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든다.’
「미하엘 엔데」‘모모’ 중.
속살을 내보인 아지랑이가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을 지나 수줍게 피어나는 걸 보니 어느새 계절이 항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나 봅니다. 저는 계절의 사이에 설 때면, 가끔씩 가는 길이 조금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무얼하며 살아온 건지 기억이 흐릿할 때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도 동시에 희미해지는 듯합니다. 습기 가득한 거울 속 희끄무레한 저를 바라봅니다. 저는 지난 한 달이 어떻게 지나간 건지, 원래 없었던 기억처럼 기억이 캄캄합니다. 누군가가 필름의 일부를 손으로 찢어버려 거친 단면만이 남아버린 것만 같아요. 가만하게 턱을 괴고 앉아 모나미 볼펜을 검지와 중지에 끼워 돌리며 생각에 잠깁니다. 항상 일터에서의 일들로 유월의 여름과 십이월의 겨울은 무엇하나, 온전하게 떠오르는 풍경들이 없었습니다. 계절의 초입에서 시간에 쫓기고, 책임에 떠밀리고, 타인들의 숱한 사연들에 빠져 허우적이다가 겨우 건져져서는 팔을 뻗어 계절의 사이를 가까스로 건너곤 했었지요. 빠르고, 성마르게 움직여 보았지만, 그곳에는 결국 불규칙적이고 거친 호흡만이 소복하게 덮어버린 서글픈 시간만이 쌓여있었습니다. 숨 가쁘게 살아왔지만, 무엇 하나 이룬 것도 없고, 되지도 못한 거울 속 저를 닮은 듯도 하군요.
‘프로메테우스의 형벌’처럼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나마 비집고 나와, 거슬러 오르고 올라 뜨락을 둘러봅니다. 씨앗이 조금씩 자라 꽃을 피운 그곳에는 꿀벌들과 나비들이 모여 속살거리는군요. 자그마한 나무들은 더디게 자라는 듯 보였지만, 어느새 저의 키를 훌쩍 넘어 앵두와 매실, 그리고 복숭아를 붙들고 있습니다. 평상에 누워 늙은 감나무 가지에 걸린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김동률’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얼음 띄운 까만 커피에 입술을 가져갑니다. ‘언덕을 넘어 숲길을 헤치고 가벼운 발걸음 닿는 대로, 끝없이 이어진 길을 천천히 걸어가네...’ 그의 낮고 따듯한 목소리에 이끌려, 친구에게 호박잎에 쓴 편지 한 장을 붙여보고만 싶습니다. 우체부 아저씨의 낡은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신발을 꺾어 신고서 달려 나가 답신을 기웃거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일과 온화하게 흐르는 자연은 느림과 침묵이라는 교집합이 있는 듯합니다. 고요하게 오래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고 싶습니다. 느림과 침묵은 반복되는 듯한 일상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압도적인 힘이 있습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짙게 뱉어냅니다.
저는 살아있습니다.
어리숙한 욕심을 부리며, 좀 더 이르고, 좀 더 빠르게 토마토를 맛보고자, 지난 사월에 이른 토마토를 심었었지요. 자연은 한 인간의 우매한 욕심을 조롱이라도 하듯, 사월의 늦서리를 보내 주더군요. 늦서리를 맞은 토마토들의 시간은 그렇게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얼어붙은 토마토를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옆에 쪼그리고 앉아 말라버린 토마토 잎을 이리저리 뒤척거렸지요. 인간의 욕심은 자연이 선언하는 경전 앞에서 볼품없이 나뒹굴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은 그런 제가 처연해 보였는지 너그럽고도 부드럽게, 느리지만 단단하게 상처받은 토마토를 회복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저의 욕심으로 사라진 시간을 토마토는 침묵으로 재생시키며 조금씩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성마른 마음을 느린 침묵으로 자연은 희석시키면서, 그렇게 자연은 소란스러운 삶을, 말 없는 앎으로 인도하고 있었지요. 곰곰이 돌이켜보면, 느리지만, 침묵하며 단단해지던 시간만이 온전하게 제 안에서 존재하는 것만 같습니다. 천천히 흐르고, 손에 쥐어지는 것 하나 없는 듯했지만, 이에 비례해서 깊숙하게 자리한 기억들은 습자지를 받치고서 언제나 펜으로 꾹꾹 눌러 담을 수가 있더군요. 영원히 문장으로 남게 되는 것들은 아마도 대부분 그런 것이겠지요. 느리지만 온 마음으로 느꼈던 감각들과 떠올렸던 생각들.
‘미하엘 엔데’의 문장을 소리내어 읽다 보니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사실 현실의 달리기에 있어서는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거북이는 삶이라는 지난한 경주에 있어 토끼에게 승리한 거라는 걸, 우화는 말해 주고 싶은 게 아닐까요. 들길을 걸으며, 사랑을 나누는 하얀 나비들의 흔적을 따라가고, 천천히 걷는 달팽이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새들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은 분명 거북이만이 알 수 있는 환희와 삶의 충만함일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느리게 흘러서 아름다운 것들이 심장의 밑바닥부터 선명하게 쌓여가다 보면, 살아온 삶이 풍성해지지 않을까요.
