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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테나 Apr 19. 2019

독립운동가, 전투기 조종사, 광복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자 창설 70주년을 맞이한 공군의 아버지 

우리가 살고 있는 2019년 올해는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일어난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해이다. 

과거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북아시아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진심어린 반성과 사죄보다는 오늘날에도 군사력 증강과 교활한 언행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자 김구, 권기옥, 박희성, 이용근, 최용덕 등 조국의 하늘에 헌신한 독립운동가 가운데, 오늘은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않는 용기와 희생 정신을 가진 우리 공군의 창설을 주도한 최용덕 장군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항일무장투쟁을 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초대 국방부차관과 제2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은 1898년 서울 성북동에서 태어나, 1910년 이른 나이에 국권 상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서 근대학문을 공부하고, 이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훈련까지 받았다.


1919년 기미년 삼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지역에서 대한독립청년단 단원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한다. 약산 김원봉이 단장이었던 무장독립투쟁단체 의열단에도 가입해 1923년 김상옥 의사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를 위한 폭탄 확보와 조선 반입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은 의열단의 ‘김상옥 열사 폭탄 투척 의거’를 다룬다. 영화는 중국에서 국내로 폭탄을 반입하는 과정을 긴장감 있게 표현하고 있는데, 실제 폭탄 밀반입을 시도하고 지원한 사람이 다름 아닌 최용덕이었다.


1923년에는 한교동지회를 조직해 기관지를 발간하는 등 일제에 대항한 무장투쟁의 전면에 나서는 가운데 독립운동의 외연 확장에도 적극 힘썼다.


이 시기에 최용덕은 대한독립청년단 군무부장이자 한국인 최초의 전투기 비행사로 추정되는 서왈보 장군의 영향을 받아 앞으로 전쟁의 승패는 하늘에 달려 있으며, 항공전력 육성이 조국 독립 쟁취에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간파하고 중국항공군관학교를 졸업 후에 1924년부터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며 일제와 맞섰다. 


중국군 항공대에 들어간 최용덕은 1926년 국민당정부에 참여해 장제스의 신임을 얻고 1937년 중일전쟁 당시 남창기지사령관을 역임하는 등 항일전선에서 크게 활약하며, 현재 군 계급인 대령 상당하는 상교의 위치에 이를 정도로 중국군의 신임을 얻었지만, 한시도 조국을 잊지 않았고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총무처장을 맡아 한국과 중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 


1943년에는 조종사 인력 양성과 비행기 구입 운동 추진, 공군설계위원회 설립과 운영을 주도하는 등 미래의 공군 창설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라던 광복을 맞은 최용덕은 ‘내 나라 공군’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창군 7인의 간부와 함께 백의종군해 항공부대 창설을 주도하는 등 공군 창설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1948년 미군정은 항공부대 창설을 위한 조건으로 항공분야 지도급 인사들의 보병학교 입교를 제시한다. 이때 최용덕 장군은 이영무, 장덕창, 김정렬, 박범집, 이근석, 김영환 등 창설 주역들을 설득해 그 해 4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병사와 똑같이 군사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 이들이 공군의 모태가 되는 통위부 직할 항공부대 간부로 활약하게 된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당시에 최용덕은 공군 창군을 주도한 7인의 간부들 중에서 연배도 높고 독립운동가이자 광복군으로서 명분과 경험을 모두 갖춘 명실상부한 수장이었지만, 당시 공군독립에 회의적 시각이 많았던 정치 상황에서 공군 창설에 기여하기 위해 군복을 벗고 초대 국방차관으로 취임해 공군의 독립 가능성을 담은 '육군에 속한 항공병력은 필요 시, 독립한 공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라는 국군조직법 유보조항을 반영해 공군 창설을 주도한 결과,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공군이 창군됐다.


국방부 차관으로서 공군 창설에 크게 기여한 최용덕은 6.25전쟁 중이던 1952년 제2대 공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해 영공 수호 일선에 앞장서다가 1956년 11월 1일에 전역했다. 

평생 조국의 광복과 공군 창설을 위해 살아온 창석 최용덕 장군은 1969년 8월 15일 광복절에 숙환인 고혈압으로 운명했다. 그는 '내가 죽으면 한국 군복을 입혀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군인의 본분을 다하며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하고, 공군전력의 중요성을 통찰하여 공군 창설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 장군은 대한민국 공군 정신의 원형인 ‘공군의 결의’와 공군이라면 누구나 부르는 ‘공군가’를 작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남의 나라 군복을 입고 살았던 수십 년의 한을 풀고, 독립된 조국의 공군을 만들고자 헌신했던 최용덕 장군, 그가 대대손손 우리 공군의 전통적 정신으로 “군기, 청렴, 멋, 단결, 책임완수, 필승의 신념”이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든 ‘공군의 결의’는 오랜 세월동안 공군 후배들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자긍심과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공군 정신의 원천이다.


[사진: 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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