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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Aug 25. 2023

모든 밤은 당신의 낮을 응원한다 _ 옥수수밥과 된장찌개


여름 햇살이 창을 지나, 낮게 손을 뻗으쓰다듬는 시간입니다. Y. 그대의 한낮어떠셨는지요. 일터에서의 하루가 어느새 저물어 가는군요. 종이를 뱉어내는 건조한 복사기의 마찰음들, 키보드의 거친 파열음들, 작은 먼지를 일으키며, 넘겨지는 차가운 서류 뭉치들, 철제 의자의 딱딱한 것이, 딱딱한 것에 부딪히는 덧없는 소리들. 일상의 인위적인 황량한 소리들에 저의 일상은 걸려 넘어지길 반복하는 것만 같습니다. 특히나 날이 잔뜩  사무실의 전화벨 소리는 언제나 수화기가 악다구니를 쓰는 것만 같았고, 플라스틱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추측하게 하곤 하였지요. 악에 바친 날카로운 목소리이거나, 처연한게 떠다니는 목소리 중 하나였기에, 수화기를 들어 올리 손은 속수무책으로 물 먹은 솜이 되곤 합니다. 습기가 베어 눅눅해진 수신자 없는 편지처럼, 창 밖으로 보이는 이 계절은 비바람을 다시 데려다 주겠다며, 커튼 사이로 소곤거리는군요. 창 밖을 응시하며, 바람이 언제쯤 잦아들까라는 무의미한 생각을 하고서, 울어오는 수화기에 손을 가져 갔습니다. 


'잘 지내셨나요?'


어딘가에분명히 들었는데. 무의식이 소환하고 있는 낯익은 목소리였습니다. 곰곰하게 생각해보니, 지난 해 가을 무렵, 윗니와 아랫니를 꽉 물고서 썼었던, '무례하였던 당신에게'라는 글의 모티브가 되었었던 얼굴 없는 이의 아내였지요. 벚꽃을 닮았다고 생각하였그녀계절과 계절을 건너, 여름의 향기가 되어 다시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퇴근 무렵이었지만, 저는 그녀를 만나야 하였지요. 다시 그 계절의 글을 펼쳐 읽으며, 기억의 조각들재생시켜 보았습니다. 1년 전, 무례하였던 그는 사직원이 적힌 희멀건 종이 조각을 저에게 던져 두고는, 어떠한 의미도, 설명도, 바람도 남기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도 하는 듯,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었지요. 그래요. 그는 무례하였습니다. 참으로 무례하였지요. 무례한 그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그걸 차마 허락할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단절시키려 하였지요. 헛되이 자신과 작별하려던 그의 이야기를 비로소 그의 아내가 건네는 눈물  수 있었고, 저는 그의 사직서를 반려하며, 휴직으로 전환하였었습니다.

다시 만난 그녀의 이야기는 그 시절의 그와는 낮과 밤만큼이나 달랐지요. 이후 그는 복잡한 수술을 치루었고, 장애 판정을 받게 되었지만, 외적인 조건의 처연함을 받아들이며, 지금은 집착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전처럼 선명하게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전처럼 쉽게 일상을 내팽개 치지는 않는 듯합니다. 생의 갑작스러운 횡포를 향해서, 집착을 내려놓은 일상으로 저항하고 있었지요. 그는 다시 일터로 돌아오고 싶어 하였고, 지난 1년을 간절하게 살아온 듯하였습니다. 명은 그의 간절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사랑을 말하려다 삼켜내는 듯한 그녀의 창백한 입술이 이윽고 움직였습니다.


'그때는 참 고마웠습니다. 염치없게도 또 부탁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이 아빠가 복직을 하고 싶어하는데 일을 할만  곳이 있을까요?'

'정기인사에 맞춰서 복직해 주시면 제가 좀 더 도울 수 있을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요양 잘 하시라 전해주셔요. 1월에 뵙겠습니다.'


1년 전의 그녀는 수척하였었고, 성냥개비처럼 타들어가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고요한 달빛 아래의 호수에 발을 담그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듯하였지요. 가만하게 앉아 그녀의 노래를 삶의 의미라 적고, 희망이라 읽었습니다. 수많은 바람과 소망, 소원과 다른 단 하나뿐인 희망. 어쩌면 희망은 삶에서 어떠한 의미를 찾는 이었고, 저는 그녀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1월의 약속을 기다리며, 자존감이 산산조각 났었, 그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봅니다. 나의 Y. 그대는 삶의 의미를 찾았나요.


