솜뭉치를 닮은 구름들의 이동을 따라 순간순간 나타나는 금빛햇살에눈이 시려오는눈부신 오월의 하늘입니다. 눈을 가만히 감고 있어도 눈꺼풀을 넘어 건너오는 무해한 햇살의 머무름에 삶의 다정함을 느끼곤 합니다. 엊그제 수줍게피었던 하얀 딸기꽃은 어느새 붉은 딸기가 되어 삶의 경이로움을노래합니다.질기디 질긴 덩어리 진 쑥들에 수북이 둘러싸여까만 어둠에 잠기고 눅진한 습들에 감겨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듯했지만,끝끝내 삶으로부터돌아서지 않은 딸기들. 비록 삶의 밀어내는 힘 앞에서도 담담하고, 의연하게, 그리고 환하게 살아가는 것들을보고 있노라면,눈가에 주름을 잡고서 웃어주고만 싶습니다.그대를 바라볼 때도, 이와 같은 전류가 온몸을 휘어감 곤 했지요.
시골에 처음 발을내디뎠을 때 더덕을 심었습니다. 이유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저 겨울을 이겨낸다 들었는데. 종을 닮은 아름다운 꽃을 피워낸다 들었는데. 그저 설렘 가득했던 마음만이 기억나는데. 그럼에도마을 할아버지들은 더덕을 잘못 심으면, 밭이고 산이고 가리지 않고 못쓰게 된다며 만류하셨었는데,그래서 조금 걱정했던 일이 벌써이 년도 넘은지나간 기억이 되었습니다. 입술을 악다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무더기에 얽히고설킨흙을 파고 더덕을 심던,잔별이무수히 떨어져 내리던 그해 밤이 생각납니다. 무엇을 떠올려도 두렵기만 하던 그해 밤. 흙을 딛고 일어 선 저의 정수리에달빛이 내려앉은다정하던 밤. 삼년 후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며 다리와 팔에 힘을주던 밤.비록 험한 세상일지라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밤. 까만 어둠을 지나, 이제 파란 하늘 아래에서 그믐달을 닮은눈매로 연녹빛 더덕을 바라봅니다. 겨우내 깊은 곳에서은빛 물다발을 길어 올리며, 금빛 종소리를 닮은 꽃을 피워내겠다 결심했겠지요. 따가운 햇살아래에서 서로에게 그늘을 내어주며, 함께견디자 속삭였겠지요. 몰아치는 때 아닌 폭우에도 서로에게 매달려 괜찮다고 말해 주었겠지요. 그래서 꼭 붙들어 매달린 것들에게서는 물기 가득한고귀함을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운 Y.그대에게도 물기 가득한 미소를 전합니다.
단어를 찾고, 문장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이으며, 조금은 느리게 시골길을 걸어오다, 요즘에는 조금 쫓기듯 시간을 살아야만 했습니다.강의를 하고, 돌아올 강의를 생각하고, 책 소개를 위한 짧은 영상을 찍고, 다가오는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있을작은북토크 준비도하며, 시계와 달력을살피는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매주 시골을 찾아오는 손들을 위해 먹을거리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계절이기도 하지요.중간고사를 치르고 기말고사도 앞두고 있어 정신없는 나날이 더해졌지만, 어느 출판사의 공모전에 응모하기 위해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빨간 우체통에 부치기도 했습니다.마주해 달려오는 여러 일들에 대해 특별히 기대하는 마음은 없기에 결과들이어떤 모양을 하고 나타나든 저를 낙담시킬수는 없을 겁니다. 다만, 글과 삶을 의욕하며 귀밑머리 아래로 물방울처럼 맺히던심장의 울림들이 헛되지 않도록 그 시간을 온전히 기억하며, 앞으로도그저 살아갈뿐이겠지요.
신규 직원들에 대한 강의를 두 차례 하며,간혹 틀리면 안 될 것만 같은 질문들에 대해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동기가 걱정되는데, 그런 분들이 일터에 많은지가 궁금하다는 조심스러운질문이있었습니다.
'우울증을 앓는 분들은많습니다. 부끄러워할 일도, 숨길 일도 아닙니다.몸살을겪듯,감기를 하듯, 의사가 약을 그만 먹어도 괜찮다.할 때까지 성실하게 약드시며, 직장에도 꾸준히 다니시라 전해주세요.'
험한 세상에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프니까 삶이겠지요.'보르헤스'의 말처럼, 차라리 삶을 '환'이라 여기는 게 나을 만큼 말입니다.얼음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 아프다면치료받으며, 도와달라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말해 주었지요.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들이었지만, 어느새 지질 린 듯한 그들의표정과 근육이며 신경들까지모두 굳어버린 듯한 그들의얼굴을 보며,살아가면서혹독한순간들을맞닥뜨릴 그들에게 말해 주고싶었습니다.
'살아보셨잖아요. 살아보니 어디 뜻대로 되는 일이 있던가요. 항상 스스로를 사랑하고, 부디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나면, 동녘 하늘에 푸른빛이 번지듯, 어느한사람의모습이 저의 눈꺼풀 안에서 명멸하곤 했습니다.
