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계절의 사이에서 눈을 조금 시릿하게 뜬 채, 겨울의 차가운 답서를 뜯어보는 밤입니다. 소란스럽게 창을 두드리던 바람도 별빛들이 수놓은 노래를 가만히 듣는군요. 어느덧 다시 찾아온 겨울이지만, 그저 얼어붙어만 가던 그 시절의 모습이 아니기에, 조금은 반갑기도 합니다. 삶의 진수는 어쩌면 겨울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나온 시절을 떠올릴 때면 제가 겨울의 나무가 되어간다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눈 꽃송이가 만발한 순백의 설원에서 홀로 서 있는 나무, 나뭇잎 하나 없이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만 남은 그런 나무 말입니다. 나무는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겨울을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희망이라는 흰 꽃도 피우겠다는 다짐도 하겠지요. 따뜻한 어느 계절에서 아이들이 놀다가 내려간 나무의 무렵에는 후회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다시 찾아올 아이들을 위해 인내하며 봄을 기다릴 뿐이지요. 겨울의 초입이지만, 겨울이 다시 데려올 봄이 이렇게나 설레는 걸 보니 제 삶이 따듯한 쪽으로 흐르고 있나 봅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하기에 흔들림 없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설렘 말이지요. 다가오는 겨울을 위해 저도 겨울에게 다가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벌써 목도리를 두른 건너편 할아버지가 큰 소리로 물어오시네요.
‘배추는 언제 뽑을려고? 좀 더 있으면 얼어버리니까 빨리 뽑아라.’
배추꽃을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고, 그냥 ‘네’라 대답하며 배추를 바라봅니다. 떠나간 것들보다 남겨진 것들에게서 희망을 보는 날들이 이어지는군요. 우연히 만난 배추꽃이 참으로 반갑겠습니다.
‘시트러스 향의 진줏빛 인연들이, 겨울을 이불 속에 잠재워 주었다.
나를 살피며, 다가오는 당신들이 있어, 창에 맺힌 하얀 서리가 맑아질 수 있었다.
겨울에 서서, 나는 이렇게나 설렌다.
당신들이 있어 내 삶이 따듯할 수 있기에.’
바람과 빛이 나부끼는 호수의 가장자리에는 파도를 닮은 갈대들이 가을의 끝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손끝으로 갈대를 만지다, 떨어진 낙엽을 주워서 돌아옵니다. 어느 책의 몇 페이지에 자리한 낙엽은 지금 이 순간을 국화차의 향기와 함께 언젠가 소환해 주겠지요. 계절과 계절의 사이에서 저의 심장에 박힌 많은 이야기들이 추억이 되기에 겨울을 넘는 일이 이젠 두렵지가 않습니다. 지난해 겨울, 날카로운 바람과 영하의 온도에도 딸기와 마늘은 빛 내린 옅은 대낮을 향해 손을 뻗고서 서로의 호흡에 기대어, 난폭한 겨울의 권세를 견뎠었지요.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그들의 손길에 빠알간 온도계는 영상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시린 겨울은 그들의 인연 앞에서 그렇게 물러나 주었습니다. 그들의 봄은 그들이 서로에게 닿으려고 한 흔적들 덕분에 빚어낸 완벽한 경이로움이었지요.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덮쳐오는 분노와 슬픔, 무기력감. 이런 감정들을 정화하거나, 희망을 함께 쓰고자 어쩌면 이들이 살아가는 시골 서재를 더욱 힘주어 빤히 바라보았는지도 모르겠군요. 나무의 이파리들이 흙으로 돌아가고, 어쩌다 내리는 빗물이 세상을 침묵시키며, 골목길의 찬바람이 돌아 나오는 계절이면 난롯불 앞에 턱을 괴고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다가올 봄을 위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끄적여 봅니다. 파종할 씨앗들, 부러진 쟁기, 이가 나간 모종삽, 넉넉하게 뿌려줄 거름, 반가운 친구의 전화... 줄 것이 있다며, 시골에 다녀가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추워서 불편할 거라 답했지만, 한사코 추우니 더 와보아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군요. 친구가 권해 준 ‘필경사 바틀비’를 읽으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서재를 좀 더 지피고, 노란 양동 주전자에 물을 조금 더 부어 데워야겠습니다. 함박눈이 쏟아질 것만 같은 그런 밤입니다.
