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결정적 순간은 없었다. 단지 작은 선택과 마음들이 삶의 궤적을 이을 뿐이었다.’
「강현욱의 노트 중.」
여기는 며칠간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어둠과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은 서재에는 적막 속에 싸늘함을 지나 어느새 구름 사이로 다시 투명한 햇살이 떨어져 내립니다. 익어가던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바짝 당겨 앉고 있습니다. 논에는 모내기가 한창이고, 할머니들의 남색 장화는 바삐 걸어가고, 앵두는 붉게 여물었습니다. 학교 기말고사도 마쳤기에 오늘은 앵두와 매실도 따고, 무성해진 잡초도 뽑고, 흙도 조금 돋우어 주며 나른한 하루를 보내려고 합니다. 잠시 눈을 감고 맑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평온한 삶이 지나가는 소리를.
하지만 잠시라도 방심하면 뜨락이 어느새 열대우림처럼 변하는 계절이기에 잡초들을 솎아주려 운동화를 고쳐 신고, 구멍 난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서 문을 열었습니다. 금빛 햇살이 발끝으로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그리고 최면을 걸듯, 주문을 외웁니다.
‘발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눈이 시릴 만큼 쏟아져 내린다.
주어지는 하루가 그렇게 나의 정수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경이로운 금빛 햇살 안에 섞여 잔잔히 흐르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제가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조금은 살아봤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미지의 것인 듯한 무해한 감각들을 향해 팔을 뻗고서 그저 황홀해합니다. 알지 못할 때는 하얀 털을 가진 어느 시골 개의 어슬렁거림도. 그저 지나갈 뿐인 어느 할아버지의 낡은 자전거 소리도. 벚나무 잎에 새겨진 선명한 핏줄들도. 모든 것들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겨졌었는데,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것들에 불과했었는데, 그저 사라질 뿐인 허상인 것만 같았는데. 하지만, 이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알아가겠지요. 마음을 나누고 공유한 시간들을 따라, 서로의 시선은 그렇게 한 점에서 만난다는 걸 말입니다.
오늘 저의 시선은 이 년 전, 밤하늘의 잔별 아래에서 심었던 매화나무에 닿아있습니다. 계절을 지나, 시간이 흘러, 어느새 짙어지고 깊어진 매화나무. 우산조차 기울일 수 없는 여름날의 폭풍우를 지나, 살얼음이 가시처럼 박히는 겨울 속에서도 명치가 시뻘겋게 타오르던 저, 그리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느다란 매화나무는 조금씩 아무도 모르게 키가 자랐습니다. 어스름이 내려앉을 때면 물을 주고, 공기가 차가워질 때면 거름을 주며, 나무도 저도 담담하게 세월을 들이마시던 지난 시절이 떠오릅니다. 기억들 안에 있는 저는 분명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람을 익어가게 합니다.
청매실이 꽤나 많이 매달려 있어 장마가 도착하기 전에 매실을 수확하고, 매실주를 담가두려 합니다. 무얼 만들어볼까, 곰곰이 생각하다, 끈덕지게 이어진 저의 인연들을 위해 술을 빚기로 결심했습니다. 언젠가 그들과 평상에 앉아 깊숙이 숨겨 둔 빚은 술을 남몰래 꺼내 달빛을 안주 삼고, 뻐꾸기의 지저귐을 노래 삼아, 대작하는 일도 참 좋겠습니다.
‘매화가 흐드러지게 흩날린다.
술이 익어가는 향기에 친구를 생각한다.
매실주를 좋아하던 친구.
술잔 안에 떠 있는 친구의 거무스름한 얼굴에,
밝은 달은 이내 환해진다.’