Y. 그대는 아니라며 손사래 치시겠지만, 는 그 무엇도 아니었고, 그 무엇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그저 햇살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그림자였을 뿐이었. 그렇게 그림자인 채로 살아지다, 어느날 태양이 궁금하였고, 새까맣게 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서 한발 내딛었으나, 저는 타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는 고통을 의 일상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벗어났을 때 펼쳐질, 겪어보지 못한 세계가 두려워, 끝내 고통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군요. 간절함이 고통을 넘어설 때, 운명은 비로소 에게 미소지어 주었습니다. 목숨을 옮기는 운명이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지요. 그의 치유도 이렇게 햇살을 품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시작되었겠지요. 삶에 대한 그의 저항을 조용히 응원합니다.


'나는 네가 어떤 인생을 살든 너를 응원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네 날개를 마음껏 펼치거라.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 뿐이다.'

 - '맥 팔레인', '손녀딸 릴리에게 주는 편지' 중. -


사실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하라는 말처럼 마음에 닿지 못하는 말도 없는 것만 같습니다. 넘어서지 못하는 좌절 앞에서 스스로를 찢어발기고 있는 이들에게 그저 인내하라니요. 그저 넘어서라니요. 도무지 납득이 되지가 않는군요. 하지만 수도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변함없이 자신을 믿어주고, 응원해 주리라는 누군가를 향한 절대적인 믿음. 그 한 조각은 운명을 이끌어 가기에 필수적인 질료인 듯합니다. 시각이 사라져 가는 그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라는 말보다, 벚꽃을 닮은 그의 아내가 간절함이 되었고, 운명의 이정표가 되지 않았을까요, '손녀딸 릴리'에게는 외할아버지의 존재가 그렇지 않았을까요. 잃어버린 듯한 길도 길이 될 수 있는 건, 길 옆에 늘어서 있는 이들이  밑으로 사랑이라 적힌 응원의 꽃잎흘려기 때문이겠지요. 그러고보면 손이 두 개인 건, 박수로 격렬하게 응원하라는 신의 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Y. 그대가 언젠가 저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당신의 난데없는 문장에 놀라 한동안 생각에 빠져야만 했었지요. 제가 그대를 도왔던 일들이 그대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인지, 아니면 저의 말없는 응원이 투명하게 가닿지 못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속상한 심정으로 응원의 마음을 담아 그대에게 답신을 해야만 했었지요.


'그대는, 에게 단 한번도 걸림돌인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당신을 아끼며 좋아하게 된 일이 걸림돌이라면, 걸림돌이겠지만, 그걸 걸림돌이라 말하지는 않지요. 우리는 그걸 인연이라 부릅니다. 언제나 당신을 응원합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그곳이 저도 좋아지는군요.'


침묵은 거짓되고, 피상적인 말들이 반성하며 돌아가는 고해성사라 여겨온 저에게 가끔씩은 의도된 문장들을 배달하는 일이 필요하다 생각하게 되었지요.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르 위고'는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행복은 우리가 사랑받고 있음을 획인하는 것이라 하였다지요. Y. 제 마음이 그대에게 부디 잘 가닿기를 바라봅니다.


둔탁한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뚫어버릴 듯한 소낙비가 거세게 내리는군요. 패어진 웅덩이에서 생겨나는 투명한 공기 방울들은 희망이 호흡하듯 부풀어 올랐다, 터지기를 반복합니다. 희망이 터질세라 오늘은 운전을 조금 더 조심히 해야겠어요. 샌프란시스코행 야간열차를 타야하는 출장 일정이 다가오고 있어,  전에 잡초들이 무성한 서재를 조금 더 다듬고 정리해 두려합니다. 문예창작학과의 입학식과 개강일이 출장일과 겹쳐서 첫날부터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되었지 뭐에요. 사이버 대학이지만, 오프라인 프로그램있기에 글을 배우는 이들과 함께 한다는 설렘과 떨림으로 가을을 준비합니다. 바쁘게 지내는 시간들이 저를 촉하지만, 살아가고 있는 듯해서 충만하기만한 나날입니다. 페달올려진 발이 무거워지니, 차창 밖의 풍경도 빠르게 사라져 가는군요. 비바람에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지 않을걱정이 앞섭니다.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하늘의 품에서, 빠르게 번져오는 검은 구름이 세상을 집어 삼키고 있습니다. 검은 구름 사이로 주홍빛 섬광이 하늘을 점멸시키기를 반복하는군요. 그것은 마치 슬픔과 아픔으로 채색되어진 짙은 침묵과 상실의 여백이 수놓은 수묵화처럼 보였습니다. 청개구리들은 다가올 시련을 맞이할 준비라도 하는 듯, 요란하게도 울어대었고, 까만 개미들은 바삐 나무를 오르내립니다. 까만 눈을 부릅뜨고, 다가오는 검은 구름 아래에서 백색의 섬광이 산허리에 내리 꽂히는 걸 보니,  한번 거세게 몰아치려나 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저에겐 더이상 두렵지가 않습니다. 그 너머에 파란 하늘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걸, 이젠 잘 알고 있으니까요.

