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앗빛으로 물들어 가는 구름을 보며 산책을 하다가, 저녁 마실을 나온 건너편 할아버지네 강아지인 가을이를 우연히 만났습니다. 우연하고도 가만하게, 그렇지만 약속한 듯, 이루어지는 이런 만남들에 심장은 털썩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날개가 비죽이 솟아나기도 하지요. 가을이의 하얀 털을 손을 뻗어 쓰다듬습니다. 가을이 덕분에 오늘은 까만 밤의 무지개 빛이 밤새 반짝일 듯합니다. 노란 별빛이 뛰어든 가을이의 짙은 눈망울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하던 시절의 눈빛이 떠오르곤 합니다. 천진난만한 깊은 심연이 있다면, 아마도 한 시절,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던 곧 터질 듯한 꽃망울 같은 눈빛이 유일하겠지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고 싶지 않은.
청개구리의 노랫소리가 이렇게나 황홀하니, 한 시절 사랑했던 이들의 눈빛이 사무치게 밀려옵니다.
오늘은 마늘을 캐내고, 그곳에 연둣빛 고구마 순을 다시 심습니다. 지난해 고구마 순의 살고자 하는 의지 앞에서 너무나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를 못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지라, 이번엔 손을 쭉 펴고서 간격을 적당히 재어가며 심습니다. 동그란 엉덩이 의자를 매달고는 이리저리 움직이니, 가을이도 신명이 나는지 배를 뒤집고 애교를 부립니다. 여름을 기웃거리다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랑하는 친구도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덩달아 고구마 순을 심어야 했지요. 우연하게 고구마 순을 심게 된 그는 말없이 한참을 몰입하며, 손가락을 움직입니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삶을 바라보게 하는 일이 여행이라면, 친구는 분명 좀 더 너그럽고 온화한 시선을 가진 채, 여행을 하는 중인 듯 보였습니다. 고구마 순을 심다가 잠시 매화나무를 바라보던 그의 옆 모습이 스치듯 지나갑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라는 노랫말처럼, 약속하지 않은 만남과 정해지지 않은 인연들은 한지에 물이 번져가듯 삶을 적셔가나 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설렘과 두려움이 수시로 자리를 바꿔 앉기 시작하지요. 어느 자리에 앉을지를 선택하게 되는 순간. 인연의 모습은 운명으로 빚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만남은 우연하고도 찰나의 기적으로 새순을 틔우지요. 투명한 물방울들이 송글송글 매달려 있는 시원한 사이다 한 컵에 친구의 환한 얼굴이 물들어 갑니다.
만날 수 있어, 참으로 좋은 나날입니다.
친구와 가을이는 뛰어다니며, 깔깔거리고, 바람은 생명의 향기를 전해오고, 풍경 소리는 실로폰이 되어 음표를 만드는군요. 가을이의 털이 온몸에 들러붙어 친구는 울상을 하고선 엉거주춤 일어납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만남 이후에 이어지는 서글프게 사라질까, 두려운 시간들이 달려오지만, 잊지 않기 위해 저는 한 획, 또 한 획을 그으며 기록합니다. 우연하게 엮어진 시․공간의 씨실과 날실이 자수를 놓은 듯, 하나의 완전한 추억을 만들어 주는군요. 분명 다시 꺼내어 보다가 싱긋 웃으며 서재에 가지런히 꽂아둘 풍경입니다. 인연의 모습이 어떻게 흘러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제가 웃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저는 기록하고 간직하겠습니다. 시간의 힘 앞에 우정의 모습도 변해 가겠지만, 기억의 힘 앞에 박여있는 우정의 모습은 마음 한곳에 반듯하게 자리할 것입니다. 만남의 기억들은 펜 끝에서 검푸른 정맥처럼 번져가고 제가 한 시절을 살아갔음을 명징하게 증명해 주며 저를 언젠가는 변호해 주겠지요.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미소하지만 아름다운 기억이 흐릿한 덩어리가 되어 사라지게 될까, 요즘은 그게 참으로 두렵습니다.
