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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Jan 27. 2024

별은 부단히도 밤 하늘을 밝힌다. _ 소고기 우거지국.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얼음같은 바람이 뺨을 날카롭게 스치다, 귓속에 파고들어 둔탁한 울림을 만드는 오늘같은 날이면 난로불을 좀 더 지피고, 두 다리를 감싸 안고서 책장을 고요히 넘깁니다. 종이가 사각거리며 한장씩 넘겨질 때면, 하루를 잘 보내준 것만 같아 심장이 평화롭게 숨을 쉬곤 하지요. 주먹을 가볍게 쥐어 입술에 대고서 양은 주전자의 뾰로통입에서 일어서는 하얀 김을 가만하게 응시합니다. 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일상의 무렵 속에서 심장에 품은 저의 꿈이 선명하게 보이고, 그리운 그대가 나란히 나타나는군요. Y. 그대의 밤 하늘도 이와 같으시겠지요.

그대도 알고 계신가요? 밤 하늘의 별은 수도 없이 사라지지만, 소멸하는 에너지로 또다른 별을 잉태우주는 팽창한다 합니다. 흰빛을 머금고 파르스름하게 불타오르는 별은 부단히도 애쓰며 비록 미소한 명도이더라도 까만 하늘을 끈질기게 밝히지요.

그대는 아직도 저 딱딱한 흙을 뚫고서 여린 것들이 솟아 오르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시나요. 지독스러운 까만 밤을 지나 박명의 빛이 번지리라는 것을 아직도 믿지 못하시나요. 회청빛 하늘 아래 놓인 저 검푸른 호수에 하얀 새 한마리가 다시 찾아올 것임을 아직도 믿지 못하시나요.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이 그대의 분홍빛 뺨을 다정하게 어루만지있음을,

그대는 여전히 믿지 못하시는가요.


언제부터였는, 어디서부터였는지,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데미안이었던가. 싯타르타였던가. 아니면 어린왕자였던가. 턱을 괴고서 작은 불을 밝힌 가느다란 초에 하얗게 촛농이 흘러내리듯 미약한 꿈을 꾸기 시작했었 연약한 심지를 곰곰히 생각합니다.

