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83. 흔적
우리는 누구나 흔적을 남기고 산다. 그 흔적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시간의 결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누군가는 삶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이 남긴 흔적을 타인이 발견한다. 그러나 정작 그 흔적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조용한 울림이다.
흔적은 발걸음의 방향이다. 누군가는 부와 명예로 그 길을 닦고, 누군가는 사랑과 헌신으로 길을 낸다. 삶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한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흔적이기 때문이다. 흙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비가 내리면 지워지지만, 영혼으로 찍힌 흔적은 세월의 풍화 속에서도 더욱 깊어진다.
어느 날 오래된 앨범을 펼쳐본다. 흑백 사진 속의 웃음, 함께했던 식탁의 온기, 그 시절 아이의 작은 손. 그것들은 모두 사랑의 흔적이다. 한때는 그저 일상의 조각이었지만, 세월이 지나니 그 모든 순간이 빛이 된다. 가족의 웃음, 친구의 눈빛, 나 자신이 흘린 눈물.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삶의 결을 이루며 나를 나답게 빚어왔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흔적이란 단지 지나간 자취가 아니라, 삶이 남긴 향기라는 것을.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함을 남기고, 한 장의 글에 진심을 담으며, 오늘 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 그 모든 것이 곧 나의 흔적이다.
인생을 돌아보면, 참 많은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느라, 또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뒤로 미루며 걸었던 세월. 그 길 위에 나는 수없이 작은 발자국을 남겼다. 남들이 보지 못한 희미한 자국이지만, 그 안에는 나의 숨결과 눈물, 그리고 묵묵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
젊은 날의 나는 늘 바빴다. 가정을 돌보며, 아이들의 손을 잡고,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살아냈다. 가끔은 내 삶이 세상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아무도 몰랐던 부엌의 새벽, 식탁 위의 따뜻한 밥 한 공기, 아이의 웃음을 바라보며 삼킨 깊은 한숨들. 그 모든 순간이, 지금 돌아보면 나의 조용한 헌신의 흔적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취를 ‘결실’이라 부른다. 내가 남긴 것은 결과가 아니라 온기였다. 그 흔적들은 내 안에서 하나의 빛으로 모여,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지를 조용히 증명해 준다.
이제는 안다. 흔적은 말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새겨지는 것임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 길을 묵묵히 걸었다면 그것이 곧 나의 존재 이유였다. 시간이 흘러 몸이 세월에 깎여도, 마음에 새긴 사랑의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는다. 가끔은 혼자 걸었던 그 길이 외롭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문득 뒤돌아보면, 내 뒤에는 작은 발자국들이 이어져 있다. 그 발자국은 아이들의 웃음이었고, 남편의 미소였고, 나의 기도였다. 그 길 위에 피어난 희미한 따스함이, 바로 나의 삶이었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흔적이란, 지나간 자리이다. 그 자리는 화려하지 않아도, 진실하기에 아름답다. 나는 오늘도 조용히 다짐한다. 끝까지 이 길을 걸어, 누군가의 마음에 따뜻한 흔적 하나 남기고 싶다고.
“흔적이란, 결국 사랑이 지나간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