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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Apr 03. 2023

Prologue. 호박잎에 싼, 차마 하지 못한 말들.


 ‘살았고, 썼고, 사랑했다.’                                    

                                                          「‘스탕달’의 묘비명」     


 연일 찬연한 금빛 햇살이 봄을 다시 초대합니다. 농부에게 있어 봄은 다시 시작하는 계절, 다시 태어남의 계절, 사계의 순환이 시초로 되돌아오는 계절. 그래서 서투르고 어설프지만, 몸과 마음이 분주하게 떠오르는 계절입니다. 조금은 바쁜 계절이지만,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어리숙한 저에게 그저 부드러운 침묵의 언어만을 들려주며 온화하게 저를 기다립니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내려앉은 나무들의 가지에는 연한 연둣빛들이 방울방울 다시 매달렸습니다. 잘려진 그루터기에는 새순이 돋아나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맑은 물방울이 희석된, 풀냄새 가득한 공기를 차분하게 마시고 내어 쉽니다. 검푸른 호수를 떠다니는 봄빛 윤슬이 어떤 잠언처럼 느껴집니다. 기억, 그리움, 인연, 영원... 이런 말들이 반짝이며 저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마침내 계절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좋아하는 복숭아나무를 조금 더 심어보려 읍내에 있는 농원에도 다녀왔습니다. 작년에는 가꿔보지 못했던, 도톰한 호박 씨앗도 잘 추려서 흙으로 돌려보냈으니, 올해는 보슬보슬한 호박잎에 하얀 김이 실핏줄처럼 일어서는 쌀밥 한술 얹어 그립던 누군가와 마주 앉아 볼 수 있기를 고대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주해 달려오는 일터의 일들과 행운처럼 날아든 출간을 위한 원고 마감이라는 것도 잘 마쳤습니다. 잠시 숨을 돌리며 한밤이 길을 지운 들녘을 걸어봅니다. 제가 걷는 발아래에 길을 놓아주듯 까만 밤하늘의 잔별들이 무수히도 불을 밝힙니다. 반짝거리며 저를 채워준, 앞으로도 저를 채워줄 기억들. 말로 다 하지 못해 별이 된 마음들. 그리고 이를 받아쓰는 문장들.

 흘러가는 세월이 그리 야속하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달려오는 많은 일들을 해내며, 감내해야만 했던 책임과 의무들에 결국 까맣게 타들어 가던 속이 발작을 일으켰고, 저는 화가 잔뜩 난 위장을 달래보려, 뒷산에서 얻어온 봄 향기 가득한 쑥을 넣어 마알간 소고기죽을 끓여 먹어야 했지요. 매섭고 황막했던, 저의 속 뜰이 시골의 봄 내음으로 채워지고, 사나운 불길이 사그라들 듯 몸살은 그렇게 누그러져 가더군요. 혈관과 근육과 뼈를 지나 마음까지도 무해한 것들로 채워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몸 안 가득 번져가는 순수한 자연의 향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살갗처럼 언제나 따듯하고 부드럽습니다. 건너편에 사시는 할아버지께서 두릅을 데쳐 가져다주십니다. 두릅 새순은 자식도 안 주는 거라며, 의기양양해 하십니다. 고맙지요. 참으로 고맙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라고 누군가는 생각하겠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도 떠올릴 수 있는 일들은 아마도 이런 것들뿐이겠지요. 사람이 사람에게 그저 안부를 묻는 것뿐이지만, 겨우 그거 하나뿐이지만,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는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는 일은 그거 하나면 충분한 듯합니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의 마음을 말없이 데워주는 일도, 허기를 달래는 밥 한 끼 내어주는 일과 다르지 않은 듯하더군요. 불현듯, 제 시절의 무렵에 걸쳐져 있던 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 순간 저는 그들의 표정을 하늘에 그리며 생각에 잠깁니다.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는 말을 해주고도 싶었던가.

 당신 편이라는 듯 조건 없는 미소를 보여주고도 싶었던가.

 그저 괜찮다는 듯 안아주고도 싶었던가.’     


 툭. 하고 처절하게 떨어져 내린 검붉은 동백꽃처럼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이 고개를 치들고서 저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차마 하지 못한 말들, 차마 꺼내어 보여주지 못한 마음들. 더 늦기 전에, 더 멀어지기 전에, 검붉은 동백꽃처럼 저 또한 기어이 떨어져 내리겠다는 다짐 같은 것이 밀려오더군요.

 시골에서 자연이 너그럽게 내어주는 위로와 기쁨의 언어들이 저를 존립하게 했고, 이어가는 문장들로 저는 앞을 바라보며 보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안에서 글 쓰는 책방 할아버지라는 꿈을 품고서, 느리지만 차근차근 자명한 법칙처럼 삶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떨어져 내리더라도 다시 굳건하게 꽃을 피울 수 있을 듯한 단단한 확신이 그만큼 제가 딛고 서 있는 희망이라는 것을 굳건하게 해주는 듯합니다. 축축한 손안에 꼭 쥔 것들을 나무 그릇에 가득 담아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전하고만 싶은 계절이 찾아온 듯합니다.

 나도 아팠으며, 당신도 아프지만, 내가 그렇듯, 당신도 괜찮습니다.


 마음을 치유하며, 글을 쓰고 지나온 삶을 돌아보다 보니, 그동안 수확한 과실을 제대로 맛본 적이 없습니다. 입안에 가져가 보지 못했던 자연에서 내어주는 건강함을 이제는 조금은 더 느긋하게 맛보며, 삶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포용과 해독, 그리고 사랑의 용기라는 꽃말을 가진 호박잎에 차마 하지 못한 침묵의 언어들을 써내려 가며, 맛과 말을 건네고 삼켜보고 싶습니다. 비록 소소하고 미소한 것들뿐일지라도 그것조차 없는 삶보다는 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이 제 안에 가득합니다.

 다시 일어서야겠어요. 참혹했던 겨울을 묵묵하게 견뎌준 파릇한 시금치가 무척이나 잘 자랐기에, 마을 할아버지들께 조금 나누어 드리고, 시금치를 참기름에 무쳐보려 합니다. 시금치를 무치면서 아마도 금이 간 저와 누군가의 마음을 떠올리며, 조금은 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쓰고, 울고, 살아가는 일들뿐이지만, 누군가를 위해, 또 저를 위해 문장을 아로새기며, 밥을 안치는 일은 어쩌면 사랑의 모습 중 하나일 테지요. 이것 외에는 사랑할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아직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얀 달빛이 시골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투명한 바람이 쓰다듬는 호수의 잔물결은 고요합니다. 밥 짓는 냄새가 마을 여기저기에 가만히 누웠습니다. 평온에 냄새가 있다면 아마도 이를 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저의 마음. 그 마음을 담아 소박하지만, 밥상을 차립니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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