친구는 요즘 일터에서 산적한 일들이 자꾸만 자신에게 맡겨진다며 힘들다고 하소연 합니다. 일을 잘하니 그런 것이라고 다독여 주며, 나쁜 사람들이라고 끄덕여 주었어요. 나쁘다며 공감해주니, 친구는 기분이 좋아지는 듯합니다. 무조건적인 응원은 사람을 일으키는데 압도적인 힘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내가 해줄 수 있없고, 옥수수밥이랑 된장찌개 해줄테니 한번 다녀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에서 먹었던 고슬고슬옥수수밥과 누릿된장찌개의 향기는 집이라는 추상적인 실체를 구체적으로 소환시켜 주는 매개체인 것만 같아요. 딱딱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기만 하는 콘크리트 건물은 사실 그저 건물일 뿐인 것이. 일상의 고단함을 마음 편히 하소연하며 내려놓을 수 있는 , 여행을 다녀온 후 온당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곳. 집은 평온과 안식줄 수 있표상적인 집합체가 아닐까요. 위로와 위안을 받고, 응원과 지지가 당연하게 자리하는 곳이기에 허름한 판자 지붕 아래에서 하늘을 덮고, 흙을 베고 누워도 모든 밤하늘이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곳집인 듯합니다. 어쩌면 저는 그동안 집이 없었고, 이제서야 집을 건축하는 중인지도 모르겠어요.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담아 친구에게 하얀 김이 피어나는 옥수수밥과 된장찌개를 선물하려 합니다.


우주는 우리들에게 침묵의 소리를 잘 들려주기 위해 깊은 밤을 선사하는 것만 같습니다. 침묵의 시간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그리고 의 영혼이 내는 소리를 잘 들을 수 있었지요. 그 소리에 공명하며 지나간 삶을 잘 접어서 보내 주었, 다가오는  다시 써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하얀 쌀을 우리고 불려 두고서, 뜨락에서 따온 옥수수를 소금물로 씻기고 길게 잘랐습니다. 달콤한 노란빛 냄새가 친구에게 힘이 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그가 혼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게 말이지요. 멸치육수를 우려내고, 땅이 스스로를 소진시켜 가득 안겨준, 고마운 고추와 대파, 애호박을 잘랐습니다. 소낙비가 지나고 손톱달이 수줍게 번져가는 밤은 대책없이 청량하기만한 대기와 깨끗해진  소리 푸짐하게 대접해 주는군요. 까만 밤의 침묵과 달빛의 부드러움 사이에서 대낮의 소란스러움과 서글픔은 지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저는 한참이고 입을 벌린 채, 웅크리고 앉아있기도 하지요.


'후아. 지치고 화가 난다. 근데 냄새가 너무 좋은데?

'어서와 고생많았어. 네거 지쳐보여서 일은 시키지 않을테니 밥이나 많이 먹고 가.'


불안과 용기의 경계에 모든 낮을 두려움 없이 맞이할 수 있는 건, 까만 밤처럼 보이지 않는 응원과 찬사를 보내주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여전히 그들이 그 자리에서  불러줄 것이라는 믿음이 저를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사람들 저마다의 가슴 에는 우주불꽃이 있고, 그걸 삶의 의미인 희망이라 한다면, 불꽃을 타오르게 하는 건, 어쩌면 '괜찮아. 다 잘될거야'라는 단 한문장인지도 모르겠군요. Y. 어리숙하고도 허접한 저이지만, 열렬히 응원할테니, 부디 그대의 일상이 굳건하길 바랍니다. 그대는 아마도 꼭 다문 입술을 살짝 기울여 웃어주시겠군요. 저 또한 더디고, 비록 늦었지만, 재촉하며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Y. 그대의 미소와 응원 덕분이었습니다.

그대의 모든 밤은, 그대의 모든 낮을 응원할 것입니다.

덧. 옥수수 밥: 흰쌀, 옥수수 두개, 소금

      된장찌개: 집된장, 두부, 애호박, 양파, 대파,

                        청양고추,느타리버섯, 으깬 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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