‘안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 중.
벽들 사이에 서서 벽을 응시하며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던 감성적이고 온순한 바틀비에게서 자신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유령을 보고야 말았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 두려웠고, 자기 폄하와 자기방어에 급급했지만, 자존심만은 지키고자 했던 그 시절의 저 또한 유령이었습니다. 유령이 되어 몇 번의 계절을 지나 몇 번의 낮과, 또 몇 번의 밤을 견디고서야 저의 삶을 조금씩 선명하게 닦아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노닐다가 내려간 나무를, 깨끗하게 닦아낸 거울에서 보고 싶군요.
어린 친구는 언제나 발랄해서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곤 합니다. 동쪽으로 난 창을 통해 들려오는 친구의 엔진 소리에 산비둘기들은 길을 내어주고, 고라니는 건너가던 길에서 잠시 기다립니다. 전해줄 게 뭐냐며 묻는 저에게 손에 들린 청잣빛 조끼를 주며 입어보라 하는군요.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조끼가 너무나 따듯한 것인지, 조끼를 뜬 그의 마음이 다정한 것인지, 함께 홀짝이는 쵸코라떼가 달콤한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겨울의 좋은 날에 그저 발가락만 꼼지락거리는군요.
‘내가 줄 거는 없고, 배추나 좀 가져가. 아니면 한 포기만 겉절이 해볼까? 가져갈래?’
‘김치는 한 번도 안 담가 봤는데, 재밌겠다.’
깊은 흙 속에서 물을 길어 올리던 눈 내린 배추를 뽑아 소금물에 절이며, 친구에게 내 마음 같지도 않고,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우울증으로 죽은 직원의 이야기, 암 투병으로 휴직한 직원의 이야기, 환청이 들린다는 직원의 이야기, 가정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 자의 이야기... 저의 이야기가 될 수도, 누군가의 이야기일 수도, 또는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닐 이야기들이 소설처럼 다가와 저의 눈앞에 보여주었던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가 되어 흘러가더군요. 오랫동안 누군가의 삶을 대하는 업무를 해왔기에, 몸도 마음도 이제는 조금 쉬고 싶다고 괜스레 친구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절대적인 그의 지지를 들으며 처음 인사 부서로 오려 결심했던 그해 여름을 생각합니다. 얼굴 모를 누군가를 위해 해야만 했고,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기에 그 시절의 저에겐 어쩌면 약속이자, 다짐이었지요. 지켜낸 다짐들이 별것 아니라는 듯 홀대 받더라도 저를 살게 한 다짐을 지켜내었기에 이제는 조금 편히 내려두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친구도 제가 조금 더 평온하길 바란다고 하는군요. 그 말을 따라 걷다 보면 쏟아지는 함박눈을 함께 볼 수도 있겠습니다. 직원들의 선망이 되는 부서로 이동하기보다는 조금은 한가한 부서에서 내년에는 책을 좀 더 읽고, 글도 부지런히 쓰며, 문예창작학과 수업도 좀 더 성실하게 들어보려 합니다. 꽃씨들도 촘촘히 뿌리고, 피어나는 꽃들도 좀 더 자세히 오래오래 들여다보려 합니다. 자연이 내어주는 것들을 좀 더 마음 담아 포장하고 요리도 해보려구요. 산에서 산나물과 약초도 캐어 보고, 고라니를 조금 놀래키며 놀아도 보려 합니다. 자연이 읽어주는 경전을 믿고서 따라가다 보면, 흔들리지 않는 평온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눈빛을 조금 멀리 두고서 그렇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람이 전례가 없고, 몹시 부당한 방식의 위협을 받으면 그 자신이 지닌 가장 분명한 믿음마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것, 이것은 별로 드문 일이 아니다.’
「허먼 멜빌」‘필경사 바틀비’ 중.