저는 분명 바쁘게 살아오고 있었지만, 저는 결국 삶을 미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년 전, 엄마 잃은 아이처럼 까만 구석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스탠드 전등빛으로 하얀 동그라미를 만들며 창밖을 무심하게 응시하곤 했었요. 울었어요. 참으로 많이도 울었습니다. 어느날부터인가. 까만 벽면과 하얀 천장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하늘을 수놓고 있는 무수한 별빛과 저만이 남아있더군요. 문득 손을 뻗어 별빛을 만지고 싶었는데, 터질 듯한 간절함으로 폭발하는 별을 부등켜 안고만 싶었는데. 그래서 별을 쫓아가널려있는 소주병들을 치워버리고 까만 펜과 빛바랜 낡은 노트를 서랍에서 꺼내 문장의 조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집요하게 달구고, 처절하게 두드리고 시뻘겋게 타들어가는 언어를 다시 얼음물에 담그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별빛을 닮은 단단한 꿈이 태어나더군요. Y. 그대가 그리던 꿈을, 제가 붓을 잡고 지어먹기 시작했습니다. 하얗고, 윤기가 흐르고, 하얀 김이 시야를 가리며 번져나가는 꿈을, 한술  한술 떠서 비어버린 혈관과 구멍난 뼛조각들 사이로 흘려 보내다보니 어느새 저는 직립보행을 하고 있더군요. 두텁고 딱딱한 나무결의 촉감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감각들. 길고, 깊고, 축축하고, 쿰쿰한 검은 터널에서 빠져나와 차창으로 쏟아지는 하오의 햇살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지요. 다섯 손가락을 쭉 펴고, 손가락 사이에 놓여있던 파란 하늘은 차마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날, 저의 삶은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문예창작학과의 한 학기 수업이 지나고  학기 수업을 신청하는 기간입니다. 20년만에 써보는 레포트와 긴장하며 치룬 시험들이었지만, 캠퍼스도 잠시 거닐어보고, 장학금도 받게 시간들이 하얀 눈처럼 쌓였어. 처절하게 사라져야만 했던 청춘이 하얀 눈송이처럼 다시 찾아와 끈적한 손바닥 위로 내려앉고 있습니다. Y. 그 시절의 우리는 조금 내리는 하얀 눈송이에도 입을 벌려 혀 위에 올려두고 눈주름을 깊이 잡고서 웃을  있었지요. 어쩌면 청춘이 아름다운 건, 떠오르듯 떨어지는 흰  눈에서 꿈이 내리고 희망이 소복히 쌓이고 있음을 발견하맑은 눈동자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손바닥 위에 내려앉은 차가운 결정체를 불그스름한 손으로 꼭 움켜쥡니다.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어요. 이번 학기에는 어떤 수업을 수강할 것인지를 논의해 보자며 들떠있는 친구였지만, 만나고 싶다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 윗니를 살짝 보이는, 입술 끝이 조금 올라간 대답을 하였지요. 친구가 방문하겠다는 선언에 얼어버릴까 잠궈두었던 수도꼭지를 왼편으로 조심스레 돌리고 차갑지만 유리처럼 투명한 물을 흘려봅니다. 이토록 맑은 빛에 무엇을 씻기고 우려서 다시 태어나게 할까를 고민하다가 시들해진 배춧잎을 따서 말리고 냉장고에 얼려두었던 우거지가 떠올랐어요. 김치로 다 담그지 못해 아무렇게나 누워있던 배춧잎들. 어디에다 사용할지, 맛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던 연둣빛 사이에서 헤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들에게서 그 시절의 저를 보았습니다. 종이 한장을 두고서 저와 우거지는 등을 맞대고 있었지요. 촛불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어둠처럼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도 어스름하기만 했습니다. 너더너덜해진 하잘것없는 우거지처럼 하염없이 맴돌기만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저를 위해, 그리고 친구를 위해 우거지 국과 하얀 쌀밥을 지어야겠습니다.

문장이 단정하고 맑은 시를 주로 쓰는 친구는 이번 학기에 시학과 소설 수업을 수강하자머리칼 몇가닥을 검지 손가락으로 꼬다가 주먹을 쥐는군요. 친구의 커다란 검은 자위에는 진지함과 유쾌함, 부드러움과 단단함, 평온함과 열정이라는 단어들이 일렁입니다. 친구도, 저도 하얗고 노란 꿈을 향해 느리지만 잘 걸어가고 있는 듯해서 문득  동지들과 책 동무들과 함께 이렇게 늙어갈 수만 있다면 젊음이 그리 사무치도록 그립지만은 않을 듯하군요.


'그리운 Y. 지금처럼 늙고 싶습니다.

고요하고 평온하고, 꿈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희망이라 여겨지는 하얀 별빛을 향해 차분하게 걸어가다가 어느날 죽어가고 있음을 나의 혈관들과 근육들이 느낄 수 있게. 스쳤던 손끝의 감각을 나누었던 소중한 존재들과 조금씩 잘려 나갔지만, 동그랗게 마모된 예쁜 조약돌을 닮은 들을 살피며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게. 조금은 굽은 어깨로, 흐릿해진 눈동자는 조금은 멀리 두고서. 아주 침착하게.

그렇게 죽어가 싶습니다.

그대는 어떠신지요.'


