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세상은 고요하고,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습니다. 박명의 빛을 데려올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눈두덩을 살며시 손바닥으로 두 번 누르고 다 뜨지 못한 가는 눈으로 단정한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동녘 하늘이 밝아오기 전에 저는 잠에서 깨어 마른기침을 조금 뱉어내고, 동그랗게 모로 누운 육신을 일으켜 크게 숨을 내어 쉽니다. 천천히, 묵직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엎드려 숨죽이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이제는 충분히 통과했다고 적습니다. 아직 여물지 못한 새벽녘 어스름을 응시합니다. 푸르스름한 빛과 함께 어느새 사위는 밝아지고 붉은빛의 하늘은 마른 한지에 습이 번지듯 단호하게 세상을 일으켜 세웁니다. 지금 어디에선가 따듯한 우유 한잔과 함께 무릎을 세우고, 한 손으로 다리를 감싸안고서 제가 바라보는 똑같은 빛을 보고 있을 이들을 생각합니다. 이제 일어서야겠습니다. 맑은 물에 쌀을 두홉 씻어 안칩니다. 새벽과 한밤의 사이에서 시작이라는 단어를 노트에 적으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합니다.
‘거긴 좀 어떠신가요.
새로운 곳의 물과 식사는 잘 맞으시나요.
불면의 밤은 사그라들었나요.
그곳에도 부드러운 봄의 입술은 느껴지나요.
흰 눈을 걷어내고 갓 태어난 여린 연듯빛은 보았나요.
그곳에서 무엇이 새겨진 책을 더듬고 있나요.
삶을 다시 시작할 준비는 되었나요.
언제까지나 당신의 시작을 응원할 저의 언어가 들리시나요.’
며칠 전, 교육원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시험에 합격하고서 임용을 기다리는 신규 임용자들에게 대화 형식의 강의를 진행해 줄 수 있겠느냐는 의뢰였지요.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수화기 저편에서 직장과 꿈을 주제로 저에게 강의를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강의를 하냐. 라는 생각에 두 눈을 깜박이다가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지만, 담당자의 설득에 이내 빗장을 풀고서 알겠습니다. 라는 답변을 했었지요. 봄빛 가득 내린 삼월 말에 예정되어 있는 신규 임용자들에 대한 강의를 아직 오지 않은 봄을 설레며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라 할까, 반갑습니다. 라 할까, 아니면 축하합니다. 는 어떨까. 어떤 인사로 시작해서 무슨 말들을 들려주고 어디즈음에서 그들의 마음을 떠오르게 할까를 생각합니다. 출간된 저의 책도 알려볼까하는 얄팍한 욕망이 잠시 머리를 치들었지만,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시작하는 이들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마음이 무의미한 욕심을 잠재웠지요. 수많은 언어들 중에서 저를 일으켜 흙을 딛게 한 것들, 저의 안에서부터 시뻘겋게 타오르는 것들, 사나운 삶 앞에 세워진 저를 변호해 줄 명징한 징표들. 문장들을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제가 걸어온 길의 시작을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한 획의 시작에는 그리움, 간절함, 설렘, 흥분, 두려움, 그리고 사랑. 이런 단어들이, 내려앉은 나뭇잎처럼 무수하게 널려 있더군요.
나뭇잎을 집어 들면, 그래서 오래 침묵하게 됩니다.
빗방울 열차를 탄 입춘은 지나갔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소슬하고, 나무의 딱딱한 표면은 여전히 냉랭합니다. 창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봄을 환영하기 위해 백열등을 켜고, 삽과 거름 포대를 들고서 밤공기를 깊숙이 들이마시고 내뱉습니다. 거름 포대에 삽을 쑤셔 넣었다 들어 올려, 입김이 희뿌옇게 번져가는 허공을 향해 흩뿌립니다. 공기 중에 부유하는 거름과 흙, 나무들의 잔향을 크게 마시면 제 안에 순하고 무해한 풀죽들이 실핏줄 끝까지 흐르는 것만 같습니다. 푸르스름한 고요의 향기를 채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저는 견뎠고, 잃어버렸으며, 다시 찾았던가요. 억장이 무너져 주먹을 쥐어 가슴을 치고 있을 때, 솜털이 돋아나 반짝거리며 저에게 내밀던 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요.
