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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Sep 15. 2023

발 닿는 곳에 삶은 다시 피고 _ 김치찌개와 호박잎쌈.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친구와 함께 걸었던 단양의 밤거리가 떠오르는 주홍빛 가을의 밤입니다. 붉은 나트륨 등이 하나, 둘 번져가고, 빛 내린 단양을 내려다보던 친구와 저는 설레었고, 다짐했었지요. 싸늘했던 밤공기조차 친구의 목도리 안에서 따스해지던 그 시간을 저는 언제나 기억합니다. 영원히 재생될 것만 같던 깊은 그 밤을 말이지요. 달빛 아래에서 함께 걷던 거리마다 기쁨으로 치환되던 시간을 뒤로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안도와 아쉬움이 밀물처럼 발밑으로 밀려왔었지요. 그래요.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돌아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여행은 그저 방랑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은 우리의 지친 듯한 각막에 일상과 안식처를 다른 빛깔로 맺히게 합니다. 저는 모질던 그 시절을 조금 방황하면서, 가끔은 울기도, 또 가끔은 웃기도 하면서 잘지나 왔습니다. 그리고 여행의 끝에서 일상을 다시 찾았습니다. 찬연한 노란 빛의 그 계절이 다시 돌아오는군요. 올해가 다하기 전에 단양을 다시 가보려 합니다. 친구와 보았던 영롱한 달빚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밤을 밝힐 테니 말입니다.     


 ‘나는 여행을 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한층 원숙하고 현명해진 자의 높아진 감수성과 감사할 줄 아는 성숙한 이해심을 느낄 수 있었다.’

                                                                                                                    「헤르만 헤세」     

 얼마 전, 저는 두 주간 미국으로 출장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건조한 바람이 저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낯선 곳에서 저는 큰 트렁크를 끌고서 천천히 걸었지요. 거대한 자연과 너무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걷고 있으니, 저의 존재는 희석되고 오감은 선명해져만 갔습니다. 생경한 세계 앞에서 저의 편협함과 오만함은 호주머니 속으로 숨어들고, 순결한 호기심만이 호박 줄기처럼 팔을 뻗고서 미지의 존재들을 거침없이 더듬었지요.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버스 차창에 스친 저의 눈빛은, 하염없이 작아지고만 있었습니다. 자연은 거스를 수 없는 영원이었고, 저항할 수 없는 경전이었기에 그저 경외를 보내며, 부복(俯伏)할 뿐이었습니다.

 많든, 적든. 저는 어느새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모래 가루에서 세상을 보고, 야생화에서 하늘을 보네.

 우리의 손바닥에서 영원을 보고, 한 시간 속에서 영원을 보네.’

                                                                                          「윌리엄 블레이크」‘순수의 전조’ 중.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왜 인간은 두 발로 직립보행해야만 할까요. 걷는다는 것은 두 발을 대지에 단단하게 딛고서 자유의지에 따라 전진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게 될 흙은 굳건한 안식처이며, 이를 딛고 나아가는 것은 삶을 확장시키는 행위인 듯합니다. 너무나 간명하고 단순한 행위를 따라 자연의 질문은 이어집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죽음 앞에 떳떳한가...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 우리는 답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차근하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린 그걸 잡념과 계략을 흩어버린다는 의미로 산책이라고도 합니다. 여전히 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가는 길이 맞기나 한 건지 어렴풋하게만 다가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언제까지나 사색하며 걸을 수 있는 인간이길 바란다는 것이지요.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보행을 통해 많은 사유를 할 수 있습니다. 은빛으로 물들어 가는 시골에서 나무를 가꾸고, 작물을 키우기 위해 움직이다 보면 영혼은 맑아지고, 새로운 생각들이 머리와 가슴에 채워지는 듯합니다. 여행의 본질은 사람을 걷게 하고, 생경한 환경에서 누구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는 것이지요. 여행은 낯설기만 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샌프란시스코라는, 라스베이거스라는, 그랜드캐년이라는 지구상에 반드시 존재하고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날것의 공간을 마주하며 걷는 일은, 저의 공간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기는 진정한 시간을 살아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인간이 숫자로 발명한 것에 불과한 불완전한 시간이 아닌 우주의 법칙인 세월의 흐름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공간의 이동과 변화가 어쩌면 완전한 시간의 변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을 벗어난 여행은 평소 닿을 수 없었던 시선과 기억을 통해 자신이 서있는 일정한 좌표를 온전히 복원시키고, 좌표의 이동을 통해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듯합니다. 우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삶의 일부에 뿌리내리고 길들어져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굳어버린 일상을, 경직된 자아를, 용해하고 다시 융합할 수 있는 여행은, 자신이라 여기며 속여오던 박제된 허물을 탈피하기 위한 결행인 것만 같습니다. 친구와 함께 걸었던 그 밤거리에서 흐르던 투명한 대기의 운행과 단단한 대지의 중력을 저는 기억합니다. 저의 삶을 변화시키던 거스를 수 없는 그 압도적인 힘을 저는 아직도 살갗의 솜털이 일어서듯 느낄 수 있습니다.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 생겨나는 틈이다.’  

