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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Jul 01. 2023

때로는 느리게, 가끔은 멈추고서_ 깻잎 토마토 스파게티


속살을 내보인 아지랑이가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을 지나 수줍게 피어나는 걸 보니 어느새 계절이 달라지고 있나봅니다. 계절의 사이에 선 저는 가끔씩 가는 길이 조금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무얼하며 살아온 건지 기억이 흐릿할 때, 앞으로의 나아가는 길도 희미해지는 듯합니다. 저는 지난 한달이 어떻게 지나간 건지, 원래 없었던 기억처럼 캄캄합니다. 누군가가 필름의 일부를 손으로 찢어버려 거친 단면만이 남아버린 것만 같아. 가만하게 턱을  앉아 모나미 볼펜을 굴리며 생각해보니 항상 일터에서의 일들로 6월의 여름과 12월의 겨울무엇하나 온전하게 떠오르는 풍경들이 없는 듯합니다. 계절의 초입에서 시간에 쫓기고, 책임에 떠밀리고, 타인들의 숱한 사연들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겨우 건져져서는 팔을 뻗어 계절의 사이를 건너곤 하였지요. 빠르고, 성마르게 움직여 보았지만, 그곳에는 결국 불규칙적이고 거친 호흡만이 소복하게 덮어버린 서글픈 시간만이 쌓여있었습니다. 숨가쁘게 살아왔지만,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는 거울 속 저를 닮은 듯도 하군요.

사라져만 가는 진공상태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비집고나와, 거슬러 오르고 올라 뜨락을 둘러봅니다. 씨앗이 조금씩 자라 꽃을 피운 그곳에는 꿀벌들과 나비들이 모여 속살거리는군요. 자그마한 나무들은 마디게 자라는 듯 보였지만, 어느새 저의 키를 훌쩍 넘어 앵두와 매실, 그리고 복숭아를 붙들고 있습니다. 평상에 누워 늙은 감나무 가지에 걸린 파아란 하늘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성시경'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얼음 띄운 까만 커피에 입술을 가져갑니다. 그의 낮고 따듯한 목소리에 이끌려, 친구에게 호박잎에 쓴 편지 한장을 붙여보아도 좋겠어요. 우체부 아저씨의 낡은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신발을 꺾어 신고서 달려나가 답신을 기웃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일과 온화하게 흐르는 자연은 느림과 침묵이라는 교집합이 있는 듯합니다. 느림과 침묵은 숨가쁜 일상의 사이에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군요. 숨을 깊게 쉬고, 짙게 뱉어냅니다.

저는 살아있습니다.


어리숙한 욕심을 부리며, 좀 이르고, 좀 더 빠르게 토마토를 맛보고자, 지난 4월 이른 토마토를 심었었지요.

한 인간의 우매한 욕심을 조롱이라도 하듯, 4월의 늦서리를 맞은 토마토들의 시간은 그렇게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얼어붙은 토마토를 어찌할 바를 몰라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라버린 토마토 잎을 이리저리 뒤척거렸지요. 인간의 욕심은 자연의 자명한 볍칙 앞에서 볼품 없이 나뒹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은 그런 제가 처연해 보였는지 너그럽고도 부드럽게, 느렸지만 단단하게 상처받은 토마토를 회복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저의 욕심으로 사라진 시간을 토마토는 침묵으로 재생시키며 조금씩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마른 마음을 느린 침묵으로 자연은 희석시키면서, 그렇게 자연은 소란스러운 삶을, 말없는 앎으로 물들이고 있었지요. 곰곰하게 돌이켜보면, 찬찬하지만, 침묵하며 단단해지던 시간들만이 온전하게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느리게 흐르고, 손에 쥐어지는 것 하나 없는 듯하였지만, 단호하게 자리한 기억들은 습자지를 받치고서 언제나 펜으로 꾹꾹 눌러 담을 수가 있더군요.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든다.'

 - '미하엘 엔데', '모모' 중. -


'미하엘 엔데'의 문장을 소리내어 읽다보니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사실 현실의 달리기에 있어서는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거북이는 살아감에 있어 토끼를 이긴 거라는 걸, 우화는 말해주고 싶은 게 아닐까요. 들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는 하얀 나비들의 흔적을 따라가고, 천천히 걷는 달팽이에게  인사를 건네며, 새들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은 분명 거북이만이  수 있는 환희와 기쁨일테니 말입니다. 사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닌 것 아요. 그렇게 느리게 흘러서 아름다운 것들이 선명하게 호주머니에 쌓여 가다보면, 살아온 삶이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멈춰진 듯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시골서재를 가꾸기 시작하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시절, 저는 거북이처럼 느렸지만, 뚜벅뚜벅  채우는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무와 모종을 심으면서, 씨앗들을 흩뿌리며, 꼭 다물고 있던 침묵은 와 타인의 엽서들을 가만히 전해주었고, 그것들은 안에서 울림이 되어, 문장으로 건져지곤 하였지요. 비록 볼 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었지만, 나무들과 식물들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창조와 생명의 소리에 이끌리듯 따라가, 우주가 허락해준 기적같은 인연들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다시 찾아온 여름의 향기가 삶을 물들여가고 있습니다. 여름의 밤이 이상하리만큼 더이상 숨막히지가 않는군요.

