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이 찢겨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목울음이 있다. 그 목울음을 그칠 수 있는 자는 나 자신 뿐이다.’
「강현욱의 노트 중.」
눅진한 장마는 언제쯤 마침표를 찍을까요. 음울한 눈빛에서 질리도록 흐르는 눈물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사실 저는 누군가의 찢긴 심장에 대어 참담하기도, 슬프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이 저에게 찾아와 표현할 길이 없다는 듯, 억수같이 울었지요. 창밖의 비도 다시 거세게 내리며, 창문을 흔들어대더군요. 정제된 부탁이 아닌 처절한 요구가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굵은 빗줄기와 함께 흙탕물이 된 저를 하염없이 땅으로 침잠시킵니다. 끈적한 장마가 참으로 질기기만 하군요. 지친 듯한 이 슬픔이 그녀와 저를 어디로 데려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장마와 그만 작별하고 싶은데, 그녀는 아직도 그럴 수가 없나 봅니다. 찢긴 그녀의 심장은, 뽑힌 하얀 휴지 조각만큼이나 가냘프게 흔들립니다.
덥군요. 참으로 덥습니다.
물기 가득한 더위는 견디기가 참으로 어렵지만, 그녀의 깨어지고 흩어지는 말들을 주워 담아 봉합하기가 더 힘이 들더군요. 그녀의 흐느낌에 이끌려 창에 꼭 붙들린 빗방울을 스치듯 바라봅니다. 거친 장대비의 흔적은 닦아내지 않는 한, 먼지와 혼합되어 볼품없는 흐릿한 자국을 남기겠지요. 불투명한 빗방울의 흔적에 시선이 닿을 때면, 한 여인이 떠오를 것만 같습니다. 지워내지 못한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처절하게 몸서리치던 한 여자를 말입니다. 철저하게 믿었고, 치욕스럽게 배신당한 그녀의 아픔은 상흔으로 남아 트라우마라는 권총 한 자루를 손에 쥐게 된 듯합니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 믿었는데 그의 목소리와 눈빛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여전히 까무러칠 것만 같다는 그녀의 힘겨운 말들은 참혹하기만 하군요. 증오, 그리고 그것보다 작지 않은 고통이 그녀에게서 절실히 느껴집니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도록 만들었던, 그와 그녀의 관계를 몰랐던 저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장전해 아마도 방아쇠를 당긴 듯합니다. 한 공간에 서늘한 그들이 있습니다. 어찌해야 좋을까요. 무심하게 쏟아지는 장대비를 그저 넋 놓고 바라봅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언제까지 피해다니시려구요. 그때 아팠던 것도, 아직까지 아픈 것도, 당신 잘못이 아니니 괜찮습니다. 대신 그런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마세요. 도저히 못 버티겠을 때, 그때 어떻게든 도와드리겠습니다. 지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든, 자신이든.’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결심인지, 체념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무언가를 꽉 깨물고서 휘청거리며, 일어서는 그녀를 무거운 마음으로 배웅했습니다. 발끝만 바라보다 폐부에서 길어 올린 무겁고도 긴 한숨만을 내쉬어야 했습니다. 늑골 너머가 저릿할 만큼 쉬어도 쉬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군요. 무겁게 번져가는 책임감에 짙은 한숨을 실어 물기 가득한 하늘로 띄워 보냅니다. 몇 번의 계절이 눈물이 되어 떨어져야 할까요. 끝은 있기나 할까요.
여전히 저도 가끔은 떨어져 내리니 말입니다.
지난해 뜨락에 가득했던 해바라기들이 곳곳에 씨앗들을 떨구어 올해는 난데없는 곳에서 해바라기들이 피어났습니다. 텃밭 중간에서, 매실나무 옆에서, 수돗가 귀퉁이에서 피어난 해바라기들의 보송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아이의 갓 태어난 미소를 바라보는 듯합니다. 하지만 그런 해바라기들의 큰 키와 육중한 무게는 하릴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아래에서 대책 없이 쓰러지고, 꺾여버리고야 맙니다. 장맛비에 의지가지없이 쓰러진 해바라기들을 푸념을 섞으며 세우고 일으켜도 보지만, 한번 드러누운 해바라기는 다시는 햇살을 찬미하지 않는군요. 고개를 들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과 순수한 자존심은 끝내 해바라기를 죽음으로 인도하지요. 별빛 하나 남아있지 않은 까만 밤, 고개를 떨군 채 염분 짙은 눈물을 적시는 해바라기는 치욕스러움과 두려움으로 그렇게 화석처럼 응고되어 갑니다. 단 한 번의 상처와 지워지지 않는 상흔은 해바라기에게 트라우마가 되나 봅니다.
