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아름다운 밤입니다. 조금은 지겨워지던 여름이 멋쩍어하며 물러나고,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니 조금은 서운한 듯, 여름이 아쉬워지는 밤이군요. 푸르스름하게 물든 가을밤의 하늘을 바라보며, 한 시절의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시간을 보냈습니다. 명절이 되면 사랑했던 이와의 흔적들이 더욱 사무치게 심장을 흔들어대기도 하니까요. 하루가 더해져 길어진 명절 연휴이지만, 건너편 할아버지네에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오히려 사라진 것만 같습니다. 모두들 좀 더 멀리 떠나버린 탓이겠지요. 먼저 가버린 자의 미련인 듯, 시들어버린 풀 위에 내려앉은 밤이슬이 괜스레 처연해 보이는군요. 소란스러운 명절일수록 고요함은 끝 간 데 없이 외로움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산 자들은 누구나 외로움과 살아가니, 결국 외로움도 상대적인 것일 테지요. 악을 쓰듯 옆집 할아버지를 부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서러움으로 퉁퉁 부은 듯합니다. 홀로 잠기는 일에 익숙한 듯 보이셨지만, 명절만은 견디기가 어려우신가 봅니다. 초라해진 듯한 자신을 악다구니로 일으켜 세우려는 모습에서 짙은 연민이 밀려옵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양갱을 사들고 내일은 찾아뵈려 합니다.
할아버지가 널어둔 하얀 이불 홑청이 햇살을 머금은 채, 눈이 시릴 만큼 부서집니다.
명절 연휴의 한 조각을 아이들과 보내다가 아이들을 전 아내에게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앞으로도 익숙해질 수 없기에 그 순간이 올 때면 저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하염없이 더듬거립니다.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너무나 반가운 듯 웃지만, 또 너무나 아쉬운 듯, 길게 늘어지는 눈빛의 흔적을 남기곤 하지요. 명절이 되면 반복적으로 겪어야 하는 일임을 이제는 잘 알고 있지만, 아직도 아이들의 짧아지는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군가가 저의 심장을 얼음송곳으로 날카롭게 찔러 물을 받아내는 것만 같습니다. 그럴 때면 안쓰러운 저의 모습에 그저 눈을 감아야만 하지요. 중간고사를 망친 것만 같다며 투덜거리는 첫째에게 더 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면 되었다고, 그 보다 아빠의 서재에 있는 책을 몇 권씩 가져가서 읽는 네가 더 대견하다며 다독여 주었습니다. 얼마나 기특하던지 제가 우쭐해지기도 했지요. 첫째는 자신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기나 할까요.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낸 후, 가을 농사를 준비합니다. 묽어진 작물들과 말라버린 잡초들을 걷어내고, 흙을 뒤엎었지요. 까만 흙 속에서 항의하는 지렁이들을 보며 생각합니다. 아주 아주 특별한 생명들. 지구상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삶들. 산 것들의 배설물과 죽은 것들의 육신은 흙에 양분을 주고, 꿈틀거리는 걸음들은 흙 속에 숨길을 만들어 주지요. 지렁이는 자신을 낮추어 숨어서 살아가지만, 스스로가 얼마나 귀하고 귀한 존재인지를 모르겠지요. 가만히 보면 지렁이들도 크기며, 색깔이며 모두 다 다르고, 그들 하나하나는 고유한 특별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김새는 주름지고 물컹하고 아무것도 아닌 듯 여겨져도, 지렁이가 없는 땅은 작물이 자라기 어려운 죽은 땅입니다. 그래서 지렁이를 마주할 때면 흙으로 다시 덮어주지요.
친구가 자신이 쓴 소설의 일부를 보여주고 싶다며 서재에 방문한다 합니다. 혼자 있을 저를 생각하는 마음이 와닿습니다. 요즘은 누군가가 시골에 오겠다고 하면 무엇을 만들어서 먹이고 보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게 되는군요. 햇살이 관통해서 반짝거리는 흙먼지 입자를 따라가다 보니 동그란 호박들이 수줍게 숨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람이 한걸음에 달려와 키워낸 특별한 호박들을 듬성듬성 썰어 넣고, 들깨가루 가득한 뜨듯한 칼국수나 한 그릇 말아주어야겠습니다. 요즘 소설 쓰는 일에 심취해 있는 친구는 아는 것도, 배운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지요. 그런 친구를 보고 있자니 문득 한 권의 책에 시선이 닿습니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 읽어봤어?’