                                                                                                                          「폴 발레리」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저는 하염없이 겸손해져야만 했습니다. 몇십억 년간 생성되고 풍화되길 반복했을 앤텔로프캐년과 그랜드캐년. 그 고요하기만 한 거대한 존재들 앞에서 한낱 부질없는 인간의 소유와 집착은 감히 떠올릴 수조차 없었지요. 지구에 붙박인 거대한 자연은 저리도 고요한데, 저는 왜 이리도 소란스러운 걸까요. 광활한 세계와 무한의 우주 안에서 제가 가졌다고 여기던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래요. 그것들 중에 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부모와 아이, 친구와 지인, 심지어는 저의 가느다란 종아리와 두툼한 입술까지도. 언젠가는 자연으로, 우주로 반납해야 할 것들이지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향해 희극과 비극의 자리를 수시로 바꿔 앉으며 살아온 것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고, 가졌다는 환상에 사로잡히고, 집착에 눈이 멀어서 스스로 고통을 생산하고 감내해 온 건지도 모르겠더군요. 잠시 품었다가 제가 남겨두고 갈 수 있는 건, 그저 흩날리던 벚꽃을 크게 입을 벌리고서 바라보던, 사랑하는 마음들과 기억들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사랑하며,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 우주가 유일하게 저에게 허락해 주었고, 기어이 가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단 하나의 가치인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들을 복기하며 문장을 짓는 일을, 결코 멈출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그림 몇 점에 조용히 감사하며 목적 없는 시간을 보낼 수 있고, 고귀한 건축물에서 울리는 아름다운 음을 열린 마음으로 황홀하게 들을 수 있다. 또 어느 풍경의 선을 진심으로 즐기며 따라갈 수 있다. 그때 평소 우리가 의욕과 관계, 소망의 흐릿한 그물 속에서만 생각하던 것이 우리에게 그림이 된다.’

                                                                                                                        「헤르만 헤세」    

 

 타자와의 관계에서 역할 지어진 누군가의 무엇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서, 여행하는 저는 그저 전철과 버스를 타며 걷는 인간일 수 있습니다. 유년의 시절, 저는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고,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가며 자유로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지요. 십 년이 흐르고, 이십 년이 지나고, 삼십 년을 더 살았으나, 저는 끝끝내 자유롭지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쌓여가는 욕망의 속박들과 그에 따르는 역할들은 자유가 아닌 굴종과 비겁, 나태와 독선을 잉태하고, 절망과 상실을 뱉어내더군요. 물론 사십 대인 지금도 온전히 자유롭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생각하지만, 조금씩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나이가 먹는 일은 여행처럼 새로운 시선을 통해 삶을 바라보게 하니까요. 자유는 항상 제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행은 저를 구속하던 것들을 풀어헤치고 마주해 달려오는 순수한 외적 자극을 온몸과 마음으로 붙잡을 수 있게 합니다.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는 내 안의 자유가 느껴질 때, 안쓰러운 그 손을 이제는 잡아주고만 싶습니다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이국의 말들이 저의 귀에서 웅웅거리며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때, 불현듯 김치찌개를 떠올렸습니다. 두부 가득 넣은 매콤새콤한 김치찌개가 왜 그 순간 떠오른 걸까요. 미국 음식을 먹으며 우리의 먹거리들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품위있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삭히고, 정성스레 무치고, 가만하게 우려내어 그릇마다 담아내는 일은 상당한 기다림과 마음을 녹여내야만 하는 일이지요. 한국의 밥상에는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이나 애타게 찾는 사랑과 헌신의 모습이 담겨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집의 향수를 떠올릴 때면 저는 가장 먼저 밥 짓는 냄새를 상상하곤 합니다. 그건 아마도 품어지는 사랑에 대한 간절함이자, 안식으로 축조된 추상적 집합체인 집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걷는 자가 끝내 돌아가야 할 곳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집이었지요. 여행의 끝 무렵에 발걸음이 향하는 안식처라 여기는 공간에 대해 관조하게 됩니다. 진정 돌아갈 곳이 어디인지, 휴식이 온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곳인지를 말입니다. 김치찌개와 시골을 떠올리니 저의 발걸음은 귀향을 향해 바빠지더군요. 여행에서 돌아오던 발걸음은 언제나 무거웠고, 자꾸만 뒤를 향하려던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었지요. 일상과 집은 아쉬움 가득한 여행에 의해 조금씩 변화하고, 다시 만들어지는 듯합니다. 저를 사랑해 주는 이의 속 뜰이 진정 집이라 할 수 있겠지요. 어쩌면 지금 제가 지나오고, 걸어가는 이 길들은 누군가를 위한 집을 준비하고, 또 저의 집을 건축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저를 노란 호박꽃과 호박잎들이 제철을 맞아 풍성하게 반겨주더군요. 화려하진 않지만 화사하고. 거대하진 않지만, 포근한 이곳에 언젠가 저의 집을 지으리라 다짐도 해봅니다. 붙 타오르는 노을을 지나 어느새 박모의 빛마저 사라지고, 사위가 파르스름해집니다. 김치찌개를 끓이고, 호박잎을 쪄서 일상 안에 여행의 여운을 데려옵니다.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헤르만 헤세」  



