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시골 서재에는 봄에게 작별을 선언하는 듯한 제법 묵직한 비가 내립니다. 여름이 문지방을 기웃거리기에 반가운 듯, 아쉬운 듯, 문을 열어주는 봄인 것만 같습니다. 한낮에 내려꽂히던 날카로운 햇살을 아직 이르다며, 타이르는 봄의 목소리가 고조곤히 들리는 듯합니다. 봄은 성마른 아이를 닮은 활기찬 여름의 마음을 이해하겠지요. 자연과 계절의 너그럽고도, 부드러움의 속성에는 용서나 증오의 자리는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지구상의 피조물들 중에 인간에게만 유일하고도, 반드시 결행해야만 하는 일이 용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빗방울에 흩날리는 분홍빛 복숭아 꽃잎을 입을 벌려 받아먹습니다. 용서와 화해라는 꽃말을 가진 복숭아꽃. 구겨진 마음을 펴보려 하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무엇을 겨냥한 증오와 분노인지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용서의 자리를 만들기가 가끔은 힘에 부치기도 합니다.
‘정호승’ 시인께서는 고요히 칼을 거두라 말씀하셨는데, 간혹 무례한 이들을 마주할 때면, 칼을 더욱 움켜쥐게 되는 이 날카로운 종이 조각 같은 마음이 부끄러워지곤 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사욕을 채우는 자를 마주할 때면, 사람이 얼마나 간교한 동물인지를,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고 해소하려는 욕망의 화살표를 바라볼 때면, 인간이 얼마나 허기진 동물인지를,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신의 의지는 무엇일까요. 고요히 칼을 거두고 나뭇잎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 참으로 버겁기만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스스로를 무임금 노동자라며, 소맷귀를 걷어붙이고 텃밭으로 걸어가는 친구의 뒷모습은 제 삶의 궤적이 좀 더 다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명징하게 말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자그마한 딸기를 따는 일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딸기 따는 일에 매달린 친구의 모습에 삶의 온화함을 느낍니다. 마음이 산란하거나, 살아가는 일이 녹록하게 여겨지지 않을 때면, 꺼내어 볼 수 있는 적요한 풍경을 하나 더 호주머니 안에서 만지작거릴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신의 불꽃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해준 친구가 참으로 고맙습니다.
‘자작 나무 아래에 무섭게 생긴 저건 뭐야?’
‘곤드레야... 곤드레가 너무 무섭게 자랐어.’
‘곤드레는... 자그마하고 연약한 거 아니었어?
'그러게... 내버려두었더니 무섭게 웃자라 버리네...'
친구가 자작나무 아래에서 어마어마하게 자라난 곤드레를 보며, 입을 다물지를 못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보았더라도 아마도 까맣고 커다란 눈동자를 어디에 둘지 몰라 이리저리 굴릴 듯합니다. 웃자란 곤드레를 보고 있자니 자작나무를 못살게 구는 듯해서 곤드레가 괜스레 미워지더군요. 하지만 곤드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잘 알기에 저는 게으른 저를 탓할 수밖에는 없겠지요. 웃자란 곤드레에서 자책과 폄하로 무장한 채, 스스로를 너무나 증오하던 한 시절의 저를 보게 됩니다. 그 시절의 저는 날카로운 그녀의 표정과 냉소적인 그녀의 언어 안에서 그저 어찌할 줄 몰라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버텼었지요. 굳게 잠겨진 문밖에서 그저 몇 시간을 서성거리면, 문이 열릴 것이라는 소모적인 기대감마저도 놓지 못하던 굴욕감을 삼켜내다 결국 그것조차 목에 걸리곤 했습니다. 제가 얼마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내세우기 위해 살짝만 인연의 줄을 놓아도 저의 팽팽하던 삶이 풍선이 터지듯,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의 서(書)가 눈앞에 펼쳐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검붉은 눈을 희번덕이는 불안이 목에 걸터앉은 저는 찢기는 자존감을 멀뚱히 바라보면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되더군요. 한낮에 서서 피할 수 없는 이별임을 알면서도 격렬하게 몸부림치던 처참한 그 시절의 제 모습은 사랑이었을까요. 회피와 오기로 버티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면서도, 타인을 향한 사랑이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여전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를 증오했던 마음인지, 타인을 미워했던 마음인지 알 수도 없는 분노와 수치스러움, 자괴감으로 뭉쳐진 감정의 찌꺼기들을 잘라내듯 곤드레 잎을 툭툭 잘랐어요. 손 대기도 두렵게 어그러지고, 먼지처럼 굴러다니다 뭉쳐져 부풀어 오른 마음을 잘라내니 평정심이 나타납니다. 버림받은 자신을 인정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용서하지도 못하며, 그저 비겁하게 내버려두었던 거울 속 저에게 미안한 마음만이 가득해지는군요. 용서는 어쩌면 자신을 향해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선행이 아닐까요. 얼굴 ‘용(容)’, 그리고 마음과 마음을 같게 한다는 ‘서(恕)’. 용서.