장갑을 끼다 말고 평상에 엎드려 노트를 펼치고서 집게손가락으로 연필을 굴리며 글을 씁니다. 햇살이 품은 바삭한 노트에 글을 쓰는 나는 행복하다고 적습니다. 지나간 것들이 문장 속에서 다시 살아나 현재를 살아갑니다. 글쟁이들은 과거와도 대화를 하며, 깊어지고 다시 알아가지요. 때론 행간과 여백에 떨어진 눈물이 얼룩으로 남아있기도 하고, 떠나가 버린 것들의 잔해를 다시 긁어모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글쟁이의 마음이라는 게 참으로 이상해서 지치지도 않고 인연을 맺으며, 관계 지으려 애씁니다. 가끔은 애쓰지 않아도 다가오는 것들에게는 짧은 문장 하나로 반갑게 마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글쟁이들은 간혹 달려오는 서운함과 상실감으로 허공에 물기 가득한 한숨을 내쉬기도 하지만, 만년필을 움켜쥔 채, 이를 끝끝내 쫓아내며, 반복 속에서도 기적처럼 빛을 발견해 내는 자들인 것만 같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기다림의 끝에 버려진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 듯합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저는 행복합니다.
얼마 전, 회사에 교육이 있어 강당에 들어가다가 앳된 남성과 여성이 하얀빛을 뒤로한 채, 저에게 다가와 수줍은 듯, 반가운 듯, 가늘어진 눈을 하고서 인사를 하더군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희... 교육원에서 선생님 수업 들었었는데... 선생님 책도 읽었어요.’
사실 신규 직원들의 많은 얼굴들이 모두 기억나지는 않아서 조금 당황했었지요. 눈을 깜빡이다가 용기 낸 그들이 무안해질까, 표정을 감추며, 금세 저도 ‘아. 안녕하세요. 잘 지냈어요?’ 라고, 웃으며 인사했습니다. 직장에서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든 고민스럽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밥 사 줄 테니 시간 될 때 연락하라는 말을 전하며, 우리는 각자의 시간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자꾸만 되뇌게 되는 말.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한 일로 선생님이란 말을 듣게 되다니,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고야 말았습니다. 나 이외의 타인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닌, 가르쳐 준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명사의 묵직한 중량감에 어깨와 목은 뻐근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전한 저의 마음이 한낱 먼저 태어난 자의 쓸모없는 주절거림으로 기억되지 않도록 책과 노트를 끊임없이 펼치고, 적어둔 문장처럼 흉내라도 내보며 살아가겠다는 다짐 같은 것을 해보게 되더군요. 웃으며 돌아서는 그들의 부드러운 뒷모습을 문장에 담아두는 일은 나라는 세상을 숙성시키는 일인 것만 같습니다. 글을 쓰며 조금은 더 농밀해진 저의 세상을, 누군가에게 매일 밤 동화처럼 들려주고만 싶은 그런 날이 있잖아요. 비록 비루하고, 남루한 문장이라도 말입니다. 희미해져 가는 그들의 실루엣을 바라보던 날이 저에게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친구가 매실 따는 일을 돕겠다고 찾아오겠다 합니다. 매실주를 담그련다. 하니, 과실주를 좋아하는 그는 노동을 보탤 테니, 매실주의 지분을 챙겨달라며 흥분하더군요. 설탕을 좀 많이 넣어달라는 부탁과 함께 말입니다. 노트를 덮고 장갑을 끼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남겨두고서, 그가 올 때까지 저의 일을 합니다. 그는 가끔 친구를 잘 둬서 이런 호강을 한다고 말하곤 하지요. 그런 그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친구 간의 사랑은 자연스레 드러나는 일이지, 입증하기 위해 애쓰는 변호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저에게 마음과 시간을 허락하는 일이, 계절마다 때가 되면 피어나는 들꽃처럼, 그에게서는 어떠한 모순이나, 애씀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함께한 시간의 층계와 서로에게 보여주었던 마음의 깊이가 푹푹하게 익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가끔 시골에 방문해 자연을 알아가고, 계절의 흐름을 배우는 일이 즐거운가 봅니다. 신중하게 매실을 따는 그는, 지금 자신의 마음 안에 놓인 고즈넉한 길을 혼자 걸어보고 있을 테지요. 흘러내리는 땀방울에 서러움과 슬픔, 상실감. 이런 말들이 조금씩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아서 말없이 그저 건너다보았습니다. 갑자기 안 하던 일을 많이 하면 탈 난다며, 사이다나 마시라고 사각 얼음 몇 조각을 띄워 친구를 부릅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신발을 벗고 평상에 올라서는 그에게 선풍기를 돌려주다, 구멍 난 그의 양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습니다. 검은 양말 사이로 비죽이 솟아 나온 자그마한 달걀 같은 형체를 보고, 발을 구르며 웃다가 양말을 챙겨 나와 건네줍니다.