사과와 새우젓, 양파와 생강, 그리고 마늘과 홍고추를 믹서기에 넣고 갈다가 바틀비를 떠올렸지요. 제도와 관계를 거부하며 그저 스스로의 존엄을 찾아 헤매다 쓸쓸하게 죽은 바틀비에게서 희석되지 않는 연민의 중량감에 그저 주억거립니다. 김장 김치와 다르게 소금물에 조금만 절여주고, 양념이 속까지 배어들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겉절이가 되는 일조차도 그는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못 한 듯합니다. 자신의 존재를 삶 앞에서 위장하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자신을 살아내려 했으나,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관계 속에서 존재가 규명되어짐을 그는 몰랐던 것일까요. 아니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한 극한의 방어였을까요. 저도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여전히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채, 느슨한 관계 맺기로 타협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남발하면서, 다음에라는 말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삶을 미루고 또 미루면서.
배추와 무를 썰던 친구가 그런 저를 이윽히 들여다보다 신춘문예에 공모할 시라며 들어봐달라 하는군요. 친구의 시는 슬프면서도 따듯했는데, 시는 슬펐으나, 시를 들려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따듯했지요. 겪어보지 못한 귀한 감정을 알려주는 친구에게 항상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더 크기만 한 걸 보니, 마음을 받는 일보다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 아직은 더 버거운 나날인가 봅니다. 친구와 귀 기울여 눈 내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습니다.
예쁩니다. 참으로 예쁘군요.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
온 세상이 매몰차게 외면해도 바틀비에게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있었다면 스스로 존엄을 지키려 그토록이나 죽을힘을 다하기보다는, 의지와는 무관하게 존엄되어지지 않았을까요. 친구 덕분에 겉절이를 무치는 제가 특별해지듯 말입니다. 떠나가 버린 것들과 무너져 내린 것들의 잔상을 찾아 헤매기보다 그들과 함께했던 약속의 시간을 꺼내어 보겠습니다. 그 시간이 있어 저는 존엄되어졌고,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겉절이에는 수육이랑 막걸리라는 친구의 주장에 떠밀리듯 동네 가게에서 장을 봐 왔어요. 하늘의 별도 푸짐하게 내리고, 호수의 윤슬도 푸짐하게 반짝이고, 밥상도 푸짐하게 차리고, 무엇 하나 푸짐하지 않은 게 없는 푸짐한 밤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겨울은 넘어서지 않고 조끼를 입듯 겨울을 입어볼 수 있을 것만 같군요. 불완전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저이기에 수많은 인연의 실타래를 엮으며, 앞으로도 조금 울기도 하고, 또 조금 웃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운명 앞에 체념의 일상과 단념의 표정을 헌사하고 싶지는 않기에 수도 없이 실타래는 휘청거리고, 꼬여가겠지만, 또 그만큼을 풀어내는 저를 지켜봐 줄 작은 마음들이 있어서 두렵지는 않습니다. 몇 날 며칠을 친구가 준 조끼를 입고서 거리를 걷게 될 것만 같습니다. 수시로 삶에 찾아드는 냉혹한 추위에 버튼을 눌러 서로의 온기를 켜고서 견뎌내는 사람의 월동을 ‘정(情)’이라 불러야 할 듯합니다. 속수무책으로 달려오는 인연과 운명들이야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은, 버티라며 주는 조끼 하나에 서슴없이 걸어갈 수도 있겠습니다. 비록 미소하고, 찰나일지라도 그것조차 없는 인연보다는 포악한 삶을 견뎌내기에 훨씬 나으리라 낡은 노트에 또박또박 눌러 적습니다. 냉혹하다고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감기보다는, 마음을 입혀줄 수 있는 겨울이라며 아직 오지도 않은 봄을 저는 설레겠습니다. 그러다 보면 봄을 기다리는 겨울의 나무에는 어느새 꽃을 피워낼 편지들이 하나, 둘 도착하겠지요. 따듯한 쌀밥, 줄무늬 양말, 수줍은 인사. 이런 따듯한 말들이 아마도 나무에는 여기저기 걸려있을 것입니다. 황량한 시절이지만, 다시 돌아올 따듯한 시절을 위해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모든 낮과 모든 밤이 저의 삶이 되고, 오늘의 한 걸음이 완연한 봄볕 아래 서있을 저를 생각합니다. 떠나가는 친구의 등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기도하듯 중얼거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