멈춰진 듯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시골 서재를 가꾸기 시작하던 그날이 떠오릅니다. 그 시절, 저는 거북이처럼 느렸지만, 뚜벅뚜벅 삶을 채우는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무와 모종을 심으면서, 씨앗들을 흩뿌리며, 침묵과 대화했습니다. 멈춰진 듯한 시간은 저와 타인의 사연이 가득 담긴 엽서들로 채워지고, 그것들은 제 안에서 울림이 되어, 문장으로 건져지곤 했지요. 비록 볼 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었지만, 나무들과 식물들의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창조와 생명의 소리에 이끌리듯 따라가, 우주가 허락해 준 기적 같은 인연들에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덧 다시 찾아온 여름의 향기가 삶을 물들여가고 있습니다. 여름의 밤이 이상하리만큼 더 이상 숨 막히지 않는군요.
오늘은 한참을 이렇게 멈추어 있으려 합니다.
‘비록 간단한 산책이라 하더라도 걷기는 오늘날 우리네 사회의 성급하고 초조한 생활을 헝클어 놓는 온갖 근심 걱정들을 잠시 멈추게 해준다. 두 발로 걷다 보면 자신에 대한 감각, 사물의 떨림들이 되살아나고 쳇바퀴 도는 듯한 사회생활에 가리고 치워져 있던 가치의 척도가 회복된다.’
「다비드 르 브루통」‘걷기예찬’ 중.
산책이란 단어를 노트에 적어두고 생각에 잠깁니다. 산책은 흐트러뜨릴 ‘산(散)’과 계략 ‘책(策)’으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생각들을 흩어버리기 위해 천천히 걷는 일이 산책인 것이지요. 도시에서의 일상은 이성과 수많은 계획들, 그리고 이를 실행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근거를 찾는 일로 분주하고도 바쁘게 지나갑니다. 하지만 정작 어느 것 하나 제 것인 것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가뭇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는 것도 없었지요. 도시의 일상은 무너질 바벨탑을 짓는 듯한 공허를 생산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자연 안에서 침묵으로 대화하는 멈춰진 듯한 이 시간이 저에겐 너무나 소중합니다. 홀로 호수의 언저리를 따라 걷다 보면, 혼자이기에, 침묵하기에, 느리기도 또는 멈추기도 하기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그때 보이는 것들은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잔잔한 호수의 물장구 소리에 발맞추고, 피어나는 물비린내를 맡아봅니다. 어둠이 하늘을 덮었지만, 왜가리는 삶의 지향점을 알고 있는 듯, 박차고 날아오릅니다. 가끔 물속을 들어갔다 나오는 청둥오리 가족들에게서 행복을 보게 됩니다. 은갈치 떼처럼 반짝거리는 호수의 윤슬들은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몽환적 풍경을 선사합니다. 환하고 밝은 달빛이 걸린 적요한 풍경에 세상이 정지되고 저도 따라 멈춥니다. 제가 멈추어 있기에 담을 수 있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보석 같은 명작이 탄생하고, 그렇게 산책은 저와 세계와의 연결을 단단하게 이어줍니다.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합니다. 나를 살게 하고,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내 일도 무너져버릴 겁니다. 산책을 못하면 관찰을 하지 못하고 연구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발저」‘산책자’ 중.
생명의 기척이 가득한 여름은 같은 꽃도 없고, 같은 구름도 없으며, 같은 빗방울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모를 뿐이지요. 서로의 눈을 맞추며,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게 오롯이 꽃이 될 수 있다던 어느 시인의 말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건 느리거나, 멈추었을 때 알아볼 수 있는 일이겠지요. 꿀벌이 더듬거리는 갓 태어난 해바라기의 얼굴에 그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여름이라는 계절에 서있습니다. 멈춰버린 듯한 시간은 저에게 오히려 많은 소리들을 들려주곤 하지요. 풀벌레와 매미의 울음소리, 개구리들의 노랫소리, 소낙비가 흙을 패는 소리, 바람에 사각거리는 풀잎 소리, 토마토가 붉게 익어가는 소리, 사랑하는 이들의 웃음소리. 오감을 두드리던 수많은 소리와 이름들. 여름의 소리들이 무수히 지나가지만, 여름은 굳이 문장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계절인 것만 같습니다. 아니, 문장들은 여름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력해집니다. 느리게 걷고, 자주 멈추니 저의 망막에는 완벽한 여름들이 문장을 대신해 쓰여집니다.
저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친구는 시골이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만 오고 싶어 하는군요. 일터의 일들로 바빠 한동안 보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간혹 방문하는 친구의 발걸음 소리가 저 멀리서 느리게 들려오기에 여름을 품은 토마토로 스파게티를 준비해 보아야겠어요. 토마토와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시간을 느리게 보낼 생각입니다.
‘바쁠 텐데 젊은 사람이 왜 자꾸 온 데? 뭐 볼 거 있다고.’
‘고요하고 쫓기지 않아도 되고, 여기가 그냥 좋아.’
