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얼음 같은 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스치다, 귓속에 파고들어 둔탁한 울림을 만드는 오늘 같은 날이면 난롯불을 좀 더 지피고, 두 다리를 감싸안고서 책장을 고요히 넘깁니다. 종이가 사각거리며 한 장씩 넘겨질 때면, 하루를 잘 보내준 것만 같아 심장이 평화롭게 숨을 쉬곤 하지요. 주먹을 가볍게 쥐어 입술에 대고서 양은 주전자의 뾰로통한 입에서 일어서는 하얀 김을 가만히 응시합니다.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상의 무렵들 속에서 심장에 품은 저의 꿈이 별빛처럼 반짝이다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밤하늘의 별은 수도 없이 사라지지만, 소멸하는 에너지로 또 다른 별을 잉태하면서 우주는 팽창한다 합니다. 흰빛을 머금고 파르스름하게 불타오르는 별은 부단히도 애쓰며 비록 미소한 명도이더라도 까만 하늘을 끈질기게 밝히지요. 눈물을 흘리며 까만 밤을 지나고 있을 사람들에게 말해 주고만 싶습니다. 어쩌면 저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를 말을.
‘아직도 저 딱딱한 흙을 뚫고서 여린 것들이 치솟아 오르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시나요. 지독스러운 까만 밤을 지나 박명의 빛이 번지리라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시나요. 회청빛 하늘 아래 놓인 저 검푸른 호수에 하얀 새 한 마리가 다시 찾아올 것임을 아직도 믿지 못하시나요.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이 우리의 분홍빛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고 있음을.
여전히 믿지 못하시는가요.’
언제부터였는지, 어디서부터였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데미안’이었던가. ‘싯타르타’였던가. 아니면 ‘어린왕자’였던가. 턱을 괴고서 작은 불을 밝힌 가느다란 초에 하얗게 촛농이 흘러내리듯 미약한 꿈을 꾸기 시작했었던 연약하기만 한 파르스름한 심지를 곰곰이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 바쁘게 살아오고 있었지만, 저는 결국 삶을 미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몇 년 전, 엄마 잃은 아이처럼 까만 방구석에서 홀로 쪼그리고 앉아 희미한 스탠드 전등 빛으로 하얀 동그라미를 만들며 창밖을 무심하게 건너다보곤 했었지요. 울었어요. 참으로 많이도 울었습니다. 어느날부터인가. 까만 벽면과 하얀 천장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하늘을 수놓고 있는 무수한 별빛과 그걸 바라보는 저만이 남아있더군요. 문득 손을 뻗어 별빛을 만지고 싶었는데, 터질 듯한 간절함으로 폭발하는 별을 부둥켜안고만 싶었는데. 그래서 별을 쫓아가려 널려있는 소주병들을 치워버리고 까만 펜과 빛바랜 낡은 노트를 서랍에서 꺼내 문장의 조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집요하게 달구고, 처절하게 두드리고 시뻘겋게 타들어 가는 언어를 다시 얼음물에 담그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별빛을 닮은 단단한 꿈이 태어나더군요. 꿈은 인간만이 가진 재능이라는 말처럼, 꿈을 그릴 수 없을 것만 같던 나이였지만, 살아있기에 저만의 꿈을 만년필을 붙잡고 지어먹기 시작했습니다. 하얗고, 윤기가 흐르고, 순백의 김이 부드럽게 번져나가는 꿈을, 한술 또 한술 떠서 비어 버린 혈관과 구멍 난 뼛조각들 사이로 흘려보내다 보니 어느새 저는 직립 보행을 하고 있더군요. 두텁고 딱딱한 나무껍질의 촉감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감각들. 길고, 깊고, 축축하고, 쿰쿰한 검은 터널에서 빠져나와 차창으로 쏟아지는 하오의 햇살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지요. 다섯 손가락을 쭉 펴고, 손가락 사이로 얼굴을 내밀던 파란 하늘은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날, 저의 삶은 비로소 전진하기 시작했으니까.
어느새 문예창작학과의 한 학기 수업이 지나고 새 학기 수업을 신청하는 기간입니다. 이십 년 만에 써보는 레포트와 긴장하며 치른 시험들이었지만, 캠퍼스도 잠시 거닐어보고, 장학금도 받게 된 시간들이 하얀 눈처럼 쌓였습니다. 처절하게 사라져야만 했던 청춘이 하얀 눈송이처럼 다시 찾아와 끈적한 손바닥 위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무엇도 두렵지 않던 그 시절의 우리는 조금 내리는 하얀 눈송이에도 입을 벌려 혀 위에 올려두고서 눈동자가 사라질 만큼 가늘게 뜬 눈으로 웃을 수 있었지요. 어쩌면 청춘이 아름다운 건, 떠오르듯 떨어지는 흰 눈에서 꿈이 내리고 희망이 소복이 쌓이고 있음을 발견하는 맑은 눈동자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차가운 결정체를 불그스름한 손으로 꼭 움켜쥡니다.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어요. 이번 학기에는 어떤 수업을 수강할 것인지를 논의해 보자며 들떠있는 친구였지만, 만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윗니를 살짝 보이는,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간 대답을 하였지요. 친구가 방문하겠다는 선언에 얼어버릴까 잠궈 두었던 수도꼭지를 왼편으로 조심스레 돌리고 차갑지만, 유리처럼 투명한 물을 흘려봅니다. 이토록 맑은 빛에 무엇을 씻기고 우려서 다시 태어나게 할까. 를 고민하다가 시들해진 배춧잎을 따서 말리고 냉장고에 얼려두었던 우거지가 떠올랐어요. 김치로 다 담그지 못해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배춧잎들. 어디에다 사용할지, 맛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던 흰 빛과 연둣빛 사이에서 헤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것들에게서 그 시절의 저를 보았습니다. 종이 한 장을 두고서 저와 우거지는 등을 맞대고 있었지요.