트라우마(Trauma)는 외부로부터의 큰 충격이나 강한 인상으로 인한 정신적인 손상을 의미합니다. 의학적 용어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표현하더군요. 일상적인 생각과 감정 상태를 벗어나 무의식적으로 어떤 사건에 압도되어 있어 비슷한 상황이나 사물, 사람과 자극 단어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신체와 영혼이 잠식되는 증상을 트라우마라 한다면, 저 또한 버려짐의 트라우마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잠시만 아픈 거라 믿었었지만, 트라우마는 발길 닿는 곳마다, 뒤따르며 집요하게 발목을 붙잡더군요. 대낮의 불안과 한밤의 우울은 사람들의 의미 없이 던진 말들과 방구석 모서리를 통해 수시로 드나들며, 상처를 덧나게 했고, 사람을 만나는 일을 버겁게 했지요. 어느새 누군가의 말을 가장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이 저에게 생긴 듯하더군요. 이미 생겨나 버린 상처와 상흔을 아물게조차 하지도 못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은 무기력이라는 살기 가득한 얼음꽃을 피우더군요. 줄줄이 늘어선 녹색빛 알코올들과 날 선 언어들의 강물에서 그저 나무토막처럼 흘러 다녔으니, ‘브레히트’의 말처럼 그 시절의 저는 죽은 물고기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산 것들은 그저 무기력하게 떠다니지만은 않으니 말입니다.
갈라지는 현실 앞에서 어둑한 허공을 떠돌던 저의 눈빛은, 소리 없이 베갯잇을 적시고, 날카로운 천장을 추락시키곤 했지요. 추락하는 천장이 두려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서 눈을 깜빡이곤 했습니다. 눈꺼풀 안에서 명멸하는 고통과 불면의 밤을 지나던 어느날 달빛을 따라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유리잔에 물을 따라 마시다가 등뼈를 들썩거리는 저를 말없이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내가 누구였더라...’
흐릿한 빛을 삼키는 조명등을 켜고서 펜을 들어 상처를 비춰보았습니다. 캄캄한 심연 안으로 들어가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내가 누구였던가를 떠올리며 처음에는 문장을 잇는 일이 처참하리만큼 고통스럽더군요. 하지만 요란스레 자꾸만 찔러대니 이윽고 검지에 굳은살이 박이었고, 아프지 않았습니다. 스스로를 추스리고 언어라는 걸 이용해 치유하겠다고 다짐한 어느 날부터 고통과 상실을 마주 보며 스스로를 줄곧 두드리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고통의 가치가 사라질까, 두렵기도 합니다. 고통에 휘둘리지 않고, 감정의 찌꺼기를 담아두지 않으니 깊이 박인 트라우마는 흐릿해져만 가더군요. 누구나 그런 상황을 겪으면 그럴 수밖엔 없을 거라는 지극히 평범하고도 인간적인 공감, 비정상적이라 여기던 것을 정상적으로 마주하려는 의지,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이유가 있으리라는 마음,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려는 여유. 이러한 것들을 문장으로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트라우마는 옅어져만 가고, 삶은 단단해져만 가더군요. 사나운 문장들을 용기 내어 직시하니, 이제는 고통과 슬픔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곁에 두고 이리저리 살펴보아야 할 제 감정의 특별한 부분이라 여겨집니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반고흐」‘영혼의 편지’ 중.
저의 삶을 사랑하게 되니, 비록 모든 고통을 억제하지는 못하지만, 재생과 회복의 힘이 저를 그저 강물에 휩쓸려 떠다니게 하지만은 않으리라는 견고한 믿음이 제 안에 생기는 것만 같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친구의 마음을 저를 향한 동정이나 연민으로 왜곡하지 않고서 황혼 녘 호수의 순수한 복숭앗빛 윤슬을 닮았다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관계의 회복은 자기 폄하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면서 그래도 좋은 점과 잘 하는 일이 있다는 자존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요. 부서지는 석양빛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초입의 사물을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떳떳하게 손을 내밀 수 있었습니다. 저를 위해, 저를 향해 곧장 다가오는 누군가의 변함없는 실루엣이라는 걸 이젠 알아볼 수 있습니다.
