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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Nov 10. 2020

어둠 속에 빛나던 그곳

백양사, 100년 전 기록과 함께 다녀온 이야기

100년 전쯤 심춘순례를 떠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심춘순례로 돌았던 곳곳을 기행문 형식으로 남겨 놓았고 당시의 글과 언어로 기록된 기행문을 몇 년 전 번역 작업을 통해 출간된 책이 있다. 최남선 작, 임선빈 옮김, <심춘 순례>이다. 20여 권의 최남선 총서 중 한 권인 <심춘순례>는 100여 년 전의 시각으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최남선(崔南善)의 호는 육당(六堂)이고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육(公六)이며,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문인 언론인 사학자로 명성을 떨쳤지만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저서나 사상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몇 년 전 선물로 받은 책 두 권이 그가 집필한 책을 현대 글로 번역한 책이었다. 한 권은 <백두산근참기>이고 한 권은 <심춘순례>이다. 책의 내용이 기행문 형식으로 쓴 것이라 그의 사상이 드러나기보다는 당시의 노정과 어느 장소를 묘사한 정도여서 친일파였다는 거부감을 잊고 읽을 수 있었다. <심춘순례>는 남도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것으로 명승지와 그곳에 관련된 인물들의 소개를 하였다. 그의 노정 중에 백암산, 백양사도 소개가 되었는데 당시의 모습과 비추어 그 이전의 역사와 현재 인식하고 있는 명승지의 모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최남선은 백암사(현 백양사)를 소개하면서 전체적인 분위기도 언급하였다. 나는 책을 통해서 본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현재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백양사는 최남선이 방문했을 당시에는 '백암사'라고 불렸으며 170칸의 전각당료(殿閣堂료)를 갖추었다고 한다.(건물의 기둥과 기둥사이의 벽을 '한칸'으로 본다. 보통 법당 한채는 10칸~16칸 정도이다.)  그 이전에 쇠락기엔 극락보전과 요사 한채만 남아있던 곳을 당시 주지 송만암 스님이 30여 년간 머물며 불사를 하여 최남선이 방문했을때에는 저렇게 큰 규모로 성장해 있었으며, 강원을 개설하고 중앙불교 전문 학교장을 겸임하면서 많은 인재를 길러 내기도 하였다고 만암스님을 칭송하고 있다. 또한 백양사의 분위기는 '여러 승려들의 주선과 사미의 예의범절이 자못 볼만하고 경내가 깨끗하고 상쾌하여 티끌세상의 속된 기운이 없어 염문이 돌고 있는 절을 보아 오던 중 퍽 좋은 인상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었다.


최남선이 하룻밤을 자고 170칸의 당우를 순례하는데 새로 지은 대웅전의 단청이 눈을 부시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지금 대웅전의 단청은 이미 100여 년 전의 곰삭은 빛을 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백양사 대웅전 뒤쪽으로 9층 석탑이 있는데 일본에서 전래된 불사리 1구를 봉안하였으며 역시 일본 사람이 조성한 것으로 조악한 형태라고 최남선은 적고 있다. 실제로 탑은 9층이라 불리지만 지붕돌과 몸돌이 8개밖에 보이지 않아 8층 석탑이라고 해야 맞는 건데 어떻게 9층 석탑이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쨌든 100년 전에 한 인물이 보았던 것을 바라보면서 그가 바라보았을 만한 위치를 상상하는 것도 잔잔한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백양사 조사당 앞쪽에는 괘불대가 있다. 괘불(掛佛)이란 사찰의 중요하거나 큰 행사가 있을 때 부처님이 그려진 커다란 탱화를 법당 앞 마당에 걸고 법회(야단법석(野壇法席))를 하기 위해 준비된 그림으로 그 규모는 상당히 크다. 그 큰 그림을 걸기 위해서는 힘이 있는 받침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괘불대(掛佛臺)라 하였고, 대체적으로 주불로 모시는 부처님이 계신 전각 앞에 세우게 된다. 그런데 백양사에는 괘불대가 조사당 앞에 있었다. 대웅전도 있고 극락보전도 있는 사찰에서 조사당 앞에서 야단법석을 하였었는지 그랬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하였다. 최남선의 글에도 괘불대의 언급은 없어서, 어쩌면 그 이전에는 현재 조사당으로 쓰이는 당우의 위치에 대웅전이나 극락보전이 위치했을 수도 있었으리라는 상상 했다.


사찰에 들어가기 전에 속세의 모든 것들을 씻는다는 의미로 우리나라의 전통사찰은 거의 개울건너에 지어진다.
부처와 대중이 하나라는 의미로 사찰 입구에 지어지는 일주문과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제2066호)이 모셔진 백양사 극락보전
백암산 백암봉이 품고있는듯한 모습의 백양사 대웅전




백양사에는 '백양꽃'이라는 꽃을 소개하는 푯말이 있었다. 상사화 종류인 이 꽃은 원추리를 닮았는데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백양사에서 처음 발견되어 백양꽃이라는 이름을 부여했다고 한다. 머지않아 '백양꽃 축제'라는 이름으로 선운사나 불갑사처럼 백양사의 명성이 바뀌어 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백양사에는 봄에 가면 화려한 모습과 은은한 향기로 반겨주홍매화 나무인 '고불매'의 자태가 고즈넉한 사찰의 운치를 더해준다. 수령이 350여년된 고불매는 호남 5梅에 속하며 200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받고 있다. 부처님이 그 그늘 아래서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보리수나무'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백양꽃에 대한 설명이다.
백양사고불매(고불(古佛)의 기픔을 닮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백양사 보리수 나무(道樹, 覺樹 라고도 불린다)



100여년전 사람들은 명승지 관람을 위하여 산넘고 물건너 순례하듯이 다녀왔다. 지금은 관광이라 하면 편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심신을 회복하는 시간으로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지만 그때에는 몇개월 계획을 세우고 다시 몇개월을 노정에서 지내는 쉽지 않은 길 이었으므로 '순례'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것 같다. 그냥 눈으로 보고만 온 것도 아니고 기록을 남기기 위한 지필묵을 소지하고 다녀야 했던 길이었으니, 그길을 나선 용기가 대단하다. 저자가 친일의 행적이 있다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지나간 시간들의 단편이나마 살펴 볼 수 있는 기록들이어서 책 자체는 소중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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