오늘은 한참을 이렇게 멈추어 있으려 합니다.


'비록  간단한 산책이라 하더라도 걷기는

 오늘날 우리네 사회의 성급하고 초조한 생활을

 헝클어 놓는 온갖 근심 걱정들을 잠시 멈추게 해준다.

 두 발로 걷다보면 자신에 대한 감각, 사물의 떨림들이

 되살아나고 쳇바퀴 도는 듯한 사회생활에

 가리고 치워져 있던 가치의 척도가 회복된다.'

 - '다비드 르 브루통'. '걷기예찬' 중. -


산책이란 단어를 노트에 적어두고 생각에 잠깁니다. 산책은 흩트러뜨릴 ''계략 ''으로 이루어진 단어라는걸 말입니다. 맞아요.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생각들을 흩어버리기 위해 천천히 걷는 일이 산책인 것이지요. 도시에서의 일상은 수많은 계획들과 이성,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분주하고도 바쁜 움직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어느것 하나 제 것인 것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뭇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는 것이 없었지요. 도시의 일상은 무너질 바벨탑을 짓는 듯한 공허를 생산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흙을 딛고서 존립하고 보행하는 이 순간이 저에겐 너무나 소중합니다. 홀로 호수의 둘레를 걷다보면, 혼자이기에, 침묵하기에, 느리기도 또는 멈추기도 하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들은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잔잔한 호수의 물장구 소리에 발맞추고, 피어나는 물 비린내를 맡아봅니다. 어둠이 하늘을 덮었지만, 왜가리삶의 지향점을 알고 있는 듯, 박차고 날아오릅니다. 가끔 물 속을 들어갔다 나오는 청둥오리 가족들에게서 행복을 보게됩다. 환하고 밝은 달빛이 걸린 회색빛적요한 풍경이 세상을 정지시키, 그 모든 것들을 품어내는 듯합니다. 제가 멈추어 있기에 담을 수 있는 보석같은  하나밖에 없는 명작탄생하고, 그렇게 산책은 와 세계와의 연결을 단단하게 이어줍니다.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합니다. 나를 살게하고,

 살아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관찰을 하지 못하고 연구도 할 수 없게 됩니다.'

 - '발저'의 '산책자' 중. -


서로의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오롯이 꽃이 될 수 있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참으로 진리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느리거나, 멈추었을 때 가능한 일이겠지요. 꿀벌이 더듬거리는 마알간 해바라기의 얼굴에 그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서, 멈춰버린 듯한 침묵의 시간들에게 많은 이름들을 들려주곤 하지요. 풀벌레와 매미의 울음 소리, 개구리들의 노래 소리, 소낙비가 흙을 패이는 소리, 바람에 사각되는 풀잎소리, 토마토가 붉게 익어가는 소리,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소리. 오감을 두드리던 수많은 소리와 이름들. 여름의 소리들이 무수히 흘렀지만, 여름은 굳이 문장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계절인 것만 같습니다. 아니, 문장들은 여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력해집다. 느리게 걷고, 자주 멈추니 저의 망막에는 완벽한 여름들문장을 대신해 쓰여집니다.


저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친구는 시골이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오고 싶어하는군요. 인사업무로 바빠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혹 방문하는 친구의 발걸음 소리가 저 멀리서 느리게 들려오기에 여름을 품은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준비해 보아야겠어요. 토마토와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말입니다.


'바쁠텐데 젊은 사람이 왜 자꾸 온데? 뭐 볼거있다고.'

'고요하고 쫓기지 않아도 되고, 여기가 그냥 좋아.'