지난해,대학생 인턴이었던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을 기억합니다. 뺨에 가득한 연분홍빛을 타고 가느다란 눈매에 담긴 서성거리던 눈빛이,떠오르듯 내려앉는 벚꽃 잎을 품은 봄을 닮았다고 생각했었지요.새벽녘 농밀한 안개처럼 불확실한 미래를 나아가기 위해 한 학기를 남겨두고 휴학한 그녀는,인턴사원으로 입사해 제 일터의 동료가 되었습니다.휴학과 복학을 반복해 온 그녀는 같은 학년의 학생들에 비해 나이는 많았지만,여느 학생들처럼긴장이 될 때면, 도톰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솜사탕을 말듯,검지손가락으로 만지곤했었지요. 파르스름한 실핏줄이 번지는 투명한 피부는 가장 활기찬 생의 한 시절을 그녀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만같았습니다. 그녀의 보일듯, 말듯한 마알간미소가 얼핏스쳐 지나갈때면, 아.름.답.다. 며,비분절음처럼, 속으로 되내었지요.그렇지만그녀는 두려움에 훌쩍이는고개 숙인 아이처럼, 그저사무실 모퉁이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지만은 않았습니다.연하고여린외모가그의 호탕한 웃음 소리와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지요. 힘이 쎄어서 잡다한 서류 자루는 혼자서도거뜬히 끌고 가는천하장사이기도 했지요.그녀는 정갈하면서도 화사한 선물 포장을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마법사이기도 했으며, 정리해야 할 서류들을 엑셀과 워드로 깔끔하게 다듬어 그림을 그려내는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날, 그녀가깨끗한 회의테이블임에도,부지런히 쓸고닦고 있더군요.여느때처럼 그녀의 가느다란 손길이 닿으면,테이블에서는 이내 형광등에서 반사된 빛이 태어나 제 얼굴을 비추곤 했습니다.그런 그녀를건너다보다가왜 이리 열심히 닦느냐며, 굳이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었지요. 저의 말에그녀는 수줍게 웃으며,읊조리듯 말하더군요.
'불안해서...'
그녀가툭뱉어낸 묵직한 문장은겨울 바람 앞에 서있는 듯 싸늘했고, 흐르던 대기를 멈추며시간을 정지시킨것만 같았습니다. 정적 안에 둘러쌓여 저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려야만 했지요.촛불의 푸르스름한 심지 주변을 일렁이는 어둠처럼,검은 하늘에 흔들리는 우듬지처럼, 미세하게 흔들리던 저의 감정은 슬픔이었다기억합니다.참 이상하지요. 그는 슬프지가 않았는데, 그의 문장은참으로슬펐으니 말입니다. 자신의 삶에서 확실한 건 무엇하나 없었기에,불안을 언제나 곁에 두고 사는 것에 이골이 나있었기에, 그저아무렇지 않다는 듯익숙하다는듯말하는 그녀의 언어가 붉게 녹슨 대못이 되어 늑골을 파고 찌르는 듯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불안한존재이며, 그러니 불안은누구나 갖는 지극한 감정이라는 그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전극이 당기듯일어나는 그녀를 향한 연민의 감각을 억누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할머니와 단 둘이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오다보니, 이른 나이임에도불구하고다양한 아르바이트를 경험한 듯했습니다. 거세된 선택지와살얼음이 낀 일상은 그녀의 성장을 강요한 듯 보였지요.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던 그녀는 삶이 장난하듯 깜빡거리는 고통과 상실앞에서도 그저 어리둥절하게 앉아있지만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녀가 서늘하기만 한 삶으로부터 돌아서지 않았기에 그렇게나 아름답고 고귀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시간은 타인들의 시간보다 빠르게 흐른다.
대낮이 주는 무거움과 한밤이 주는 쓸쓸함에 대해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것들이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은 응석에 불과하다.
집요한 삶은 그녀에게더 많은 걸 게걸스레요구한다.
그녀는 그녀만이 닿을 수 있는 희미한 빛을응시한다.
시선을 따라 매일을 약속하고,다짐한다.
끝끝내 그녀는 누군가의 품에서 말할 것이다.
잘 살아내었다고.'
어느새 그녀가 계약한 기간이 종료되어, 팀원들과 함께 술자리를가졌습니다. 주홍빛 조명 아래 섞인 말들 속에서 그녀의 언어는 특별하게 여겨지더군요. 놓쳐서는 안되는 강의처럼, 잊지 않기 위해 빛바랜 쪽지에 기록해야만 하는 것처럼, 단 한번 밖에 들을 수 없는 동화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속을 짐작할 수 없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는 그녀는 아나운서가 되는 게 꿈이라면서도, 서술어가 툭하고 떨어지 듯 흐릿하게 말을 맺더군요.저는그게 아팠습니다.
