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

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by 강효숙

84. 반복된 일들이 나를 지켜준다.

하루는 언제나 비슷하게 흘러간다. 아침의 커피 향, 책상 위의 노트, 저녁 무렵 창가로 스며드는 빛. 누군가는 이런 반복이 지루하다고 말하지만, 이 단조로운 리듬이야말로 나를 지켜주는 질서라는 것을.

젊은 날에는 늘 특별한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변화를 갈망했고, 반복은 정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세상의 불확실함과 고독의 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다 보니 나는 깨달았다. 반복된 하루의 의미는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라는 것을.

루틴은 나의 마음을 단련시킨다. 아침을 여는 작은 의식, 차를 끓이는 온도, 글을 쓰기 전 조용히 손끝을 모으는 습관. 그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흔들리지 않게 만든다. 삶은 늘 불안하고, 세상은 쉽게 변하지만, 내 일상의 루틴만큼은 나를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내면의 성벽이 된다.

고독한 시간도 있다.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있고, 텅 빈방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만 들릴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고독 속에서도 손끝으로 무언가를 적고, 정해진 시간에 몸을 움직이며, 계획한 일들을 차근히 채워나갈 때, 나는 비로소 알게 된다. 그 반복이 내 안의 열정을 지켜주는 리듬이라는 것을.

삶이 무너지는 순간은 거대한 사건 때문만이 아니다. 루틴이 사라질 때, 마음의 중심도 함께 흔들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작은 일정을 세운다. 시간표처럼 짜인 하루 속에 나를 닮고, 그 틀 안에서 조금씩 내면을 세워간다. 그것이 때로는 인내의 시간이 되고, 때로는 외로움을 다스리는 의식이 된다.

반복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비슷한 하루 속에서도 미묘하게 다른 색깔이 스며든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나를 향해, 그 반복이 내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길이 된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매일 새로워진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나는 내 루틴을 더 사랑한다. 그것은 나를 붙잡는 줄이고, 나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작은 불씨다. 루틴 속에서 나는 고요히 나를 다독이고, 반복된 일 속에서 다시 삶을 믿는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반복된 일들이 나를 지켜준다. 그 반복은 나를 가두는 틀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일으켜 세우는 삶의 리듬이다. 아침의 커피 향으로 시작된 하루가 저녁의 노을로 끝날 때, 나는 또 한 번 나 자신을 지켜냈다. 그 단조로운 하루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오늘도 조용히 나를 단단히 세워가고 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오늘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 주니까.

그러나 반복 속에도 흔히 보이지 않는 고단함이 있다. 한 걸음씩 나가는 일은 때때로 외로운 싸움이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자신을 붙잡아야 하는 고요한 결심의 연속이다. 밤이 깊어지면 마음의 그림자는 더 짙어지고, 정해 둔 계획표를 한 줄씩 채워도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누군가의 응원 없이 홀로 견뎌야 하는 무게는 생각보다 깊고 무겁다. 그럴 때, 나는 다시 작은 루틴을 붙잡는다. 뜨거운 차 한 잔을 우리고, 창가의 바람을 느끼고, 정해진 시간에 펴 둔 책의 한 페이지를 읽는다. 거창한 변화는 없지만,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나를 무너짐에서 건져 올린다.

삶의 의지는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자란다. 외로움이 가슴을 조이고 무력감이 스며들어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붙잡고 한 줄 더 적고, 한 걸음 더 내딛는 그 행위. 그것이 나를 지켜낸다. 우리는 결국 누군가의 박수보다 자신과의 약속으로 버텨내는 순간들이 더 많다. 비록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이 때로는 버겁고 때로는 공허해 보여도, 거기서 길어 올린 힘이 언젠가 다시 나를 살아가게 한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 외로움을 이겨낸 시간은 분명히 내 안에 흔적이 되어 남는다. 그 흔적이 내일의 나를 세운 근육이 되고, 다시 반복을 이어갈 숨이 된다. 반복된 하루는 나를 가두는 틀이 아니라, 흔들릴 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내면의 집이라는 것을. 어디에 있어도 지켜주는 중심이자 고독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게 하는 은밀한 힘이라는 것을.

세상의 소음이 마음을 흔들고, 홀로 견디는 시간이 깊어질 때도, 길이 막힌 듯 보일 때에도, 눈물 속에서 발걸음을 잃을 때도 주님은 조용히 동행해 주셨다.

그분이 곁에 계셨기에 고독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나를 지키는 힘은 결국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에서 왔다.


“그 믿음이 오늘도 나를 살게 하는 숨이고 내일을 향해

걸어가게 하는 가장 단단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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