‘아니, 어떤 내용이야?’
‘음... 너처럼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고슴도치의 우아함’은 부유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아파트에서 몇 년간 수위로 일해 온 쉰네 살의 르네와 르네가 관리하는 아파트의 부유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열두 살 된 팔로마의 이야기입니다. 르네는 평범한 건물 관리인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그만의 공간인 관리인의 방에는 문학과 영화, 회화와 현상학 서적에 이르기까지 지적 산물들로 가득하며, 심지어 그는 ‘톨스토이’를 경외해서 고양이 이름까지도 ‘레옹’이라 지었습니다. 타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자신을 낮춘 채 살아가지만, 동백꽃 한 송이에 운명의 힘을 믿는 이는 얼마나 특별한 인간인가요.
‘중요한 건 죽는 순간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다. 다가오는 6월 16일, 나는 건설하며 죽고 싶다.’
「뮈리엘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평범하지 않은 바람을 일기에 적어두는 팔로마는 뛰어난 기억력과 사고력을 가진 반항심 넘치는 천재적인 열두 살 소녀입니다. 그는 열세 번째 생일날 자신의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아파트를 불태워 버리고는 건설하며 죽고 싶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준비하고 있지요. 참으로 발칙하지만, 한없이 사랑스럽기만 합니다. 그런 팔로마는 르네의 특별함을 알아보지요. 르네와 팔로마는 지렁이처럼 세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숨긴 채, 그들만의 세계를 확장해 가며, 감정과 사고의 바다에서 하얀 거품을 따라 유유히 유영합니다. 그들은 소모적인 선입견과 편견들을 생산하는 직업과 나이, 학력과 외모, 처한 외적 조건들이 결코 삶의 진실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건물의 다른 주민들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들의 망막에 사로잡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그들을 무시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무관심한 속물 부르주아들이지요. 이들과 투명한 벽을 쌓고 살아가는 르네와 팔로마이지만, 그들이 간절히 원한 건, 어쩌면 사람들의 따듯한 관심과 다정한 목소리인지도 모르겠군요.
특별한 호박을 소중한 친구에게 전할 수 있어 맑은 하늘만큼이나 마음이 화사해지는군요. 호박을 자르는 저에게 르네와 팔로마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친구는 깜빡입니다. 친구의 또렷한 눈빛에 제가 특별해진 존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러던 어느 날 깨어있는 심장과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오즈가 르네와 팔로마가 살아가는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그들의 운명은 다른 모습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지요. 우주를 움직이는 건 역시나 사랑인 것만 같습니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먼 곳에서부터 번져오는 주홍빛 하늘처럼, 자신을 사랑해 주고 발견해 주는 또 다른 우주가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는 너무나 황홀한 것일 테지요. 르네는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봐 준 오즈로부터 ‘안나 카레리나’를 선물 받고서 무덤 속 평화를 무너뜨리며, 세상과 삶을, 그리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순간,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수많은 책과 예술 작품들이 무슨 소용일까요. 그녀 스스로가 한 편의 시가 되었고, 한 권의 책이 되었으며, 한 곡의 음악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염없이 웁니다.
‘나는 운다. 참을 수 없어 뜨겁고 굵은 행복의 눈물을 흘린다. 내 주위의 세계는 함몰되고, 동행인 이 남자의 시선에 대한 내 감각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느낀다. 내 손을 친절하게 잡고,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열기로 나에게 웃음 짓고 있는 이 남자.’
「뮈리엘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호박을 썰고 있는 저에게 친구가 자신이 쓴 소설의 일부를 멋쩍어하며, 넌지시 보여줍니다. 가만하게 한 장, 또 한 장 읽다가 저의 눈동자와 손끝이 조금씩 흔들리는군요.
‘...주인공 삶이 나와 비슷한데?’
‘맞아. 내 소설의 모티브가 된 사람.’
‘소설 속 캐릭터는 좀 특별한 사람이 좋지 않을까?’
‘특별해서 모티브가 된 거야. 넌 특별해.’
르네의 울음은 아마도 심연 깊은 곳에서부터 봇물 터지듯 갑작스레 솟아오른 눈물이었겠지요. 호박을 썰다 저도 모르게 안구에 물이 차오릅니다.
‘순간 내 임무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치료 가능한 다른 사람을, 구원될 수 있는 사람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구할 수 없다고 불안에 빠져있지 말고. 그러면 나는 의사가 되어야 하나? 아니면 작가가? 그건 약간 비슷하다. 안 그런가?’
