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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Jan 03. 2024

괜찮으니, 살아가요. _ 쌀 떡국.


 ‘우리 내면에는 언제든지 들어가서 자신을 회복할 수 있는 고요한 성소가 있다.’

                                                                    「헤르만 헤세」   

  

 서재에는 간밤에 눈이 내렸습니다. 건너편 호수가 얼고, 새하얀 눈 꽃송이들이 그 위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오랜 문학기행을 떠난 친구를 생각합니다. 지금쯤 소금 옷을 입은 삿포로를 거닐고 있을까요. 우듬지에 매달려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는 눈송이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요. 상처받은 마음과 불안의 기습에 조금 쉬고 싶다며 여행을 결심했던 그날의 바람을 친구가 부디 찾아서 돌아오길 바라봅니다. 친구가 없는 하늘이 조금 허전하기는 하지만 친구가 돌아올 때면 저의 책을 한 손에 들고 그의 동그란 미소를 만나러 갈 수 있겠지요.

 저는 올 한 해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삶의 결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아무래도 무겁기만 한 운명이라는 수레를 굴리는 주체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지요. 제가 어느날 숨이 끊어질 순간이 온다면 반드시 떠올리게 될 저의 첫 책을 얼마 전에 만났습니다. 나무를 자르지 않은 재생 용지로 만들어진 책이기에, 많은 이들이 가만히 함께 기다려준 책이기에,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인세 전액을 기부할 책이기에 저의 심장에 더 깊이 박여 저를 죽음 앞에서 변호해 줄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수많은 소망을 떠올리지만, 사실 전 단 하나의 희망을 생각합니다.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턱은 조금 더 들어 올리고 죽음의 선고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기를 다짐하곤 하지요. 일터의 업무적인 특성 때문에 갑작스러운 죽음들과 스스로가 택한 죽음들을 저는 종종 응시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는 소원보다는 언제가 될지라도 죽음의 무렵에는 제가 무언가를 건설하고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곤 하지요. 간혹 그 기도에 대한 답서가 우편함에 꽂혀있어 반갑게 달려가곤 한답니다. 얼마 전 출판사의 편집자님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강연자 풀에 저를 등록 신청해도 되겠냐고 물어오셨습니다. 저는 말주변도 없고, 무지하기에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강연을 하느냐며 되물었지요. 그런 저에게 편집자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시더군요.  

   

 ‘계속 글 쓰실 거잖아요. 작가... 하고 싶으시잖아요.’     


 순간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살아라. 살아라. 지금도 괜찮으니 살아라. 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만져지는 압도적인 응원과 느껴지는 절대적인 믿음이 잘 혼합된 문장이 저의 텅 빈 혈관과 뼛속으로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전화를 끊고는 잠시 앉아있다 결국 한 방울을 떨구고야 말았지요. 늙은 플라타너스의 우듬지 끝에 꼭 매달린 눈꽃들이 저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습니다.     


 ‘살아라. 살아. 괜찮으니 살아.’


 새해가 되면 저는 어떠한 의식을 진행하듯 바다를 보기 위해 가방을 꾸립니다. 가방 안에 속옷과 양말, 칫솔을 넣으며 검은빛 겨울바람을 따라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를 닮은 추억을 떠올리지요. 비록 깊이와 폭에 있어 약간의 결핍이 느껴지긴 하지만, 서쪽 하늘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보고 싶었습니다. 서해 바다를 보겠다 결심하고서 소금산을 지나 눈꽃이 만발한 들녘을 달렸습니다. 번잡한 경적과 날카로운 라이트의 소란 속에서도 눈 덮인 나목(裸木)들은 땅속 깊은 곳에서 체온을 길어 올리느라 분주해 보였고, 태양은 사선으로 기울고 있었지만, 다시 떠올라 하늘과 땅에 온기를 전하겠다 다짐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문득 이 년 전 여름에 심었던 적목련을 생각합니다. 햇살에 반사되는 녹색빛을 따라 하루가 다르게 하늘로 손을 뻗던 적목련은 가을의 초입에서 마른 잎을 떨구며 죽어가고 있었지요. 줄기를 잘라보니 갈색빛으로 매말라 온기와 습기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기어이 죽었구나. 죽었어.’     


 잘못도 없는 회청빛 하늘을 보며 한탄만 하다가, 볕뉘 한 줌만큼일지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살려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서 날짜를 세어가며 뿌리 강화제를 주었지요. 그리고 저도 모르게 읊조렸습니다.     


 ‘살아라. 살아. 제발 살아.’     


 적목련은 아마도 뿌리를 뻗어 제가 보내 준 응원의 혈액을 야무지게 빨아 먹었나 봅니다. 이듬해 봄에 결국 여린 잎이 아래에서부터 솟아 올랐으니까요. 온 힘을 다해 생존해서 그런지 그해 봄에 결국 꽃은 피워내지 못했지만, 살아가다 보면 끝내 찬연한 꽃망울을 피우겠지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저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새 찬란한 박명의 빛을 따라 해변은 검은빛 곡선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경계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계를 넘어오는 것들에 대해서 더 이상 두렵지가 않은 건, 죽는 순간에도 밤하늘에 수놓인 별빛 같은 꿈을 향해 걷고 있을 저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악착같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쓴 ‘이반일리치의 죽음’에 대해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극도로 끔찍한 것이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래요. 죽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요. 무엇으로 자신의 삶을 짓고, 채웠는지가 죽음이 아닌 빛을 데려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실눈을 뜨고서 반짝거리는 설경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보고 싶은 그런 날이군요.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이반 일리치의 죽음’ 중.