숨막혔을 세월들, 힘들었을 시간들, 혼자라 느껴졌을 순간들이 그에게도 있었겠지요. 쉬지않고 살았으나,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친구의 입술을 멈춘듯 바라보다, 이제 조금은 느리게 살아도 괜찮고, 가끔은 멈추어도 좋은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친구는 토마토와 깻잎을 따러 보헤미안처럼 사뿐사뿐 걸어가는군요. 친구가 주섬주섬 담아온 빠알갛게 잘익은 토마토들을 맑은 물에 푹 담구어 잠시 우려내고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습니다. 저의 욕심으로 느리게 자랐지만, 껍질을 벗긴 토마토는 기특하게도 속이 가득차 있군요. 문장들과 자연들을 닮을 수는 없겠지만, 함께 살아내다보면, 저도 이렇게 속이 조금은 채워질 수 있겠지요. 영원히 반복될 것만 같던 시간들에 느린 풍경의 조각들이 맞춰지니, 길을 잃어버린 듯하였으나 어느새 그곳이 길이되고 습니다. 늦게도 잉태되어 느리게도 순산되었기에 더욱 이 길에 확신과 믿음이 생겨납니다.

상투적이고, 겉도는 말들보다는 어느새 침묵이 편안하게 다가오는군요. 가만하게 책을 고르고 있는 친구와 사각사각 토마토와 깻잎을 자르고 있는 저 사이에 태어난 침묵은 평온이라 읽어야겠지요.


'책 좀 추천해줘.'

'마사시의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괜찮을거야.

 재미도 고, 문장도 예뻐.

 넌 글을 쓰니 아마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어.'

'우아하게 사는 건 어떤거야?'

'글쎄. 느리게 사는게 아닐까.'


조금 더 깊은 맛을 내보려고, 멸치 육수에 면을 넣고 올리브 오일과 소금을 넣어 끓였습니다. 방울방울 천천히 떠다니는 올리브 오일이 참으로 고상해 보이는군요. 느리고 단정하 흐르는 시간들이 어쩌면 우아한 삶의 질료가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아직은 우아하고 싶습니다.


올리브 오일을 두루고, 게 으깨어 둔 마늘과 양파를 넣어 달달 볶다가 다진 돼지고기와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어 조금 더 볶아주었어요. 잘라둔 토마토와 후추, 치킨스톡을 넣어 스파게티 소스를 완성합니다. 친구가 따온 깻잎을 보다가 건너편 할아버지네 강아지인 '가을이'떠오르는군요. 이른 봄 깻잎 씨앗이 담긴 봉투를 들고서 씨앗을 흙으로 돌려보내고 있었지요. 저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가을이는 씨앗봉투를 물고서는 즐거운 듯 뛰어다녔어요. 돌려달라고 가을이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씨앗봉투를 주웠지만, 어느새 깻잎 씨앗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더군요. 떨어지고 흩어진 깻잎 씨앗들이 결국 싹을 틔워 난데없는 곳에서 깻잎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원하던 곳에 깻잎을 키울수는 없게 되었지만, 뭐 어떤가요. 깻잎을 보면 사랑스러운 봄날의 풍경이 떠올라 항상 웃게 되는 선물이 배송되었으니 말입니다. 친구에게도 이야기를 들려줬던 한참을 웃더군요. 계획적이지도, 인위적이지도 못했지만, 자연스럽고도 인간적인 기억이 되었습니다.

스파게티에 깻잎의 향을 입히려, 자른 깻잎을 준비된 면과 함께 소스에 넣고 조금 더 졸여주었어요. 친구는 책이 재미있는지 푹빠져서 읽고 있습니다. 독서 중인 사람의 모습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파게티이니 도라지꽃을 띄워 조금은 더 정성스레 플레이팅해서 친구와 마주 앉았어요. 토마토처럼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삶은 조금씩 채워지는군요.

친구의 흔적이 자리한 서재는 고요하고, 책상은 단정합니다. 오늘도 좋은 것들을 사금을 채취하듯 모은 것만 같아요. 단단하고도, 투명한 고독의 사이에서 느리게 걸었던 일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새삼 의 일상이 애틋하고도, 우아하게 느껴지는군요. 온전하게 남아있는 시간들은 종이책과 닮은 듯합니다. 단어와 문장, 그리고 사락거리며 넘어가는 빛바랜 페이지들. 천천히 음미하며, 밑줄을 그어둔 수많은 문장들 사이에서 삶은 건져올려지나 봅니다. 한가하지만, 참으로 푸짐한 여름의 밤입니다. '하데스'에게 처절하게 걸어가는 '오르페우스'처럼 내일도 복잡한 도시를 달려야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하염없이 친구와 느리게 걷고만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삶은 한편의 시가 되겠지요.


덧. 주재료: 스파게티 면, 토마토, 깻잎, 다진 돼지고기.

                    새송이버섯.

      부재료: 마늘, 양파, 고추, 토마토 페이스트,

                   올리브 오일, 소금, 후추, 치킨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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