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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숙 Jun 25. 2021

시골살이 낭만은 없다.

풀들과의 전쟁만 있을 뿐이다

시골살이를 하기로 처음 계획했을 때는 정말 이쁘고 깔끔하게 주변의 풀하나 없이 정돈하며 살 자신이 있었다. 갖가지 이쁜 꽃들로 주변을 채우고 사철 빠지지 않고 꽃을 보며 살리라는 다짐도 했다.


열심히 일하고 주말이면 설레는 마음으로 완도 집에 가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면 설레는 일들보다 내 노동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 때문에 낭만적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이사하고 이제 8개월, 나는 지금 느낀다. 시골살이라는 것이 고상하게 꽃이나 가꾸며 사는 것은 잠잘 때 꿈속에서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난 어느새 꿈속에서도 풀을 뽑고 있다. 아직은 온전한 귀촌이 아니어서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못하고 산다는 핑계를 댈 수가 있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핑계가 해결방법이 아니라는 걸 느낀다.


어느 해 보다 잦은 비 소식에 어린 모종을 심었을 때는 하늘이 나를 위해 비를 내려주는 줄 알았다. 초보 농사꾼의 부지런한 움직임에 천지신명님들이 도와준다는 자만한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보았을 때 이미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자라난 풀들이 날 비웃고 있었다.


하늘은 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작물들에게만 비를 내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밭, 화단, 마당, 심지어 현관 앞의 작은 틈새에 있는 이름 모를 잡초들까지도 공평하게 빗물을 내려주고 있었다. 어린 모종들은 내가 없는 일주일 동안에도 하늘이 내려주는 물을 먹으며 자신들을 괴롭히는 풀들에게 영역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작물들만 나오고 풀은 나오지 말라고 뚫어놓은 비닐의 구멍으로 풀들이 먼저 올라온다. 풀들에게 자기 자리를 빼앗긴 작물들은 소심한 존재만 유지한 채 눈치만 보고 있다. 풀들부터 군기를 잡아주지 않으면 열매 한 개도 주지 않을 것 같다.  


급한 대로 비닐 사이로 올라온 풀들부터 뽑아 주었다. 풀들이 제거되고 나니 모종들은 하루게 다르게 자라났다. 다행이었다. 튼실하게 자리를 잡으며 새순들을 키워 올렸다. 올라온 새순마다 사랑스러운 꽃들이 달리더니 이제는 싱싱한 먹거리를 선물해 준다. 그러나 내가 없는 한주일 만에 풀들은 작물들보다 더 건강하게 영역을 확보해 가고 있다. 조금의 공간도 남기지 않고 모두 뿌리를 내려 버린다. 상추 잎을 따고, 고추를 따려해도 풀을 헤치며 따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런환경에서도 먹을만큼 자라준 고추나 푸성귀들이 고마울 뿐이다.


얼마 전에 심은 호박들은 풀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았다. 하루를 호박밭에 시간을 쓰며 호박 구덩이 주변의 풀들만 뽑고 비료를 한 줌씩 넣어 주었더니 이제는 주변의 풀들을 움켜쥐며 열심히 새순을 뻗어나가고 있다. 널따란 호박잎들이 풀들을 다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밭의 풀들에 정신이 팔려 며칠 싸우다 보면 어느새 현관 앞 블록 사이로 뿌리를 내린 풀들이 제발 못 본 체해달라는 듯 소심하게 자라 있다. 그래도 현관 앞까지 풀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으니 기운을 모아 다시 혈전을 벌인다. "어디 현관 앞을 차지하려고, 어림도 없다" 그 순간에 승리는 항상 나라며 승전보를 울리지만 어느새 자라 있는 화단의 풀들이 다시 내게 전쟁을 걸어온다.


