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어떤 인생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네 날개를 마음껏 펼치거라.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맥 팔레인」‘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 중.
드높던 여름 햇살이 창을 지나, 낮게 손을 뻗으며 마지막 손등에 내려앉는 시간입니다. 일터에서의 하루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은 제가 가장 기다려지는 빛을 보여줍니다. 저의 한낮을 조용히 응원하는 것만 같은 빛이지요. 종이를 뱉어내는 건조한 복사기의 마찰음들, 키보드의 거친 파열음들, 작은 먼지를 일으키며 넘겨지는 차가운 서류 뭉치들, 철제 의자의 딱딱한 것이, 딱딱한 것에 부딪히는 덧없는 소리들. 일상의 인위적인 황량한 소리들에 저의 일상은 걸려 넘어지길 반복하는 것만 같습니다. 특히나 날이 잔뜩 선 사무실의 전화벨 소리는 언제나 수화기가 악다구니를 쓰는 것만 같았고, 플라스틱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추측하게 하곤 하지요. 악에 받친 날카로운 목소리이거나, 처연하게 떠다니는 목소리 중 하나이기에,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제 손은 힘줄이 끊어진 것처럼 의식이 사라진 물먹은 솜이 되곤 합니다. 습기가 배어 눅눅해진 수신자 없는 편지가 된 창밖의 이 계절은, 비바람을 다시 데려다주려나 봅니다. 싸늘한 바람은 언제쯤 잦아들까. 창밖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다, 울어오는 수화기에 손을 가져갑니다.
‘잘 지내셨나요?’
어딘가에서 분명히 들었는데. 무의식이 소환하고 있는 낯익은 목소리였습니다. 메모지에 알 수 없는 동그라미를 그리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해 가을 무렵, 윗니와 아랫니를 꽉 깨물고서 썼었던, 제 글의 모티브가 되었었던 얼굴 없는 이의 아내였지요. 벚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계절과 계절을 건너, 여름의 향기가 되어 다시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퇴근 무렵이었지만, 저는 그녀를 만나야 했지요. 다시 그 계절의 글을 펼쳐 읽으며, 기억의 조각들을 재생시켜 보았습니다.
일 년 전, 무례하였던 그는 사직원이라 적힌 희멀건 종이 조각을 저에게 던져두고는, 어떠한 의미도, 설명도, 바람도 남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는 듯,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었지요. 그래요. 그는 무례했습니다. 참으로 무례했지요. 무례한 그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걸 차마 인정할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려 했었지요. 얼음기둥 같던 그와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그의 이야기를 비로소 그의 아내를 통해 알 수 있었고, 저는 그의 아내를 설득해서 그의 사직서를 반려하며, 휴직으로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캄캄한 터널을 지나 희미한 빛일지라도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만난 그녀의 이야기는 그 시절의 그와는 낮과 밤만큼이나 달랐지요. 이후 그는 복잡한 수술을 지나오면서, 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지만, 외적인 조건의 처연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지금은 집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전처럼 선명하게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전처럼 일상을 향해 단호하게 등을 돌리지는 않는 듯합니다. 생의 갑작스러운 횡포를 향해서, 집착을 내려놓은 일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요.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오고 싶어 했고, 지난 일 년을 간절하게 살아온 듯했습니다. 운명은 그의 간절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사랑을 말하려다 삼켜내는 듯한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이윽고 움직입니다.
‘그때는 참 고마웠습니다. 염치없게도 또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 아빠가 복직을 하고 싶어 하는 데, 일을 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정기인사에 맞춰서 복직 신청해 주시면 제가 좀 더 도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요양 잘 하시라 전해주세요. 조만간 뵙겠습니다.’
일 년 전의 그녀는 죽은 나뭇가지처럼 수척했고, 성냥개비처럼 타들어 가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고요한 달빛 아래의 호수에 발을 담그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했습니다. 가만하게 앉아 그녀의 노래를 사랑의 모습이라 적고, 희망이라 읽습니다. 수많은 바람과 소망, 소원과는 다른 단 하나뿐인 희망. 어쩌면 희망은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고, 저는 그녀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자존감이 산산조각났던, 그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봅니다. 약속된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저는 언제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곁에 있으나 보지 못한 것일지도.