어쩌면 만남이라는 건, 흩날리던 씨앗이 흙으로 날아드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씨앗은 바람에 실려 이리저리 떠돌다가 비록 착각이었다 할지라도, 온도와 습도, 양분과 촉감이 좋을 것만 같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게 되겠지요. 하지만 결국 죽어버리고 다시 씨앗이 되어 날아가 버립니다. 씨앗은 어쩌면 사랑의 근원이 아닌 이별의 근원이었는지도 모르겠다며, 흙은 적막 속에서 혼자 읊조립니다. 만남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죽음이라는 이별은 지구상의 피조물에게는 피할 수 없는 자명한 법칙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흙에서 피어나 꽃과 열매를 맺으며 우주가 뜨겁게 팽창하던 한 시절의 추억은 영원히 마음과 문장으로 남아 흙 속에 스며들겠지요. 장난스레 다가온 씨앗을 흙은 부드럽고도 너그럽게 언제나 그랬듯, 잘 품어내고, 또 잘 보내 줄 것입니다.
언젠가 떨어져 내릴 쑥갓의 꽃은 격렬하게도 아름답습니다. 자신이 흙에게 서글픈 작별을 통보하게 될 거라는 걸, 쑥갓은 알고 있을까요. 이별의 주체들은 왜 이리도 사랑스러운 모습일까요. 골수는 흔들리고, 심장은 미어집니다. 가을이에게 간식을 주고 친구와 저도 점심을 먹어야겠어요. 턱을 괴고, 쑥갓의 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집안 곳곳에 진하게 배어버려 창문을 활짝 열어야만 하는 구수한 된장의 향수가 그리워집니다. 강된장에 밥 한술 얹어 친구를 든든히 먹여서 보내야겠어요. 헤어진 후에도 배어있을 그의 흔적과 된장의 향기로 혼자만의 시간이 쓸쓸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가장 두려운 건, 이별이 아닌 망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책이나 읽다가, 밥이나 먹고 가. 고생 많았어.’
친구는 갈색 바구니를 들고서는 케일과 머위, 대파를 향해 폴짝폴짝 뛰어가더니 머위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며, 멋쩍게 웃어 보입니다. 너처럼 웃고 있는 게 머위라 알려주었지요. 친구가 뜨락에서 장을 보는 동안, 표고버섯과 두부, 그리고 애호박과 양파를 맑은 물에 씻어 잘게 자릅니다. 들기름을 두른 냄비에 채소들을 넣고 달달 볶아댑니다. 강된장은 물이 많으면 안 되기에 볶고, 또 볶아서 채소들이 품고 있는 물기들을 빼내어 줍니다. 어쩌면 저 또한 저의 기억을 볶아대는 건, 슬픔으로 짜내어진 물기를 건조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어요. 그 무엇도 되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닌 제가 스스로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건, 복원되어지는 추억이 존재하기 때문이겠지요. 그것조차 서글프게 사라져만 간다면, 삶에는 검푸르게 번져가는 공허와 무의미만이 곰팡이처럼 우후죽순으로 번질 것만 같아 두렵기만 합니다.
