고 시원함 그 자체일 것이니, 윤동주가 선택한 민들레, 까치, 아가씨, 바람은 우리의 대표적 상징이요, 생명의 단초요, 에너지의 원천이며 아름다운 조합의 완성체로서 조직화(組織化) 되는 것이다.
스무 살이 갓 넘은 윤동주는 이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바라며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에 걷게 될 고향 길은 익숙한 그 “길”이면서 지금과 같은 “길”이 아닌 독립된 나라에서의 “새로운 길”이어야 한다는 깊은 염원을 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를 쓸 당시인 1938년은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고 있었고 얼마 후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촉발할 태평양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때임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도 극에 달하고 있었던 듯, 쉽사리 발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노트에 그대로 간직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 선하고 아름다운 시를 완성한, 심지 깊으며, 겨레와 나라를 아끼고 사랑한 청년 윤동주는 결국, 이 시를 발표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전술한 대로 그의 사후에 유고시집으로 발간된 시집에 포함되어 알려졌을 뿐이다.
너무나 평온하고 서정적이어서 선뜻 그런 깊은 염원을 담았을까? 싶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게 하는, 서정시로는 고도의 함의와 중의적 메타포(metaphor)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마음으로부터의 절제를 유지하면서 강렬한 내적 열정을 담아낼 수 있었던 강한 의지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어려울 수 있는 조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윤동주의 성숙미를, 감정을 허투루 쓰지 않는 극강(極强)의 인성과 냉철한 의지를 조합한 시인의 곧고 단단한 성품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듯하다.
윤동주가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된 올해, 애도하는 마음만으로는 분명 대신하거나 되갚을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서러움과 서글픔을 느껴보려는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당시를 떠올리면 느끼게 될 답답함을 풀어줄, 조금의 카타르시스를 스스로 느껴볼 수 있지 않을 까하여, 누구라도 마음으로 오열하게 할 이 시 「새로운 길」을 오늘 다시 읽는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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