고마웠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지요.
몇 년 전 뼛속까지 파고드는 겨울의 한기를 맞으며 저는 땅 위에 서있었습니다. 서글픈 어느 한 시절의 무렵이었지요. 마치 진공으로 포장된 비닐 안에서 밖을 향해 굴절된 사물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는데, 웅웅거리기만 하는 무언가의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는데, 알 수 없는 정체들이 두려워 그저 텅 비어 버린 진공 속에서 못 들은 척, 못 본 척 밖을 기웃거렸지요. 캄캄한 동굴 안에서 밖을 살피며,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앞에서 머뭇거려야만 했었습니다. 사라지고 남아있는 잔해들 속에서 그동안 무엇을 채우려 애써왔는지를 미간에 세 줄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생각했습니다. 무엇으로 이 지독한 삶을 채워야 할지를 말라버린 갈색빛 입술에 침을 달싹이며 중얼거렸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가진 것들이 사라지니 채워야 할 것들, 채울 수 있는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걸 알게 되더군요.
저는 새벽의 이슬 품은 나뭇잎을 만지고 싶었습니다. 강건한 나무 표피에 입술을 두고만 싶었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깨어난 지렁이를 따라가다 달팽이랑 멋쩍게 눈 맞추고 싶었습니다. 동네 강아지와 고양이들과 서스름없이 걷고도 싶었습니다. 간혹 다녀가는 좋은 이들에게 저 사는 거 보여주며 눈주름을 깊게 잡고서 웃어주고도 싶었습니다. 제 이름 석자가 가지런히 박인 책들이 저의 책방에 단정하게 꽂혀있길 바랐습니다. 사랑도. 우정도. 행복도. 꿈도.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타일러 오빠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를 연상시킨다고 했다. 그때 내가 이해한 한 가지는, 내가, 나 자신을 믿어도 된다는 것, 내 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지자가 자기 안에 가지고 있던 그 무언가는 여자든 남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스스로 타고난 본연의 가치.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가치라는 사실 말이다.’
「타라 웨스트 오버」‘배움의 발견’ 중.
문득 흙을 갈다가 친구가 권해 준 ‘타라 웨스트 오버’의 ‘배움의 발견’이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소설이라 여겨지는 이야기가 에세이였다는 사실에 저는 한동안 목덜미가 서늘해지기도, 귀밑머리 아래로 땀을 흘리기도 했었지요. 그녀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구속하던 집을 벗어나, 배움을 향해 전진하며 자아를 확장하고 끝끝내 자신을 찾고야 말았습니다. 집을 벗어날 때, 그녀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또 얼마나 모멸스러웠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견뎌야 했을까요. 현실과 눈 앞에 펼쳐진 세상 간의 낙차가 주는 온도는 얼마나 차가웠을까요. 결국 삶은 그녀의 용기와 도전 앞에서 길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시트러스 향이 가득 피어나는 길을 말입니다. 그래요. 그녀는 하버드대학 교수가 되었지요. 소설이 아니기에 더 아프고, 아름다운 이야기. 어쩌면 시작하는 모든 이들이 이런 마음이 아닐까요. 알을 깨어 부수는 고통처럼 모든 시초에는 고통이 등을 맞대고, 서로를 밀어내려 애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살피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을 시작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봄이 되면 찬연한 햇살 아래에서 진분홍빛 매화꽃도 피고, 하얗게 배꽃과 자두꽃도 피고, 연분홍빛 살구꽃과 복숭아꽃도 피고, 봄날의 서재는 밤새 불을 밝히겠지요. 서재를 가꾸기 위해 육중한 삽을 들었던 날.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어여쁜 것들을 상상하며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돌아와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 먹었었지요. 시작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면 저의 망막에는 왜 소고기 미역국의 잔상이 나타날까요. 브런치 스토리라는 플랫폼에서 작가 신청이 승인된 날도, 첫 책을 출간한 날도,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먹고서, 글을 지어먹었습니다. 태어난 아이를 제 손으로 거두었던 그날의 기억도, 열 사흘쯤 된 달의 하얀빛이 번지듯 골수에 사무쳐오는군요.