저 또한 소설 쓰는 책방 할아버지라는 꿈이 있다며, 아나운서가 되면 모른 척하지 말라고 너스레를 부리며 잔을 부딪쳤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즐거운 듯 웃었지만, 눈가에 매달린 물방울은 조금 슬퍼 보였지요. 제가 슬펐기 때문일까요. 다시 또다른 세계로 발을 내딛어야 하는 그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사는 일은 누구나 버거운 일이니, 그저 강건하게 지내라는 말 밖에는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남자 친구와 함께 꼭 한번 시골에 찾아오라 말해 주었지요.
따듯한 밥 한끼지어 주고 싶다고.
나는된장국도 맛있게 잘 끓인다고.
신규 직원들과 그녀보다 조금 일찍 태어난 것 외에는 내세울 것도, 보여줄 것도 없는 저이지만,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문장을 이어, 펜 끝에 걸어두고서들려주었습니다.축축한 손을 펴서 쥐고 있는 이야기들을 그들에게 보여줄 때마다 밤하늘을 흐르는 호수의 윤슬처럼, 빛나던 그들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불안의 알갱이들이 가라앉은 녹빛 호수 같은 눈.
별빛을 향해 날아가는 반딧불이 같은 눈.
눈보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를 닮은 눈.
파도의 물거품에도 바다를 의욕하는 바위같은 눈.
그 무엇도 받아들일 것만 같은 무구한 눈.
저의 망막에 박힌그들의 눈빛들은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도 서글픈 모습을 한 채,그저사라지지만은않을듯합니다. 불안과 고통, 외로움. 이런 말들이 혈관을 타고 흘러 고름을 터뜨려야 할 때면,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되겠지요. 어떤 날은 저를 웃게 할 것이고, 또 어떤 날은 조금 울게 할 것이며, 저를 살아가게 하겠지요. 제가 그들로부터 받은 깨끗한시선들을떠올리며,그들의 바람과 희망이 빛 한번 보지 못한 채, 산화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트에기록합니다.
친구들이 시골에 오는 날이면 손이 바빠집니다. 언제쯤 도착하려나, 턱을 조금 더 세우고 눈길은 조금 더 멀리 두고서 틈틈히 초입을 바라보게 되지요.설렘 가득한 식기들을 챙겨 밖으로 나가다가, 문 앞에 걸어둔 '공지영' 작가님의 문장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이상하게도 다시 외로워질 것이라는 문장이 기도문이라도 되는 듯, 불안을 사그라들게 하는 힘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평온하고 외롭지 않은 이 시절이언젠가는 부수어지고 깨뜨려져,불안과 외로움, 고통. 이런 감정들이 밀물처럼 당연하게 밀려오리라는 생각을 하면, 오히려호흡은 고르게 쉬어지고,눈빛은의연해지는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오지 않을 이 시절을,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결국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만 같던 고통도,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겠지요.
좋은 이들에게 귀한 걸 먹이고 싶어 삽을 들고서 잘 자라준 더덕을 몇 뿌리 캐보았습니다. 일 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할 듯한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그 안에서 눅진하게 묻어나오는 물들이 밀도 높은 삶의 진액인듯 여겨지더군요. 캐어낸 더덕을 깨끗하게 우리고 씻어서 껍질을 벗긴후, 망치로 납작하게 으깨는동안,일찍 온친구들은 야외 수돗가에서 쌈 채소를 씻고, 화로대와 장작을 설치하고, 나무에게 물을 주는 일에 몰두하더군요.세상에 단지 이 일만이 존재한다는 듯. 이것 외에는 마음 써야할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고드름 같은 마음들이 지상을 향해 녹아내리듯. 그들은 적요한 풍경 안에서 살아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여기 있으니 시간이 흐르는지를 모르겠어.'
'나도 그렇게 느껴.
여기에서의 시간은 원래 없었던 것처럼.
모든 상념들이 사라지고 자연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걱정스러운 일들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
고추장과 참기름, 매실청과 올리브유를 넣어 양념장을 만들어 더덕에 바르고 배어들게 합니다. 어느새서녘 하늘이 복숭앗 빛으로 물들고, 산허리가 푸르스름하게 번져가는군요. 다 오지 못한 이들도 도착할 무렵입니다. 기쁨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저는 밤이 이울도록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지요. 맑은 물방울이 희석된 풀냄새와 흙냄새 가득한 공기를 차분하게 마십니다. 투명한 바람을 타고서 삶에서 종종 맡을 수 있는 달큰한 향기가 사무치게 실려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것이겠지요.불안과 고통이 저에게 말을 걸어오듯, 평온과 행복 또한 저만 피해갈리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고, 안도합니다.평온이 그대에게 다시 말을거는군요.
그대는 이제괜찮다고.
덧.주재료: 더덕
부재료: 고추장, 참기름, 매실청, 올리브유, 깐마늘,
고춧가루, 참깨
※ 책 소개 쇼츠 영상은 출판사에서 편집이 완성되는대로 공유하겠습니다. 이곳 시골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라 조금 재미있어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