저는 그 무엇도 아니었고, 어느 것도 되지 못했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저 햇살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림자였을 뿐이었지요. 그렇게 그림자인 채로 살아지다, 어느날 뜨거운 태양이 궁금했고, 새까맣게 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한 발 조심스레 내딛었으나, 저는 타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저는 고통을 저의 일상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익숙해진 그것을 벗어났을 때 눈앞에 펼쳐질, 겪어보지 못한 세계가 두려웠으니까요. 그래서 고통을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간절함이 고통을 넘어설 때, 운명은 비로소 저에게 다른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목숨을 옮긴다는 운명(運命)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지요. 그의 치유도 이렇게 햇살을 품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시작되었겠지요. 무심한 삶에 대한 그의 저항을 조용히 응원합니다.
사실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하라는 말처럼 마음에 가닿지 못 하는 말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넘어서지 못하는 좌절 앞에서 스스로를 찢어발기고 있는 이들에게 그저 인내하라니요. 그저 넘어서라니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변함없이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 주리라는 누군가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 그 불꽃 같은 한 조각은 운명을 이끌어 가기에 필수적인 질료인 듯합니다. 시각이 흐릿해져 가는 그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라는 말보다, 벚꽃을 닮은 그의 아내가 간절함이 되었고, 운명의 이정표가 되지 않았을까요, ‘손녀딸 릴리’에게는 외할아버지의 존재가 그렇지 않았을까요. 잃어버린 듯한 길도 길이 될 수 있는 건, 길옆에 늘어서 있는 이들이 발밑으로 사랑이라 적힌 응원의 꽃잎을 흘려주기 때문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손이 두 개인 건, 박수로 서로를 격렬하게 응원하라는 신의 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지인이 언젠가 저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들어야만 했던 그의 난데없는 문장에 놀라 한동안 생각에 빠져야만 했었지요. 제가 그이를 도왔던 일들이 그이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말 없는 저의 응원이 투명하게 가닿지 못한 것인지. 동정은 가장 잔인하고 은밀한 폭력이라 믿는 저로서는 조금 속상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단 한 번도 걸림돌인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당신을 아끼고 응원하게 된 일이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겠지만, 그걸 우리는 걸림돌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걸 인연이라 부릅니다. 언제나 저는 이곳에서 당신을 응원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삶이 저는 참 좋습니다.’
침묵은 거짓되고, 피상적인 말들이 반성하며 돌아가는 고해성사라 여겨온 저에게 가끔은 의도된 문장들을 배달하는 일이 필요하다 생각하게 되었지요.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 하였다지요. 응원의 마음이 부디 그에게 잘 가닿기를 바라봅니다.
둔탁한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을 뚫어버릴 듯한 장대비가 거세게 내리는군요. 깊게 팬 웅덩이에서 생겨나는 투명한 공기 방울들은 희망이 호흡하듯 부풀어 올랐다, 터지기를 반복합니다. 샌프란시스코행 야간비행기를 탑승해야 하는 출장 일정이 다가오고 있어, 그 전에 잡초들이 무성한 서재를 조금 더 다듬고 정리해 두려 합니다. 문예창작학과 개강일이 출장일과 겹쳐서 첫날부터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이버 대학이지만, 오프라인 프로그램도 있기에 글을 배우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설렘과 떨림으로 가을을 준비합니다. 바쁘게 지내는 시간들이 저를 독촉하지만, 살아가고 있는 듯해서 충만하기만 한 나날입니다. 엑셀에 올려진 발이 무거워지니, 차창 밖의 풍경도 빠르게 사라져 가는군요. 비바람에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하늘의 품에서, 빠르게 번져오는 회청빛 구름들이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구름장들 사이로 찰나에 쏟아지는 섬광이 하늘을 명멸시키기를 반복합니다. 그것은 마치 슬픔과 아픔으로 채색되어진 짙은 침묵과 상실의 여백이 수놓은 수묵화처럼 보입니다. 청개구리들은 다가올 시련을 맞이할 준비라도 하는 듯, 요란하게도 울어대었고, 까만 개미들은 바삐 감나무를 오르내립니다. 까만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검은 구름 아래에서 백색의 섬광이 산허리에 내리꽂히는 걸 보니, 또 한 번 거칠게 몰아치려나 봅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저에게 더 이상 두려움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 너머에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찬연한 하늘이 존재한다는 걸, 이젠 잘 알고 있으니까요.