「뮈리엘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치유되지 못한 아픔들은 그것을 자꾸만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그들의 상처가 어렴풋이 전해져오곤 하지요. 그들의 상처는 어찌해야 좋을까요. 저 또한 한 시절의 인연이 낳은 외로움과 상실감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걸 압도할 만큼의 사랑에 대한 기억이 있기에 저는 자랄 수 있었고, 앞으로도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덧없어 보이는 삶을 살면서 조금은 울기도 하고, 조금은 아프기도 하지만, 즐겁고 재미있게 살다 왔다고 신 앞에서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건, 누군가에게 저는 특별하고도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믿음 하나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오랫동안 묵혀온 외로움과 상처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르네는 안타깝게도 거지 제젠을 구하려다가 그만 사고로 죽게 됩니다. 삶이 참으로 모질스럽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와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삶에 기적 같은 변화를 가져오기에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글은 써볼 만한 것이라고 되뇌게 되는군요.
‘중요한 건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 뭘 하는가라고, 죽는 순간에 난 뭘 했지? 내 가슴의 온기 속에 이미 준비된 답을 가지고,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을 만났고,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뮈리엘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한참 동안 이 구절에서 시선이 멈춰있어야만 했지요. 자명한 법칙처럼 죽음의 순간이 오면 저는 무얼하고 있을까요. 아니,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까를 생각합니다. 르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심장이 발끝에 닿는 듯 슬펐지만, 죽음에 이어 발밑으로 배달 된 그녀의 숭고함에 밤이 이울도록 책을 덮을 수가 없었지요. 숱한 절망과 대책 없는 슬픔이 이어지는 삶이라도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는 이들이 있다면, 삶은 결코 우리를 조각 내지 못할 거라는 진실을 손에 꼭 쥘 수 있었습니다. 의식의 소멸이 있는 날까지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그런 건설을 하고 싶다는 다짐을 했었지요.
시골의 글 쓰는 책방 할아버지라는 꿈은 그저 헛되게 흩어져버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멸치 육수를 끓이고, 느타리버섯과 대파. 그리고 썰어 둔 호박을 담가 줍니다. 찬물에 헹군 면을 넣고 마무리하며 들깨가루를 넣었어요. 냄새가 너무 구수하다고 말해주는 친구에게, 덕분에 마음이 몽글해졌다며 소설이 기대된다고 얘기해 주었어요. 르네의 죽음으로 팔로마는 세상을 향한 날카로운 감정들을 뒤로하고, 자살할 생각을 깨끗이 지우고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진정한 건설의 방법을 찾아가지요. 팔로마는 타인을 연민하고, 사랑할 줄 아는 낡지 않고, 깨어있는 성숙한 어른으로 자랄 것이라는 확신이 드는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르네. 난 자살하지 않을 거예요. 난 아무것도 불 지르지 않을 거예요. 당신을 위해 이제부터는 다시는 속에서 늘을 찾을 거니까. 세계의 아름다움은 그것이니까.’
「뮈리엘 바르베리」‘고슴도치의 우아함’ 중.
호박의 부드러움과 들깨의 구수함이 헛헛한 속을 채워줍니다. 우리들은 소중한 존재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군요. 친구를 배웅하고, 저는 다시 가을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물빛이 깊어지는 건너편 호수의 윤슬과 얼마 남지 않은 감나무 잎에 흔들리는 바람의 속삭임, 작은 씨앗을 방울방울 매달고서 겨울을 준비하는 봉선화, 깊은 곳에서 물을 길어 올리느라 분주한 배추 잎사귀들. 가을의 풍경이 저의 남아있는 나날들을 선명하게 닦아내 주는 듯합니다. 그들이 저에게 자라라. 자라라. 고 말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세월이 흘러 책방 할아버지는 따듯한 난로 옆에 앉아, 눈이 내리는 논을 바라봅니다. 자신이 걸어온 삶에 대한 회한 없이 옅은 미소를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둡니다. 주홍빛 조명등이 온화하게 그의 얼굴을 비춥니다. 제 삶의 한 평도 되지 않는 자부심 중 한 조각의 사진으로 남게 되겠지요. 비록 착각일지라도 제가 특별하다고 알려주는 소중한 친구. 그런 소중한 친구의 창에도 가을 향기를 실어 보냅니다. 들릴까요. 자라라. 자라라. 며, 우리에게 속삭이는 우주의 외침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