‘십여 개월의 산고 끝에 까만 방 안에서 발가벗고서 핏덩어리를 부둥켜안았는데. 탯줄을 잘라내어서인지 어찌나 울어대던지. 피얼룩으로 붉게 칠해진 그 자그마한 육신을 심장에 감싸안고서 가만히 누워, 맞댄 심장을 느꼈는데. 불가해한 처음 느껴본 감각들. 기적이 만져진다면 아마도 이렇게나 뜨겁고 부드럽고 물컹하고 연약한 느낌이리라, 생각했는데. 눈을 감은 채 아이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는데.
울고 있는 아빠라는 세상을.’
암막 커튼을 두른 까만 방의 구석 한 켠에다 스탠드 조명 하나만을 여리게 밝혔습니다. 두려움과 긴장, 설렘과 떨림. 이런 언어들이 조명빛 아래에서 산란하고 있었지요. 산파는 세상 밖으로 아이가 나올 수 있게 도와주라 하더군요. 핏덩어리가 제 손에 이끌려 경계를 넘었을 때, 세상은 특별해졌음을 아이는 알고 있을까요. 핏덩이를 한참 동안 가만히 안고 있었던, 척추에 전달되는 뻐근한 고통이 파고들었던, 뒤틀린 듯한 팔과 다리의 경련이 살갗을 스며들었던. 속수무책으로 건너오던 감동과 고통들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명징하게 알려주는 것만 같았지요. 미리 한 솥 끓여둔 소고기 미역국을 데워 한 사발 떠서 아내에게 건네고, 또 한 사발 떠서 저는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먹었습니다. 맛있더군요. 참으로 맛있었습니다. 눈물 섞인 미역국은 고생했어. 라 말해주는 것만 같았지요.
마른미역을 맑은 물에 담그고, 냉동실에 얼려둔 양지를 꺼내 참기름에 볶습니다. 강의 교안을 생각하다 결국 미역국을 끓이고야 맙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헤르만 헤세」‘데미안’ 중.
반쯤 볶아둔 양지에 풀어헤쳐진 검녹빛 미역과 들깨가루를 넣고서 조금 더 볶았습니다. 은밀한 친밀감이 맡아지는 구수한 들깨가루의 향기가 서재의 창틀에 끼어 밖을 향해 달려 나가려 하는군요. 멸치다시물을 한 바가지 부어두고 뜨락을 걸어봅니다. 겨울이 지나가는 감각들이 선명해집니다. 깨끗한 달빛은 서재를 은색으로 물들이고, 호수의 잔물결은 간지럽습니다. 잔털 가득한 백목련의 꽃봉오리를 살짝 누르면 봄의 하얀 단내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아직 다 오지 못한 봄을 마중하기 위해 말라버린 잡초의 파편들을 걷어내고, 우주를 품은 씨앗들의 자리를 만들어 갑니다. 날카로운 결정체들로 묶여 있던 흙들은 고슬고슬하게 해방됩니다.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처절하게 바라보던 희망들이 이 길의 끝에서는 세로로 뻗은 햇살 줄기를 가르며 언젠가 나타나 줄까요.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던지는 끝없는 질문들과 의미를 숨긴 듯한 고통들을 마주할 때면, 그저 가없이 펼쳐진 검은빛 바다에 홀로 남겨진 것만 같습니다. 어떠한 의지에 대한 무게감이 없이 그저 발을 들어올려야 할 때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인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힘껏 끌어안을 힘이 우리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그래서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을 용기 내어 침착하게 기다려도 괜찮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의 새벽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