‘어쩌면 내가 잃어버린 것들은 가까이에 있었는데.
그래서 다시 돌아온 이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는데.
말하지 않아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다정한 감각들을 잊고만 살았는데.
나를 위한 특별한 것들은 겨우 이런 것들이었는데.
황급히 버스에 올라타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사람처럼,
나는 왜 그렇게 살았던가.’
그의 발뒤꿈치에 분필 가루처럼 뿌옇게 일어선 부스러기들이 그에게 쌓인 삶의 질곡들이 흘러내린 흔적인 듯 느껴져 잠시 시선을 먼 곳에 두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이어져 달리는 하얀 구름이 왜 그리 슬퍼 보이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런 저를 따라 친구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얹어 말을 꺼냅니다.
‘여기 좋다. 우리도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지 않냐?’
‘그럼. 우린 여전히 괜찮아.’
아직도 온전히 화해하지 못해 함구된 시간들이 저에게 남겨져 있지만, 이젠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 즐거운 걸 보니, 저 또한 매화나무만큼이나 꽤나 익었나 봅니다. 서랍에 넣어두고 닫아둔 시간들도 언젠가는 익어갈 테니, 설익은 것들을 일부러 꺼내지는 않으려 합니다. 다 익을 때까지 그저 고요히 앉아 서랍을 가끔씩 열어보며, 그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차분하게 기다리면, 언젠가는 현재가 되어 어떤 모습으로든 매실주처럼 달큰해져 있겠지요. 삶을 사랑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방식에 글을 쓰는 일보다 더 나은 방법을 여전히 저는 모릅니다. 서랍은 그렇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며, 저와 함께 온화하게 늙어갈 것입니다. 매실을 식초물에 잠시 우리고 깨끗이 씻어 꼭지를 땁니다. 조금 상한 매실도 있고, 긁힌 매실도 있고, 주름이 가득한 매실도 있습니다. 지나가는 투명한 바람에 희끗한 머리칼을 흩날리며 뜨락에 물을 뿌리는 친구를 바라봅니다. 그의 눈가에 맺힌 주름들은 이른 퇴사와 재취업을 위해 뛰어다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만난 깊은 골이었을까요. 가장으로서 감추어야만 했던 불안과 두려움을 건너다 생긴 상흔이었을까요. 때론 상하기도, 긁히기도, 부딪히기도 하며, 조금은 울었을 테지요. 그렇지만 그는 지금 그믐달을 한 눈으로 웃으며, 나무들과 함께 햇살 아래 서있습니다.
‘너는 어떻게 견뎠는가. 습기 찬 눈으로 기다렸던가. 적요한 침묵으로 견뎠던가. 축축한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던가.
불안과 쓸쓸함도 고귀한 금빛 물 다발이 되어 흘러내린다는 걸, 너는 알고 있었던가.
그래서 지금 그렇게도 눈부신 웃음을, 가진 것인가.
너는.’
친구의 부탁대로 다디단 설탕을 조금 더 붓고서, 맑은 소주를 채웠습니다. 연녹빛 매실들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술은 숙성되어 가겠지요. 일 년 후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날,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며, 시간을 함께했던 오늘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하얀 뚜껑을 열어보겠지요. 매화 꽃잎을 몇 장 떨어뜨린 술을 조금씩 삼키면, 달콤한 이야기들로 속 뜰은 채워질 것입니다. 잘 익은 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겠지요.