 호박잎을 한 잎, 또 한 잎 따며, 쌈장을 고민하다가 처마가 있어 메주를 걸어둘 수 있는 시골 책방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조롱박이 열린 듯,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를 보며, 사랑하는 이들에게 안부를 묻는 편지를 쓰고 있을 제 모습이 글이 되고, 그림이 될 것만 같습니다. 건너편 할아버지께서 한동안 제가 안 보여 걱정했다며, 다정한 안부를 물어오기에 두 팔을 크게 벌려 화답했어요. 호박잎을 따다가 노랗게 잘 익은 참외에도 시선이 닿았습니다. 시골을 걸으면 변하지 않는 듯 보이는 자연이지만, 나고 지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소명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자연의 순리를 생각하며, 저는 언제나 그 끝에 죽음을 떠올리곤 합니다. 자연의 일부인 저 또한 기어이 돌아가야 할 곳이니까요. 어둠이 있기에 빛은 황홀하고, 일상을 살기에 일탈은 특별해지며, 죽음이 있기에 사는 일이 아름다워지는, 이 아이러니한 모순에 감사해지는군요. 특히나 미국의 거대하고도 미스틱한 풍경 앞에서 미미하기만 한 저의 존재와 사명에 대해 사색하다 보니 늙어서 하고 싶은 일들, 죽음이 다가오면 할 수 있는 일들도 통발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함께 건져 올려집니다. 그게 누군가를 구하기 위한 글을 쓰고, 누군가에게 호박잎 한 장 얹은 쌀밥 한술 내어주는 일이라 말한다면, 어떤 이는 웃을까요. 호박잎을 식초물에 담가서 잠시 우리고, 한 잎, 한 잎 펴서 푹 쪄냅니다. 하얀 김이 실처럼 피어나는 호박잎처럼 어느날 창가에 비친 저의 모습이 주름이 잡히고, 희끗한 모습일지더라도 잘 익은 인생이었길 소망해 봅니다. 냉장고에 널부러져 있던 얼어붙은 돼지고기를 꺼내어 된장을 조금 넣고서 달달 볶고, 신김치를 멸치 육수와 함께 넣어 김치찌개도 끓입니다. 물설고 낯선 땅의 이질적인 음식을 먹다가 시골밥상을 차리니 공기는 푸근해지고, 몸은 나른해지며, 마음은 풍성해지는군요. 여행은 별것 아닌 것들로 보이던 소소한 일상을 진짜 삶으로 읽을 수 있게 하는 시선의 변화인 듯합니다.


 보송하게 채워지는 작설차 한잔을 쥐고서 오랜만에 평상에 가만하게 앉아 게으름을 부려봅니다. 하얀 달은 하늘에 걸려있고, 회색빛 구름은 높게 서성이며, 풀벌레 소리는 깊어져만 가는군요. 좋은 이들과 소주 한 병을 두고 대작하고만 싶은 그런 아름다운 밤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 스탠드 전등 아래로 여행의 기억을 데려와 펜 끝에 걸어두었습니다. 빈약한 문장들 속에 저는 또다시 진심 하나 남몰래 숨겨 두겠지요. 저는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요. 일상에 길들여진 것도, 떠돌아 다니기만 하는 것도, 그 본질은 모두 두려움이자, 무책임인 듯합니다. 참된 여행의 목적은 일상과 방랑의 사이, 어디즈음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행의 여운은 저를 오랫동안 더 깊은 심연으로 인도할 듯합니다. 드넓은 사막에서 싸늘한 모래바람에 저항하며, 중력을 거스르고 처절하게 서있던 이름 모를 풀꽃들에서 저는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우리의 발길 닿는 곳에, 삶은 다시 피어날 것입니다.


덧.

김치찌개: 돼지고기, 묵은지, 두부, 대파와 양파 반개,

                 홍고추 개, 고추가루와 국간장 한 숟가락씩,

                 다진마늘과 새우젓 한 숟가락씩.  

호박잎 쌈장: 된장 세 숟가락, 고추장 한 숟가락,

                       다진 마늘과 통깨 한 숟가락씩,

                       올리고당과 참기름 두 숟가락씩,

                       양파와 청양고추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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