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엿보기10.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by 강화석

국화꽃의 계절, 가을에 어울리는 시,


가을만큼 계절에 반응하는 때도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4계절은 계절마다 뚜렷한 개성과 특색이 있으니 반응의 정도 차이를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런 생각을 자의적으로 하게 되는 것은 가을이 가진 분위기가 정서적으로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 오면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국화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이와 같은 꽃”이라고 표현하니 평소에 갖고 있는 내면의 정서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왠지 그 조합에 거부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따라서 이유를 무어라 들기도 어렵게 가을을 상징하는 국화를 떠올리면서 자연스럽게 이 시는 가을을 연상하는 대표성을 갖게 되어 있는 것 같다.

미당 서정주는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라 할 수 있다. 미당은 민족의 정서, 정신세계에의 갈망, 불교적 사유의 심취 등 그의 생애를 거치면서 천착한 정신적 고뇌와 수련(修練)의 테마 들을 상징하며 서사화 하였는데, 미당이 쓴 수많은 시(詩)중에서 “국화 옆에서”는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1947년에 “경향신문”에 발표한 시이다.


우리에게 국화는 친근하고 익숙한 꽃에 해당한다. 집의 꽃밭에서 주로 키우는 꽃이기도 하고, 들국화가 그리고 유사한 모양의 구절초가 산야에 지천(至賤)으로 피기도 하니, 가을이면 국화나 들국화 그리고 비슷한 구절초가 어디서든 눈에 띄어 익숙하고 친근한 꽃이 되어있다. 그리고 예부터 4군자(四君子)의 하나로서, 국화는 “서릿발에서도 굴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므로, 마음속에 곧은 절개를 가진 선비의 표상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또한 국화의 꽃말이 대표적으로는 “진실” 또는 “진심”이라 하는데, 이는 우리의 어머니나 누이들의 마음에 영향을 주었을 법하다. 그러하므로 국화는 우리 정서를 대신하는 꽃임이 분명하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전엔 가을이면 도처에서 국화전시회가 열리곤 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열리는 곳이 있을 것이다. 평소에 볼 수 있었던 흔한(?) 종류의 국화가 아닌 특이하고 희귀한 모양의 국화들이, 그 종류 또한 많았던 것에 놀라워하며 국화의 미모와 향기에 취하곤 했었지만, 그저 그 이상의 감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 국화를 바라다보며 평화롭기도 하고 차분해 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우아하고 귀한 생명”으로의 미적 상징을 확인해보는 정서적 반응을 경험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늘어나고 꽃을 다루는 기술(?)이 발전한 까닭인가? 국화에 대한 관심도는 전만 같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해본다. 어쨌거나 국화를 떠올린다면 분명 가을의 전령이요 대표적 상징일 뿐 아니라 누이를 닮은 꽃의 이미지는 그대로인,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누이의 존재를 떠올릴 때 마다 가슴속에 이는 울렁임과 동요를 생각해 보면서 가을은 곧 이런 정서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지난여름 혹독한 시련을 겪은 듯 보내고 나니, 매우 지쳐있었고, 잠시 혼(魂)이라도 뺀 듯 정신 못 차리게 하더니 벌써 가을이 훌쩍 와있다. 10월도 하순에 접어들어 이미 가을의 절정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예전처럼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윤달이 끼어 가을이 늦게 온다는 등, 기후변화로 우리가 아열대기후에 드니 더위가 더 오래 지속하고 가을은 짧아 졌다느니 하며, 이런 저런 소리들을 한다 해도 사계절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 국토의 지구상 위치를 볼 때 당연한 계절의 이동 중에 있다. 따라서 계절에 대해 느끼는 민감한 차이라는 것은 각자의 인식 차에 의한 것이며, 다소의 객관적 변화요인이 있다고 한들 그 역시 과학적 증명으로 일반화하기도 어려울 테다. 따라서 그저 마음속 정서와 내면에 오래도록 흐르는 감성에 의지하면서 새삼스레 가을 본연의 느낌에 젖어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연스런 일이 아닌가 한다.