촛불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어둠처럼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도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너덜너덜해진 하잘것없는 우거지처럼 하염없이 맴돌기만 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저를 위해, 그리고 친구를 위해 우거지 국과 하얀 쌀밥을 지어야겠습니다.
문장이 단정하고 맑은 시를 주로 쓰는 친구는 이번 학기에 시학과 소설 수업을 수강하자며 머리칼 몇 가닥을 검지 손가락으로 꼬다가 주먹을 쥐는군요. 친구의 커다란 검은자위에는 진지함과 유쾌함, 부드러움과 단단함, 평온함과 열정이라는 단어들이 일렁입니다. 친구도, 저도 하얗고 노란 꿈을 향해 느리지만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가고 있는 듯해서 문득 글 동지들과 책 동무들과 함께 이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젊음이 그리 사무치도록 그립지만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저는 지금처럼 늙고 싶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하고, 꿈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희망이라 여겨지는 하얀 별빛을 향해 차분하게 걸어가다가 어느날 죽어가고 있음을 나의 혈관들과 근육들이 느낄 수 있게.
스쳤던 손끝의 감각을 나누었던 소중한 존재들과 조금씩 잘려 나갔지만, 동그랗게 마모된 예쁜 조약돌을 닮은 추억들을 살피며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조금은 굽은 어깨로, 흐릿해진 눈동자는 조금은 멀리 두고서. 아주 침착하게.
그렇게 죽어가고 싶습니다.
그러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저의 문장이 수필보다는 소설에 잘 어울린다는 친구의 말에 된장과 고춧가루를 넣은 우거지를 버무리다가 멋쩍게 웃긴 했지만, 책방지기이자 작가가 되고 싶은 저의 꿈을 친구의 언어가 풍로 바람이 되어 데워주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별것 아닌 긍정의 말들은 사람의 근육에 힘이 들어가게 합니다. 친구를 따라 저도 시학과 소설 수업을 주로 수강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다 조금 놀랐습니다. 몇 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여름과 겨울만큼이나 달랐으니까요. 마주해 달려오는 현실에 그저 안주하며, 소란스러운 마음을 떠들썩하게 즐기는 것으로 되메우는 일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던 제가, 지금은 일터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무를 가꾸는 자발적 고립에서 평온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그 대상만이 보인다고 했던가요. 저는 지금 밤하늘의 별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빛과 별빛에 이끌리듯 끈질기게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평안에 다다를 수도 있겠지요.
참기름과 다진 마늘,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어 양지머리를 볶다가 문득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떠오릅니다. 소설 속 달이 가닿을 수도 없을 듯한 이상과 감정의 영역이라면, 영국의 가장 낮은 화폐 단위인 6펜스는 언제나 만져지는 현실과 이성의 영역이었지요. 그래요. 소설 속 주인공인 ‘스트릭랜드’에게 달은 영혼의 안식처이자, 미치도록 갖고 싶은 희망이었습니다. 달의 뒷모습을 궁금해하며 뛰어가고, 하얀 별빛의 근원을 찾기 위해 쫓아갈 수 있는 의지는 젊음에 의존한 것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한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서머싯 몸」‘달과 6펜스’ 중.
고개를 수그리고 볶은 양지머리에 버무린 우거지를 넣고 조금 더 볶다가 잠시 주먹을 쥐어 명치를 쓸어내렸어요. 제 안에 누군가가 살아가는 것인지 명치를 자꾸 두드리고 만지는 것만 같습니다. 특히나 소설을 쓸 때면 통증이 아랫배까지 번져, 통각이 무수하게 생겨나곤 하더군요. 그런 저를 빤히 바라보던 친구의 마른 입술이 진지해질 때면 높임말을 쓰는 습관으로, 좋아하는 글 오랫동안 쓰고 싶으면, 커피를 줄여요. 담배를 끊어요. 라며 저를 질책합니다. 친구와 저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 때문인지 저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그저 주억거리고 맙니다.
‘생각을 정지시킬 수도 없고, 펜을 던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한 문장 또 한 문장을 긋습니다. 시간이 멎은 듯, 공간이 멈춘 듯.
그러고 나면 명치가 아파오는데, 그 통증이 꼭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차마 놓을 수가 없습니다.
체념만이 통증을 사라지게 할 것이기에 애쓰고 있는 한, 아픈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살아있기에 아플 수 있는 우리가 함께 견디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볶아둔 양지머리와 우거지에 멸치 육수를 조금 넣고 끓이고, 다시 좀 더 부어 끓이고, 가득 부어 끓입니다. 진한 양지머리와 우거지의 향이 서재의 천장과 바닥으로 스며드는군요. 대파와 콩나물, 청양고추를 마지막으로 넣어 조금 더 끓였습니다. 널브러지고 찢긴 우거지는 밤하늘을 부단히도 밝히는 별빛을 바라보며 꿈을 품었겠지요. 언젠가 사람의 빈 속을 채우며, 날카로운 얼음 단면 같은 한기를 쫓아내겠다 결심했겠지요. 결국 우거지는 볼품없어 보이는 꿈이지만, 삶에 의미를 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