저의 문장이 수필보다는 소설에 잘 어울린다는 친구의 말에 된장과 고춧가루를 넣은 우거지를 버무리다 멋쩍게 웃긴 했지만, 책방지기이자 작가가 되고 싶은 저의 꿈을 친구의 언어가 풍로 바람이 되어 서재를 데우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친구를 따라 저도 시학과 소설 수업을 주로 수강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다 조금 놀랐습니다. 년 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여름과 겨울만큼이나 달랐으니까요. 마주해 달려오는 현실에 그저 안주하며, 소란스러운 마음을 떠들썩하게 즐기는 것으로 메우는 일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던 제가, 지금은 일터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무를 가꾸는 자발적 고립에서 평온을 찾고 있습니다. 사랑에 빠지면 그 대상만이 보인다고 했던가요. 저는 지금 밤 하늘의 별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Y. 눈으로 하얗게 덮혀있을 지금 그대가 서있는 그곳에도 달빛과 별빛이 끈질기게 그대를 비추있겠지요. 이끌리듯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언젠가 평안에 다다를 것입니다.

참기름과 다진마늘,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어 양지머리를 볶다문득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가 떠올랐어요. 소설 속 달이 가닿을 수도 없을 듯한 이상과 감정의 영역이라면, 영국의 가장 낮은 화폐 단위인 6펜스는 언제나 만져지는 현실과 이성의 영역이었지요. 그래요. 소설 속 주인공인 '스트릭랜드'에게 달은 영혼의 안식처이자, 미치도록 고 싶은 희망이었습니다. 달의 뒷 모습을 궁금해 하며 뛰어가고, 하얀 별빛의 근원을 찾기 위해 쫓아갈 수 있는 의지는 젊음에 의탁한 것이 아닌, 밀도 높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에서 잉태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치고 못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중. -


'모든 인간은 그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

 - '괴', '파우스트' 중.-


고개를 수그리고 볶은 양지머리에 버무린 우거지를 넣고 조금 더 볶다가 잠시 주먹을 쥐어 명치를 쓸어내렸어요. 제 안에 누군가가 살아가는 것인명치를 자꾸 두드리고 만지는 것만 같습니다. 특히나 소설을 쓸 때면 통증이 아랫배까지 번져, 통각이 무수하게 생겨나곤 하더군요. 그런 저를 빤히 바라보던 친구의 마른 입술이 진지해질 때면 높임말을 쓰는 습관으로, 좋아하는 글 오랜동안 쓰고 싶으면, 커피를 줄여요. 담배를 끊어요.라며 저를 질책합니다. 친구와 저 사이에 놓인 세월의 간극때문인지 저는 보일듯 말듯 웃으며, 그저 주억거리고 맙니다.


'생각을 정지시킬 수도 없고, 펜을 던질 수도 없습니다. 그냥 담담하게 한 문장 또 한 문장긋습니다. 시간이 멎은 듯, 공간이 멈춘 듯. 그러고 나면 명치가 아파오는데, 그 통증이 꼭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아서 놓을 수가 없습니다. 체념만이 통증을 사라지게 할 것이기에 애쓰고 있는 한, 아픈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렇지만 그대는 부디 아프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대 몫까지 아프겠습니다.'


볶아둔 양지머리와 우거지에 멸치육수를 조금 넣고 끓이고, 다시 좀  부어 끓이고, 가득 부어 끓입니다. 진한 양지머리와 우거지의 향이 서재의 천장과 바닥으로 스며드는군요. 대파와 콩나물, 청양고추를 마지막으로 넣어 조금 끓였습니다. 널부러지고 찢겨진 우거지는 부단히도 밤 하늘을 밝히는 별빛을 바라보며 꿈을 품었겠지요. 언젠가 사람의 빈 속을 채우며, 날카로운 얼음 단면같은 한기를 쫓아내겠다 결심했겠지요. 결국 우거지는 볼품없어 보이는 꿈이지만, 삶에 의미를 다하였습니다.

보고싶은 Y. 깨끗한 별이 부단히도 밤 하늘을 밝히는 건, 그대를 비추기 위함임을.

여전히 믿지 못하시는가요.

덧.

주재료: 소고기 양지머리, 우거지.

부재료: 콩나물, 대파, 고추, 된장.

양   념: 고춧가루, 다진마늘, 새우젓, 참기름, 국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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