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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Aug 21. 2022

First  Glory. 가을.


소중한 나의 벗에게.

잘잤니? 파란 하늘이 자그마한 손바닥을 벗어났어. 그치지 않을 듯, 세상을 물들여가던 빗방울들도 땅 속에 스며들어 잠이 들었지. 공기의 호흡이 투명하고, 가벼워진 걸 보니 어느새 가을이 내밀어준 손끝에 입을 맞추어야 하나봐. 가을에는 항상 난, 혼자였지만, 이번 가을의 향기는 조금은 다를 듯 해.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아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어. 가을인데 해야할 일왜 많은지 궁금하다구? 그럼. 이야기 해줄테니, 토끼처럼 귀를 쫑긋세우고 기울여.

반짝거리는 너의 눈동자는 나를 향해 있어도 항상 그리워할 수 밖에는 없을 것만 같아.

가을은 어쩌면 사계가 시작되는 첫번째 영광인지도 모르겠어. 가을이 슬며시 건네는 첫번째 아침의 햇살이 창틀을 조용히 넘어와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그의 시선에서 갓볶아낸 원두커피의 냄새처럼 쌉쌀하고도, 무해한 향이 고요하게 흘렀지. 가을을 맞이하기 위해 매년 치루어야하는 의식인, 영화 '만추'보며, 난, 너와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 보았어.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히는 붐비는 백화점 안에서도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기억의 조각들을 서재 곳곳에 걸어두며, 하얀 커튼을 오른쪽으로 스르르 밀어내었지. 뽀송뽀송하게 햇살 아래에서 건조되어진 하얀 식탁보처럼, 너와의 기억은 이젠 눈부시게 내려앉아 이곳을 덮어주고 있었어. 가을을 닮은 '이소라'의  목소리잠든 나무들을 깨우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나누었지. 나의 인사에 자목련과 백목련의 초록빛 잎사귀가 르릉 거렸고, 감나무는 주홍감을 떨구며, 화답하여 주었어. 익지 못한 채, 떨어져버린 안쓰러운 감들을 주워서 평상에 가지런히 올려두었지. 직박구리가 맛있게 식사할 수 있으면, 좋을 것만 같았어. 너와 내가 만나 평상에 걸터앉아 감을 따서 나눠 먹으며, 속살거릴 수 있기를 바래보았어.

가을이니 말이야.


자라버린 나무들의 숱을 단정하게 조금 정리해 주었, 어지럽게 자라난 풀들을 뽑아주었어. 며칠간 내린 비로 엉켜버린 꽃들을 조심스레 풀어주었더, 그 안에 작은 꽃이 움크리고 앉아 베시시 웃고 있었어. 실타래처럼 엉켜버린 듯 보이지만, 천천히 하나하나 풀어내면 아주 단순하면서도, 그래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무언가가 놓여있는지도 모르겠어. 너의 실타래들, 비록 함께 풀어낼 순 없겠지만, 네가 지치지 않게 이곳은 너를 응원하고 있다는 걸, 잊지 않으면 좋겠어.

마알간 쉼과 함께 너를 기다려.


가을은 수확과 기쁨의 계절이기에, 음.. '비발디'의 '사계' 중 '가을'이 빠른 템포의 알레그로를 따라 흐른다는 건, 정말이지 꼭 맞는 옷인 것만 같아. 하지만 정원 집사들에겐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기 보다는 다가오봄을 준비하여야 하기에, 시작을 알리는 영광의 축포와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어. 너와 내가 교에 처음 가던 날의 설렘, 첫 회사에 출근을 하던 아침, 매년 새해의 처음이 주던 보석같은 다짐들... 기억나? 그래, 가을은 그런 계절이었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설렘의 계절. 맞아. 어느새 익어버린 듯 하지만, 아직 다가오지 않은 우리들의 화사할 봄을 준비하여야 하는 계절. 말이야.


수확을 하며, 예쁘고, 튼튼한 녀석들은 잘 말려 두었다가 봄에 다시 씨를 뿌려야 해. 봇물처럼 터진 옥수수들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어. 어떤 아이들이라도 흙으로 돌아가면, 잘자라 듯해서 고민을 덜어낸 것 같아 기뻐하고 있어. 그리고 겨울을 땅 속에서 이겨내면,  더 풍성하고, 화사한 꽃을 선사해 주는 식물들은 미리 씨를 뿌려주고, 겨울잠을 편히 잘 수 있게 짚으로 덮어 주어야 해. 수줍게 웃고 있을 만개한 유채꽃을, 초록빛 가득한 너와 함께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삐거덕거리는 낡은 연두나무 의자 하나를 너를 위해 준비해둘게. 낡은 의자라 아무도 탐내지 않을테니, 편히 앉아서 쉬면 좋겠어. 너의 의자이니 말이야.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아. 모종 화분들도 준비해야해. 채종한 씨앗들을 그곳에서 발아시키고 새싹을 키워내어, 서리가 내리기 전에 미리 옮겨심어 주어야 하는 아이들도 있어. 온몸으로 겨울을 버텨내고, 봄을 감사하게 맞이할 줄 아는 다년생 식물들은 강건한 아름다움을 지닌 너를 닮은 것 같아. 

견뎌내주고, 살아내주어 고마워. 기특하고 귀여운 나의 친구.

그리고 말라버린 깻대와 옥수수 대는 탈탈 털어서, 이곳 저곳에 덮어주면, 씨앗들이 따듯하게 흙 속에서 재잘거릴 수 있을거야. 또, 거름이 되어 봄이 조금  안온하다가오도록 해주겠지. 들리니? 대지의 살결에서 흘러나오는 멈추지 않는 생명의 노래소리가 말이야. 부디, 너에게 온전히 가닿아우리 함께 들썩거리며, 가을의 영광을 따라 춤을 출 수 있길 소망해봐.


올해는 네가 좋아하는 호박을 가꾸지 못해 속상하였지만, 대신 머위 잎과 곤드레 나물, 그리고 미역국과 하얀 쌀밥 한술 얹어, 소담한 밥상 하나 내어줄테니, 다녀가길 바래. 머위의 진한 향기가 너의 향을 덮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어느새 우리는 인생의 가을을 향해 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벚꽃이 만개한 우리의 봄을 정성스럽게 맞이할 준비를 해나가면 좋겠어. 각자의 봄은 여기도, 저기도, 파아란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파랗고, 노오란 풍선들처럼, 그렇게 곳곳에 편재해 있는게 아닐까 직선으로 달리지만, 매일을 휘청거리며, 달려가는 시간의 흐름보다, 네가 그려내는 너의 녹색빛을 믿어보는건 어떨까? 삶이라는 길 위에 있는 한,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베낭에 넣어 걸어야만 할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갈 수 있게 말이야.

우리들의 찬란한 봄은, 아직 오지 않았어.

가을이야. 곧 만나.

베로니카 퍼스트 글로리.

※ 베로니카 퍼스트 글로리 꽃말 : 충실, 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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