축축한 장마의 발자국들로 움푹 팬 흙들이 모질게도 들러붙은 오이들을 더 늦기 전에 구조하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찾아오는 손들은 무조건 밥값은 해야 한다는 서재의 법칙에 따라 친구는 오이와 고추, 부추와 대파를 수확하러 떠밀리듯 걸어갑니다. 신체를 움직이고, 땀을 흘리며, 자연과 교감할 때, 스스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지요. 정직한 노동과 순수한 자연의 힘은 사람을 깨우치게 합니다. 저도 고슬고슬하게 흩어지는 까만 흙을 매만지며, 자연이 너그럽게 내어주는 위로와 기쁨의 언어들에서 결국 저는, 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호수에 내려앉아 윤슬이 된 달빛이 회색빛으로 물들여 가는 시골서재에서, 저는 퇴근 후에 작물을 가꾸며, 나무를 어루만집니다. 쏟아져 내리는 별빛들과 달빛에 반사된 몽글몽글한 하얀빛 구름 아래에서 농사를 짓고, 글을 쓰는 일은 참으로 호사스러우면서도 황홀하기까지 하지요. 온 우주가 저를 향해 달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점멸하던 진실은 이젠 선명하게 말해 줍니다. 제 삶의 주인공은 저였으며, 제 영혼의 주인은 저라는 사실. 모든 삶은 길 위에 있다는 말은 어쩌면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매일 우리의 길을 만들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린 그걸 단지 모를 뿐이지요.
끈질기게 늘어지는 장맛비가 저와 친구를 위해 잠시 쉬어가려나 봅니다. 비가 내린 뒤의 햇살은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하고, 사나운 겨울을 쫓아 찾아오는 봄은 참으로 따사롭습니다. 그리고 다시 비가 내리고 흰 눈이 쌓이리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고통을 연상시키는 자극 단어들 또한 직면하고, 소리내어 또박또박 읽어 나갈 때,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아득히 멀어져만 가는 심연의 고통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있다면 마음 담아 눌러 적은 문장들이겠지요.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을 저는, 차마 멈출 수가 없습니다.
더위에 지친 고마운 친구를 위해 오이냉국과 오이소박이, 그리고 고추장 불고기를 준비하려 합니다. 오늘은 손이 많이 갈 듯하지만, 뭐 어떤가요. 이 시간이 저의 삶을 만들어 주니 말입니다. 제가 잘 마시지는 않지만, 친구가 좋아하는 차가운 맥주도 사두었지요. 선풍기 바람에 입을 크게 벌려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맥주를 마시는 친구의 모습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친구가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어 읽는 동안, 저는 건 미역을 식초물에 담가 불리다가 조금 데쳐둡니다. 아삭아삭한 오이의 식감이 살아있도록 오이도 얇게 잘라 올리고당과 소금을 넣어 절여둡니다. 찬물에 소금과 올리고당, 그리고 식초를 넣어 간을 맞추고 청양고추를 듬성듬성 썰어 매콤한 맛을 내어봅니다. 데치고 절여둔 미역과 오이, 그리고 얼음과 통깨를 넣어 만든 오이냉국을 친구에게 한 사발 내어줍니다. 목을 지나 시원하게 넘어가는 소리와 달콤한 냄새, 선연한 풍경들. 언젠가 저에게 공허함이 다시 찾아오게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이 바람처럼 다녀가며, 삶을 다시 붙들어 주겠지요. 오이소박이를 만들려고, 오이 껍질을 식초물에 우리고 박박 문질러봅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십자형으로 칼집을 내었어요. 잘게 썬 부추와 양파, 다진 마늘에 새우젓과 멸치액젓, 설탕과 고추가루, 그리고 통깨를 넣어 만든 양념장으로 칼집을 낸 곳을 메꾸었습니다.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네 곁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무라카미 하루키」‘노르웨이의 숲’ 중.
참담하게 도려내진 우리의 마음도 맛깔나게 버무린 새콤달콤한 추억들과 의미들로 메워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작은 예의로서 의미를 부여하고 채워야 하는 일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지극한 의무인 듯합니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나오코’의 부탁을 결국 들어줄 수 있게 된 ‘와타나베’의 이별 의식이 회상과 글쓰기였듯, 고통에 대한 품위있는 작별, 그리고 얼어붙은 부재의 공간을 소중한 의미로 다시 녹일 때, 우리의 상처는 명예로운 표식처럼 아물어 가지 않을까요. 속수무책으로 다가오는 고통을 알지 못하고, 한밤에 소주를 마시며 고뇌해 보지 않은 자와는 깊은 친구가 될 순 없을 듯합니다. 트라우마를 견뎌낸 이들에게서만 느껴지는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제가 가진 버려짐의 트라우마에 저 또한 이제는 작별을 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커져만 가는군요. 매미는 얼마 살지 못하지만, 짧은 한 생을 소리높여 살아가지요. 친구도, 저도. 여린 우리는 죽은 물고기가 아닙니다. 비록 짧더라도 소리높여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회색빛 구름이 가라앉았다 떠오르길 반복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