 서쪽 바다의 잔향에 달빛은 머물러 있습니다. 달빛은 언제나 그러하듯 수평선 위를 떠다녔고, 정박한 어선들은 동살의 울음을 기다립니다. 새해를 기다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에 어촌의 시장은 늦은 시간까지도 생기를 잃지 않고 있더군요. 오늘을 살아내고자 자리했던 상점의 불빛들은 내일도 어김없이 자리할 것이고, 삶은 그렇게 이어지겠지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오래전 안타까운 일이 있었어요. 남편을 사고로 잃고 어린아이를 키우는 어미였던 이가 스스로 죽음을 택했었습니다. 시뻘겋게 부릅뜬 불안과 두려움은 희끄무레한 우울을 잉태하고, 날선 비관이라는 내리막길을 지나, 무기력이라는 늪으로 빠져들게 하지요. 스스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조금도 나아지리라는 작은 기대조차 품어보지 못할 때 자신의 존재를 하찮게 여기게 되고, 결국 저울의 추를 기울여 버립니다. 저를 포함한 그 이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괜찮으니 살아라. 고 말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늘에 하소연이라도 하듯 한동안 어땠을까를 중얼거리며 걸어야만 했습니다.

 저 또한 무기력함에 단 한 방울의 눈물조차 흘려보낼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걸 견뎌내고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결심했다는 저의 말에 잘했어. 참으로 잘했어. 를 몇 번이고 말해 주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미소한 발걸음이라 하더라도 보행하는 일은 허벅지의 근육을 박동하게 하고, 멈춰있는 심장을 붉게 물들이며, 주름진 뇌 안에서 웅크린 자아를 깨어나게 해줍니다. 그 친구를 이제는 제가 열렬히 응원하기 위해 늦은 봄에 저의 책을 들고서 만나러 가려 합니다.

 봄에, 따듯한 봄에 우리 다시 만나자 전합니다.     


 어촌 특유의 억셈과 다정한 말들이 밀물이 되어 사나운 겨울의 한기를 밀어내고, 달큰하고도 하얀 입김들로 채웠습니다. 수산시장을 향해 바다의 짠 냄새를 벗 삼아 걷다가 주홍빛으로 불타는 화목 주위에 상인으로 보이는 분들이 모여있더군요. 뭔가에 홀린 듯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거기 계시던 한 분이 크게 손짓하셨습니다.     


 ‘이리와요. 이리와. 여기 와서 불 쬐어요.’     


 둥그스름한 코에 걸려있는 동그란 뿔테 안경, 이마와 귀를 덮은 꾹 눌러쓴 검정색 털모자, 그리고 한기로 인한 홍조로 상기된 얼굴의 아저씨에게 이끌리듯 다가가 무릎을 조금 구부리고, 두 손을 아래로 펴 화목 앞에서 몸을 데웠습니다. 희망이라도 되는 듯 화목 앞에 바짝 붙어 아저씨들의 거친 손 등을 보았어요. 별것 아닌 듯한, 얼마 안 되는 듯한 그들의 주름진 선의가 차가운 겨울밤의 위세를 부러뜨리는 것만 같았지요. 겨울은 아무래도 사람의 손이 제철인가 봅니다.


 사위가 다시 분홍빛으로 밝혀지고, 태양은 다시 세상을 움직입니다. 속절없이 흘러가 버리고, 사라지는 날들이 안타까워, 서러운 어떤 것들을 펜 끝에 걸어두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걸어오고야 말았습니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단 하나뿐인 생을 이어가며, 다시 돌아올 봄날의 만개한 벚꽃을 이제는 떠올리게 됩니다. 사랑했던 이와 함께 입을 크게 벌리고 낙하하는 벚꽃을 받아먹던 그해 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그건 희망이었다고 적겠습니다.


 새해이니 떡국을 먹어야 하는 데 겨울의 시골에는 깨어있는 것들이 없어서 재료가 포장된 떡국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어른들의 옛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 이제는 한 살을 더 먹고 싶어 떡국을 끓이지는 않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으며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라는 명징한 다짐인 것만 같아 여전히 떡국을 챙겨 먹게 됩니다. 떡국을 먹으며 늙어가는 제가, 그렇게 시선이 온화하게 변해 가는 제가, 지금의 제가 참 좋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며 저에게 살아라. 살아. 지금도 괜찮으니 살아라. 고 말해주던 수많은 이들을 생각합니다. 글쟁이인 저는 앞으로도 뒤덮인 하얀 눈을 걷어내고 새싹을 찾듯, 서럽거나 슬프거나 아름다운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여다보고 애써 목구멍으로 삼키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다. 저에겐 가난한 문장들이 있고, 저를 응원해 주는 제철을 맞은 손길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으니까요. 집으로 돌아와 끓인 떡국을 입에 넣으니, 그건 삶이었습니다. 인생의 어디즈음에 있을 저는 이제는 길을 잃고, 헤매진 않을 듯하군요. 매년 떠오르는 새해가 특별히 찬란한 것은 아니겠지요. 매일 떠올라 정수리 위로 안온하게 번져가는 태양이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찬란하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살아라. 살아라.’ 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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