국화옆에서.jpg 김희보 엮음, 가람기획, 2001년3월30일[사진:교보문고]


국화 옆에서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국화 옆에서」 전연, 김희보 편저 『한국의 명시』, 종로서적, 1980)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를 쓰며 고도의 상징적 은유를 뒤섞어 놓고 있다. 당연한 듯 가을이면 피는 많은 계절 꽃들 중에 국화는 우리의 기본 정서를 많이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저 가을이면 피는 것이 아니라, 봄에 생명 탄생의 고통을 겪고 태어나, 여름의 천둥과 같은 자연의 시련을 견뎌내고, 가을의 무서리조차 극복한 후 피는 꽃인데, 그 꽃이 마치 시인의 누님같이 생긴 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젊고 예쁜 청춘의 누이가 아니라,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온”, 즉 한창 때의 시절을 보내고 난 뒤 지난날을 그리며 아쉬움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나이가 든 모습의 누님 같이 생긴 꽃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 모습을 누님 스스로 거울을 통해 바라다보며 회한과 통한을 느끼고 있는 듯한 뉘앙스로 그려내고 있다.

미당은 이렇게 겉으로 선하고 고고하며 자애로운 자태를 보이고 있는 국화꽃의 모습 속에 담겨있을 내적 세계나, 남모를 사연이 간직된 스스로의 아픔이나 성찰이 뒤섞인 복잡함을 빗대어 읽어내려 한 것이다.

생애를 살아보면 즐겁고 행복한 것은 짧고, 후회와 고통 그리고 절망과 좌절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내려놓은 텅 빈 듯한 허무를 대신 가슴에 채운 우리들의 쓸쓸함을 누구든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 역시 어릴 적 누이의 모습을 오래도록 가슴속에 담아둔 끝에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나이 든 모습으로 달라진 누이를 비교해 보면서 누이만큼이나 서글픔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미당은 이 시를 쓸 당시의 가을에,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그가 관찰한 세상과 대상에 대하여 자기의 내적 인식을 표현해 내었다.

누구나 해마다 계절이 바뀌며 가을을 맞게 되지만, 미당도 마찬가지로 이 시를 쓸 당시에 이런 감성에 젖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만의 개인사적인 것, 또는 개인적 정서나 내면의 동요를 지나치지 않으며 기록하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가 30대를 지나던 시절에 내적으로, 또 외부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경험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조국이 다른 나라에 의해 독립은 했으나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서로 갈등하며 다투던 그때, 그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을 읽었을 수도 있고, 스스로는 불가피했을망정 일본의 편에 서서 민족을 배신하였던 쓰라린 과거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이 가슴속에 깊이 새겨져 있기도 했을 것이다.

미당은 이런 복잡하고 불안한 정서 속에서 그나마 상징과 은유를 동원하면서 가을의 놀라운 도래(到來)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매우 절제되고 심오해 보이는 은유와 상징을 담아 군더더기 없는 아름다운 시를 완성해 놓았으나, 내면의 저류에 흐르는 남모를 고통을 고이 가두어 둔 자기 성찰의 흔적을 암시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이 시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들이 나름의 해석과 해설을 내 놓은 바 있으니 누구든 크게 다르게 읽어 내기는 어렵다고 해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문학작품에 대한 감상과 소통의 교감 노력은 반복되는 것이며, 따라서 누구든 자기의 시선에서 바라다볼 측면은 있게 마련이다. 아무튼 국화는 늘 보면서도 알 수 없을 듯 무한한 수더분함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며 또한 국화의 태생적 절제와 그만의 안정적인 아름다움이 내재해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계절이 절정에 다다른 이때,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다시 읽어보면서 복잡하고 힘든 세상살이와 변화무쌍한 환경변화 속에서 마음의 여유가 있니 없니 하면서도, 우리 정서에 많이 닿아 있는 시 한편을 편하게 음미해 보는 일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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