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절대 귀한것도, 절대 하찮은 것도 없다

비닐 한조각 필요했던 순간

by 강현숙

햇볕이 쨍쨍한 것을 보고 집을 나섰다. 선캡을 쓰고 마스크를 챙기고 핸드폰만 든 여유 있는 차림이었다.

가까운 야산으로 운동을 하기 위해 가볍게 나선 것이었다.


집 주변의 야산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해발고도 200여 미터밖에 되지 않는 곳이고 왕복으로 다녀오는 시간도 1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다. 높지도 않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지만 지금의 내 나이에 무리하지 않고 운동하기에 적당하다고 생각되어서 자주 찾는 곳이다.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 위해 나무 그늘 아래로 천천히 걸었다. 정상을 넘어 산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뒤돌아 올 예정으로 반대편 하산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무성한 나무 위로 후둑후둑 빗소리가 들렸다. 뜨겁던 햇볕이 수그러든 것이 나무 그늘 때문이라고 느끼던 순간이어서 하늘에 비구름이 지나고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었다. 손바닥을 내밀어 보니 한 방울씩 비가 떨어졌다. 예상했던 코스를 다녀오려면 20분은 소요될 지점에서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소나기라면 금방 지나갈 수도 있고, 목적지를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이에 멈출지도 모르는데 내 운동만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 돌아서지도 못하고, 혹시라도 소나기가 아니어서 한동안 계속 내리면 낭패라는 생각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망설이게 된 것이다.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비 좀 맞는다고 체온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내 몸에 맞는 비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손에 들려있는 핸드폰이 걱정이 되었다. 요즘 핸드폰은 물에 넣어도 끄떡없는 방수 기능을 갖춘 것도 있다고 하지만 내것은 아직 그런 기능을 갖춘 것이 아니었다. 습도가 조금만 높아도 충전단자에 녹이 슬어 충전이 안되어서 두 번이나 수리를 받은 경력이 있는 기계였다. 이럴진대 비에 홀딱 젖는다면 틀림없이 어떤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내 몸보다 더 걱정을 해야 하는 핸드폰이 이상 없기를 바라기 위해서는 한 방울의 비도 맞도록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느 코스를 잡아 내려온다 해도 집까지 30분 이상 걸릴 상황에서 비가 계속 내린다면 핸드폰이 젖는 건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갑자기 비닐 한 조각만 있다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에 미쳤다. 그러나 산속 어디에 내가 쓸만한 비닐이 있을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찾아보기로 했다.


중간쯤에 터를 닦아놓고 배드민턴을 치는 공간이 있었다. 가끔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니 어쩌면 음료라도 담아왔던 비닐을 두고 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그곳을 살펴보았다. 까만 비닐이라도 한 장 나올듯한 분위기인데 그곳을 이용하던 분들이 얼마나 철저히 관리를 하셨던지 한 장의 비닐도 나오지 않았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그 순간에 딱 맞는 말이었다. 야속하게도 비닐을 구하겠다고 머뭇거리던 시간에도 비는 더욱 굵게 내리고 있었다.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축축해짐을 느끼며 옷 속으로 핸드폰이 들린 손을 집어넣고 10분쯤 걸으니 약수터와 정자가 보였다. 일단 정자 안으로 몸을 피하고 그곳은 조금 더 사람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라 비닐을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다시 하며 둘러보았다. 아싸~, 파란색 얇은 비닐봉지가 보였다. 정자 기둥에는 줄을 매고 수건인지 걸레인지 모를, 수건들이 걸려있었다. 의자와 테이블을 닦기 위해 누군가 준비해 두었던 것일 텐데, 사용 후 약수터 물에 빨아서 걸어놓은 것으로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물기를 닦을 만큼 바짝 말라 있었다. 그 순간에는 마른 수건이라는 자체만으로도 감사했다. 일단 핸드폰에 살짝 묻은 빗물을 닦아내고 파란 비닐을 주으려는 순간 햇볕이 쨍하고 비추었다. "뭐야?" 하며 하늘을 보니 비구름이 지나가고 해가 나오고 있었다. 아직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지만 소나기는 이미 세력을 다하고 이왕 내린 비도 햇볕에 금방 마를듯한 분위기였다. 비닐은 이제 필요가 없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제없이 작동도 잘되었다. 여름 소나기의 변덕스러움에 계획했던 운동만 망친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었다.

잠깐 20여분 사이에 작은 비닐 한 조각의 필요성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비닐 한 조각만 있으면, 그래서 핸드폰만 젖지 않는다면 비 좀 맞는 것쯤 아무런 걱정이 없겠다는 생각으로 구하려 하였지만 구하지 못할 때의 간절함이란, 복권을 사고 맞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었다. 쓰레기가 버려질 만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평상 시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곳을 눈을 크게 뜨고 헤매는 내 모습이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이상한 아줌마로 보일 것이 분명한 그런 행동을 하고 있었다. 또한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이 사용해서 이미 꾀죄죄한 수건이 내 핸드폰의 물기를 닦아주는 고마운 물건이 되었었다. 세상엔 절대 귀한 것도, 절대 하찮은 것도 없다는 진리를 작은 비닐과 꾀죄죄한 수건이 말해주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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