집 앞부터 화단, 밭까지 풀들과 싸우며 한 바퀴를 돌아오면 지나 자리에 다시 쑥 자라나 있는 풀들이 잠시도 쉬도록 놔두질 않는다. 결코 소리 없이 자라는 풀들을 이길 수가 없다. 날 낭만에 젖어있도록 가만 두지 않는 최대의 적이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던 4월에는 풀들 때문에 내 시간을 빼앗기는 상황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때는 코로나가 조금 완화되면 지인들을 불러서 좋은 시간 보내리라는 여유 있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6월이 되니 풀들이 자라는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뽑아도 뽑아도 표시도 안 난다. 지금은 호미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 뿌리를 캐는 것은 포기하고 남편의 예초기로 땅 위에 솟아있는 부분만 베어버리기로 했다. 옆집에선 제초제를 쓰라고 하시는데 난 제초제를 다루는 것조차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냥 베어버리며 살기로 했다. 설마 풀들이 나까지 덮어버리기야 하겠냐는 만만한 생각을 아직도 한다.


주말이 없던 각박한 생활들을 큰마음먹고 정리하고 겨우 얻은 시간들이다. 토요일 아침부터 주어지는 이틀의 시간을 자유를 찾아, 낭만을 찾아 즐기며 열심히 살아온 삶에 대한 보상을 누리리라 생각했다. 그때 느낀 여유롭고 너그러운 마음이 아예 전원 속에 정착하자는 마음을 가지게 했고 귀촌을 결정하게 했다. 섬마을 바닷가에 귀촌지를 정하고 그곳에서의 삶들을 생각할 때까지는 순간순간이 낭만적이었다. 집 주변을 돌아가며 아기자기한 꽃들과 나무들이 향수와 방향제가 되고, 새들이 깨어나 노래할 때 같이 일어나고, 파도를 타고 오는 해풍으로 선풍기를 삼아, 자연을 닮은 삶을 살리라는 생각으로 얼마나 설레던지, 산다는 것이 그렇게까지도 멋있기만 한 줄 알았다.


처음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풀들을 만났을 때, 그 풀들마저 얼마나 이쁘던지 화분에 옮겨 물을 주며 현관 앞에서 자라도록도 해주었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움 자체였다. 그랬던 나의 시골살이는 그리도 이쁘다고 마음을 주었던 풀들에게 상처를 받고 있다.


도시생활에서 지치고 생각대로 하는 일들이 잘 안 풀릴 때 사람들은 "시골 가서 농사나 짓지"라고 하는 말을 한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다. 남들이 하는 농사일이 저절로 씨앗이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였고, 시골집 담장 아래로 올망졸망 자라는 꽃들이 때가 되면 저절로 피어나는 줄 알았다. 직접 키운 농산물로 건강한 밥상을 차리고 좋은 사람들과 나누어 먹으며 그래도 남으면 시장에 가서 팔 생각도 했었다. 게다가 난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니 멋진 시를 짓고 가슴 찡한 글들을 써내며 살고 싶었다. 그런 시골살이 한 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그렇게 될 줄 알았었다. 처음 남편이 밭을 갈아 몇 개의 두둑을 만들어놓을 때까지도 그 생각 들은 유효했었다. 그러다 씨감자 몇 개를 심으려고 나머지 작업을 하면서 느꼈다. 농사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구나! 쪼그리고 앉아서 하다 보면 허벅지와 종아리가 퉁퉁 부어올랐다. 너무 힘든 일에, 나름 머리를 쓴다고 상대적으로 쉽다는 작물들로 밭을 채워보려 했지만 쉬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부지런히 풀을 뽑고, 물을 주고, 가지를 묶어주고, 필요 없는 순들은 따주기도 해야 한다.  피부는 까매지고 엉덩이로 등짝으로 모기에게 헌혈도 해야 한다. 어떤 때는 입술도 물리고 눈두덩도 물린다. 약도 바를 수 없고 긁을 수도 없어서 가라앉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 그런 시간 들을 보내고서야 얻은 것이 싱싱한 푸성귀 몇 바구니와 토실토실한 감자 몇 박스였다. 그러니 농작물을 거두어 시장에 출하를 할 만큼 농사를 지으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160평 정도의 농지, 이 정도야 충분히 지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던 코딱지만 한 밭에 화려한 봄날의 낭만과, 문학적 소양을 키울만한 시간들을 다 빼앗기고 나서야 깨달은 생각은 "시골살이 결코 낭만은 없다! 다만 풀들과의 전쟁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것이다.  2021년 6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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