‘몇 년 전에, 네가 회사 근처로 찾아왔던 날. 그날 멀리서 찾아온 너를, 밥만 먹여서 보낸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 그때 참 미안했었는데. 그때는 내 마음이 그랬어. 좋은 사람들로부터도 숨고만 싶었으니...’
‘미안은 무슨. 내가 힘들 때 여기 올 수 있어서 나는 참 좋은데. 내가 고맙지. 나는 요즘도 그래. 자주 숨고만 싶어진다. 어떤 날은 들켜 버릴까, 가족들로부터도 사라지고 싶기도 해.’
자책으로 그늘을 만들고, 폄하로 얼룩을 그리던 제가 잃어버릴 뻔한 그를 다시 찾았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준 친구가 참 고맙습니다. 지나간 시간은 우리가 익어가던 시간이었음을 이젠 잘 알고 있습니다. 새벽과 아침이 만나는 기적과도 같은 인연으로 만나, 제 삶에 일으켰던 수많은 불꽃들은 저를 존재케 하는 일부가 되어 가슴 안에 맺혀있습니다. 불확실하고, 겪어보지 못한 것들은 여전히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두려움과 설렘이 되어 다가오곤 합니다. 하지만 서랍을 열어 세월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두렵지 않은 적이 언제는 있었던가를 생각합니다. 단 한 번도 없었지요. 빛 하나를 잃으면, 또 다른 빛을 밝혀가며,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지요. 사람의 다정한 온기가 존재함을 알려준 수많은 이들이 빛을 밝혀 주었기에 저는 지금도 글을 쓰며 익어갈 수 있습니다. 술이 익고 매화꽃이 다시 필 무렵이면, 삶이 여물어 가는 향기도 사무치겠군요. 친구와 매실주를 담갔던 기억은 분명 호주머니에서 얼굴을 내밀고, 다시 저를 웃게 할 테니까요. 그리고 저는 뼛속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시간이 다 되어 삶이 소멸해 갈 무렵 문득문득 떠오르는 기억과 마음들은, 기어이 이런 일들뿐이라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작가로 죽을 수 있길 바랍니다.
‘작가가 되는 것은 단순하지만, 중요한 믿음에서 시작된다. 나는 작가다.’
「제프 고인스」
덧.매실 약 1킬로그램 정도, 담금소주 3.6리터, 설탕
400그램 정도, 5리터 유리병.
출판사 유튜브에 저의 짧은 책소개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사투리로 말한 적이 없는데 들려오는 경상도 사투리, 시옷 발음이 되지 않는 저의 구강구조, 그리고 시선이 마구 굴러다니는 어리숙함에 주변인들은 박장대소를 합니다... 저는 아무래도 글을 사랑할 수밖에 없나 봅니다.
얼마 전 들었던 회사 교육의 주제가 인공지능의 현재와 5년 이내의 모습이었습니다. 청중들 모두 감탄하며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기대감에 부푼 듯했으나, 제가 느낀 감정은 절망 섞인 슬픔이었습니다. 인간이 설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하지만 저는 종이책의 바스락거리는 감촉과 그 안에 담겨있는 작가들의 고뇌는 끝내 남으리라 믿습니다. 세상과 종이책은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리라 희망을 적어봅니다.
책과 글을 사랑하는 작가님들과 독자님들 이시기에 서울국제도서전을 잠시 말씀드려 봅니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의주제는 '후이늠'이라 합니다. 후이늠은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만난 이상적인 종족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전혀 지니지 않습니다. 이번 도서전에서는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비참함을 없앨 방법을 고민해 본다 합니다.
6. 26.(수)에서 6.30.(일)까지 서울 코엑스 C&D1 홀에서 개최된다 합니다. 그리고 조금 두렵지만 저의 북토크도 자그마하게 있을 예정입니다. 여름이 바짝 다가왔습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건강 잘 챙기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