숨 막혔을 세월들, 힘들었을 시간들, 혼자라 느껴졌을 순간들이 그에게도 있었겠지요. 쉬지 않고 살았으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친구의 입술을 멈춘 듯 바라봅니다. 이제 조금은 느리게 살아도 괜찮고, 가끔은 정지해도 좋은 거야. 친구는 토마토와 깻잎을 따러 보헤미안처럼 사뿐사뿐 걸어가는군요. 친구가 주섬주섬 담아온 빠알갛게 잘 익은 토마토들을 맑은 물에 푹 담가 잠시 우려내고는,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었습니다. 저의 욕심으로 느리게 자랐지만, 껍질을 벗긴 토마토는 기특하게도 속이 가득 차 있더군요. 문장들과 자연들을 온전히 닮을 수는 없겠지만, 곁에 두고 살다 보면, 저도 이렇게 속이 조금은 채워질 수 있으리라 기대같은 것도 해봅니다.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반복될 것만 같던 시간이었지만, 느린 풍경의 조각들이 덧대어지니, 길을 잃어버린 듯했으나 어느새 그곳이 길이 되었습니다. 늦게도 잉태되어 느리게도 순산되었기에 이 길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더욱 가득합니다. 상투적이고, 겉도는 말들보다는 어느새 침묵이 편안하게 다가옵니다. 가만하게 책을 고르고 있는 친구와 사각사각 토마토와 깻잎을 자르고 있는 저 사이에 태어난 고요는 누구나 그리워할 평온이라 읽습니다.
‘책 좀 추천해 줘.’
‘마사시의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괜찮을 거야. 재미도 있고, 문장도 예뻐. 넌 글을 쓰니 아마도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어.’
‘... 우아하게 사는 건 어떤 걸까?’
‘글쎄... 느리게 사는 게 아닐까.’
조금 더 깊은맛을 내보려고, 멸치 육수에 면을 넣고 올리브 오일과 소금을 넣어 끓입니다. 방울방울 천천히 떠다니며 섞이지 않는 올리브 오일이 참으로 고상해 보이는군요. 쫓기듯 앞만 보고 달리는 시간 안에서 섞이지 않는 느리고 단정하게 흐르는 장면들이 어쩌면 우아한 삶의 질료가 되는지도 모르겠어요. 이제는 저도 우아하고 싶습니다.
올리브 오일을 두르고, 굵게 으깨어 둔 마늘과 양파를 넣어 달달 볶다가 다진 돼지고기와 토마토 페이스트를 넣어 조금 더 볶아주었어요. 잘라둔 토마토와 후추, 치킨스톡을 넣어 스파게티 소스를 완성합니다. 친구가 따온 깻잎을 보다가 건너편 할아버지네 강아지인 가을이가 떠오르는군요.
이른 봄 깻잎 씨앗이 담긴 봉투를 들고서 씨앗을 밭에다가 줄 세워 뿌리고 있었지요. 저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가을이는 한 순간 씨앗 봉투를 낚아채서는 즐거운 듯 뛰어다녔습니다. 돌려달라고 가을이를 쫓아다니다가 결국 씨앗 봉투를 주웠지만, 어느새 깻잎 씨앗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더군요. 떨어지고 흩어진 깻잎 씨앗들이 결국 싹을 틔워 난데없는 곳에서 깻잎들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원하던 곳에 깻잎을 키울 수는 없게 되었지만, 뭐 어떤가요. 깻잎을 보면 사랑스러운 봄날의 풍경이 떠올라 항상 웃게 되는 선물이 배송되었으니 말입니다. 친구에게도 가을이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한참을 웃더군요. 계획적이지도, 인위적이지도 않은 파종이었지만, 자연스럽고도 인간적인 추억이 되었습니다.
스파게티에 깻잎의 향을 입히려, 자른 깻잎을 준비된 면과 함께 소스에 넣고 조금 더 졸여주었어요. 친구는 책이 재미있는지 푹 빠져서 읽고 있습니다. 독서 중인 사람의 모습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파게티이니 도라지꽃을 띄워 조금은 더 정성스레 플레이팅해서 친구와 마주 앉습니다. 토마토처럼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삶은 충만하게 채워집니다.
친구의 흔적이 가득한 서재는 고요하고, 책상은 단정합니다. 오늘도 좋은 것들을 사금을 채취하듯, 꿀벌이 꿀을 모으듯, 잔뜩 모은 것만 같습니다. 단단하고도, 투명한 고독의 사이에서 느리게 걸었던 일상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새삼 저의 일상이 애틋하고도, 우아하게 느껴지는군요. 온전하게 남아있는 시간들은 종이책과 닮은 듯합니다. 단어와 문장, 그리고 사락거리며 넘어가는 빛바랜 페이지들. 천천히 음미하며, 밑줄을 그어둔 수많은 문장들 사이에서 온전한 삶과 기억이 만져지는 것만 같습니다. 한가하지만, 참으로 푸짐한 여름의 밤입니다. ‘하데스’에게 처절하게 걸어가는 ‘오르페우스’처럼, 내일도 복잡한 도시를 끊임없이 달려야 하겠지만, 지금은 그저 하염없이 친구의 흔적과 함께 느리게 걷고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