용서라는 단어에는 타자를 향하거나, 위하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용서는 자신의 얼굴을 유지하는 것이지요. 용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부분에 대해서도 얼굴의 흐트러짐 없이 평온을 유지하려는 마음입니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거울 속 저를 응시합니다. 자책과 후회의 감정이 굴뚝에서 역류하여, 방안에서 번져가는 연기가 되어갈 때, 밭은기침을 쏟아내며 우두커니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잘못한 걸까. 나는 왜 이런 걸까. 용서가 없는 끝없이 되뇌이는 부질없는 말들. 젊은 날의 사랑이라는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는 누리고 있을 평범한 삶이 저에게는 사라져 버린 듯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를 가득한 연민이 스스로를 향해 밀물이 밀려오듯, 떠밀려 오곤 합니다. 그럼에도 쉽지 않은 하루들에 부딪히고, 흔들리며, 그렇게 버틸 수 있는 건, 알 수 없는 제 속을 들여다보고 채울 수 있는 책과 글이 있기 때문입니다.
햇살 같은 문장들을 동력 삼아, 희망이 정지된 지점에서 용서의 페달을 세차게 밟습니다.
‘나는 외부 세계에 완전히 무심한 태도를 취했고, 온종일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흐르는 금지된 어두운 물소리를 듣는 데 몰두했다.’
「헤르만 헤세」
괴물처럼 자라나 버린 곤드레를 깨끗이 씻어 소금물에 데칩니다. 축 늘어진 곤드레를 보고 있자니, 자책과 폄하. 이런 말들이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낙인이 되어, 자발적 고립을 택했을 누군가의 눈물을 보는 듯하더군요. 저 또한 무수하게 달려드는 자기 폄하의 순간들과 조각나버린 마음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언제나 그러하듯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겠지요. 그렇지만,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소금물에 소독하듯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용서해야 하는 일은 아마도 생이 소멸하는 그날까지도 지루하리만큼 반복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가장 사랑해 주어야 할 존재는 바로 자신이니까요.
데쳐진 곤드레를 찬물에 넣어 잠시 우리고,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로 먹기 좋게 자릅니다. 하얀 무도 채를 썰어 단정하게 놓아둡니다. 국간장과 들기름, 그리고 다진 양파와 다진 파를 넣어 곤드레와 무를 밑간하는 동안 친구는 냄비 밥에 자신있다며, 흥얼거리면서 쌀 두 홉을 씻습니다. 나란히 서서 밥을 짓는 일은 부풀어 오르는 하얀 쌀알처럼 마음도 고슬고슬하게 부풀어 오르게 하는군요.
사는 일이 그리 고되진 않은 듯합니다.
노란 양철 냄비의 뚜껑이 들썩거리며, 밥 익는 향기를 피어올립니다. 자신을 용서하고 삶을 익혀갈 때, 생은 비로소 구수한 냄새를 전하며, 소담한 밥상으로 인도하는 것만 같습니다. ‘기시미 이치로’는 미움받을 용기를 말했다 하지만, 미움받은 만큼 타인과 자신을 용서할 용기 또한 필요한 게 아닐까요. 필연적으로 사랑에는 용서와 고통이 뒤따름을 인정해야 한다면. 억장이 무너져 내릴듯한 고통의 근원을 용서하려 합니다.
끊임없이 사랑하고, 끊임없이 용서할 때 삶의 무늬는 단조롭지 않은 화사함으로 새겨지겠지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곤드레 무밥은 양념장이 맛깔나야 하지요. 다진 대파와 다진 마늘, 양조간장과 매실청, 고추가루와 참기름, 그리고 깨소금을 넣어 양념장을 만들었어요. 조금 짜려나요. 조금 짜고, 조금 매워도 오늘은 괜찮겠습니다. 좋은 이와 밥을 먹을 테니, 그리고 어느새 저를 용서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인생의 맛은 조금 짤 수도, 조금 매울 수도 있다는걸, 이젠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은 마음들이 비대해져 타인으로부터 스스로를 가두고, 자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말끔히 잘라내어 하얀 쌀밥을 지어 먹어야겠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묵주를 돌리듯 떠올리며 계절과 계절을 건너고야 말겠습니다. 좌절과 후회, 두려움이 저를 앞으로 나아갈 수 없도록 집어삼키게 내버려두는 것은 제 스스로가 마음의 감옥을 짓고, 감금한 채, 결정적 고통을 씹는 일인 듯합니다. 감옥을 헐어버리고, 세상으로 걸어가게 하는 용서. 결국 필연적인 용서의 대상은 거울 속 자신입니다.
천사는 자기애를 발명하고, 악마는 자기 폄하를 발명했다고 합니다. 악마의 속삭임은 용서를 지워버리고, 괴물을 잉태합니다. 차마 용서하지 못한 자기 폄하가 결국 자신도, 타인도 집어삼키겠지요.
우리, 용서받지 못한 괴물을 만들지는 말아요.
친구와 푸르스름한 빛으로 물들어 가는 평상에 누워 하얀 달과, 달빛이 반사된 몽글한 구름의 이동을 쫓아갑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친구는 옆에서 재잘거립니다. 뻐꾸기의 소곤거리는 소리와 바람에 실린 자작나무의 사각대는 소리가 섞여 함께 흘러가는 용서받은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