우리는 만남이라는 우연한 찰나에 성스러움을 입히곤 하지만, 진정 신화적 요소는 만남이 아닌 이별 후에 존재하는 추억 속에서 그리움을 통해 탄생하는 게 아닐까요. 모든 경전들이 그러하듯, 이별 후에 아무것도 남겨진 게 없는 공간, 모든 게 무너져버린 것만 같은 공간에서 고결한 성전은 마침내 지어집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별이 아닌 만남이 신비였고, 운명이었다며, 아니에요. 라고, 단호하게 얘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에 오래전 사랑했던 사람을 우연히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못 본 척 도망치지 말고, 인사라도 해둘 걸 그랬어요. 분명 사랑하고 행복했던 한 시절을 함께 만들었는데, 그 순간 저는 왜 그랬을까요. 지우고 싶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하지 못한 걸 이내 두고두고 후회했으니 말입니다. 마음과는 다른 행동과 말들에 저는 얼마나 후회하며 살아야 할까요. 언제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어느 시인의 말씀처럼 좀 더 자세히 오래 봐둘 걸 하고 한숨만 쉬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허락해 준 투명한 유리컵을 저는 결국 거무스름한 후회로 채워버리고 마는 여전히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사람인가 봅니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제 안에서 잠겨져 있는 낡은 상자를 끝내 열어내지 못했겠지요. 상자 안에는 저의 꿈과 열정과 희망이 들어있었습니다. 이별 후에 존재하는 추억은 저도 모르고 살아왔던, 저의 비밀을 알게 해준 성스러움으로 저의 심장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성스러운 이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자책은 한동안 저를 괴롭혔지요. 그와의 추억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스쳐 지나간 그저 그런 인연들처럼, 덩어리져 사라져 버리는 물안개처럼. 관계에 있어 특별하고도 소중한 의미는 결국 만남이 아닌 이별 후에야 작동하는 회상의 심리적 반응에서 순산되는 듯합니다. 아무렇게나 덮어버린 사랑의 흔적들, 부정적인 것들로만 뭉쳐진 기억의 왜곡들, 아무렇게나 절단된 시간의 거친 단면들에서는 누더기 같은 아스팔트 도로처럼 풀 한 포기도, 꽃 한 송이도 자리하지 못할 테니까요.
볶아진 채소에 된장과 고추장, 고춧가루를 넣고 조금더 볶다가 멸치 육수를 조금 부어 끓입니다. 그리고 으깨어 둔 두부와 남은 채소들을 넣고, 자박자박해질 때까지 익힙니다. 볶아대고 볶아대다 보니 어느새 삶은, 구수한 향기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맛으로 저를 인도하는군요. 친구는 잘라 온 머위와 케일을 계란꽃 가득 피어난 수돗가에 앉아 흥얼거리며 씻고 있습니다. 안구에 선명하게 각인된 적요의 풍경이 갓 끓여낸 강된장을 닮은 것만 같군요. 서재를 채워가는 된장의 향기는 아스라한 향수를 깨워냅니다. 자신과 타자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며, 인연의 씨줄과 날줄이 엮어지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속에서 선명하게 존재했던 서로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는 일을 우리는 회상이라 부르지요. 그 시절의 의미를 찾아 삶을 돌아보는 일이 회상이라면, 누군가가 얘기한 것처럼, 인생은 의미 찾기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일이 자나간 시간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지나간 이별에서도 반드시 의미를 찾아야만 하지 않을까요. 그 시절을 살아가던 자신이 싹둑 잘려 나가지 않게, 그 만남이 곰팡이로 번져 변색되지 않게 말입니다.
끓는 소금물에 잠시 대처 낸 케일과 머위로 참기름을 섞은 쌀밥을 얹어 돌돌 말아 주먹밥을 만들었어요. 끓여낸 강된장을 부어 친구와 저는 마주 앉습니다. 그저 우연하고도 가만하게 만났으나, 이별의 시간은 언약이라도 한 듯, 끝내 다가오고야 말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친구와 보낸 시간은 생이 소멸하는 그날까지도 꺼내어 읽기를 반복할 테니 말입니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던 ‘앨리엇’의 말처럼, 이별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성스러운 것들 덕분에 저는 끝끝내 이별할 수가 없겠습니다.
점이 되어가다 사라진 친구의 흔적을 더듬거리며,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펼쳤어요. 순간순간 책장의 귀퉁이가 저도 모르게 젖어버립니다. 이십 대에 읽었던 느낌과 사십 대에 읽는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그만큼 세월로 인해 경험과 마음, 그리고 생각의 층계들이 조금은 더 쌓였기 때문이겠지요. 누군가가 아련하게 머물렀던 흔적들이 결국 고단한 삶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성장하게 합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운명은 반복과 대칭을 좋아하는 지도. 그리고 그건 망각에 어느 정도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우리가 매 순간 삶을 다정하게 매만지고, 사무치도록 그리워할 추억을 만들거나 최소한 기억을 간직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석양을 뒤로하고서, 모두에게 공평하고도 무심하게 걸어오는 이별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운명처럼, 되풀이되는 공허함과 욕망을 정지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