친구는 요즘 일터에서 산적한 일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맡겨진다며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일을 잘하니 그런 것이라고 다독여 주며, 나쁜 사람들이라고 끄덕여 주었어요. 나쁘다며 공감해 주니, 친구는 기분이 좋아지는 듯합니다. 미소한 일일 뿐이지만 무조건적인 응원은 한 사람을 일으키는 데애 압도적인 힘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고, 옥수수밥이랑 된장찌개 해줄 테니 한번 다녀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댁에서 먹었던 고슬고슬한 옥수수밥과 누릿한 된장찌개의 향기는 집이라는 추상적인 실체를 구체적으로 소환시켜 주는 매개체인 것만 같습니다. 딱딱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기만 하는 콘크리트 건물은 사실 그저 건물일 뿐이지요. 한낮의 고단함을 한밤에 누워 마음 편히 하소연하며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여행을 다녀온 후 온당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곳. 집은 평온과 안식을 줄 수 있는 표상적인 집합체가 아닐까요. 위로와 위안을 받고, 응원과 지지가 당연하게 자리하는 곳이기에 허름한 판자 지붕 아래에서 하늘을 덮고, 흙을 베고 누워도 모든 밤하늘의 별빛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곳이 집인 듯합니다. 어쩌면 저는 그동안 집이 없었고, 이제서야 집을 건축하는 중인지도 모르겠어요.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친구에게 하얀 김이 피어나는 옥수수밥과 된장찌개를 먹여서 보내려 합니다.
우주는 우리에게 침묵의 소리를 잘 들려주기 위해 깊은 밤을 선사하는 것만 같습니다. 침묵의 시간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그리고 저의 영혼이 내지르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지요. 그 소리에 공명하며 지나간 삶을 잘 접어서 보내 주고, 다가오는 삶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습니다. 하얀 쌀을 우리고 불려 두고서, 뜨락에서 따온 옥수수를 소금물로 씻기고 길게 자릅니다. 달콤한 노란빛 냄새가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멸치 육수를 우려내고, 땅이 스스로를 소진시켜 가득 안겨준, 고마운 고추와 대파, 애호박을 자릅니다. 소낙비가 지나고 손톱달이 수줍게 번져가는 밤은 대책없이 청량한 공기와 깨끗해진 땅의 소리를 너그럽게 대접해 주는군요. 까만 밤의 침묵과 달빛의 부드러움 사이에서 대낮의 소란스러움과 서글픔은 지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저는 한참이고 입을 벌린 채, 노트를 펼쳐 끄적입니다.
‘찢긴 마음에 달은 쪼그라든다. 한낮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차가움에 달은 눈꺼풀을 덮어 침묵하며 몸을 비틀어 고요의 밤을 기다린다. 열다섯 번의 낮과 열다섯 번의 밤 동안 달은 꿈을 잃은 희미한 존재를 견디고 호수에 자신을 씻기며 이지러지고 부풀어 오르기를 반복한다. 둥그러지고 둥그러지며 티끌보다 가벼운 나약한 존재를 달은 다시 감싸안는다. 가득 찬 달은 빛을 길어 대낮의 가벼움에 입을 맞춘다. 한낮의 소란스러움이 달빛 아래 스르르 잠이 든다.’
불안과 용기의 경계에서 모든 낮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건, 까만 밤처럼 보이지 않는 응원과 찬사를 보내 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여전히 그들이 그 자리에서 ‘현욱아’ 하며, 저를 불러줄 것이라는 믿음이 저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팍에는 우주의 불꽃이 있고, 그걸 삶의 의미인 희망이라 한다면,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건, 그걸 바라봐 주는 이들의 마음. 어쩌면 괜찮아. 어쩌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라며, 누군가 지나치듯 말해 주는 단 한 문장뿐인지도 모르겠군요. 여전히 어리숙하고도 허접한 저이지만, 이곳에서 열렬히 응원할 테니, 부디 누군가의 일상이 굳건하길 바랍니다. 저 또한 더디고, 비록 늦었지만, 재촉하며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저를 사랑하는 이들의 미소와 응원 덕분이었습니다. 밤이 이울도록 친구와 수다를 떨어야겠어요. 친구의 옅은 미소가 이 밤의 공기를, 이 밤의 저를 가득 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