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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Mar 22. 2024

당신 잘못이 아니라 쓰고 싶었습니다. _ 냉이 된장국.


창 밖으로 겨울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지난 밤, 창틀 끼어 끈질기게 울부짖던 겨울의 날선 바람들, 집요하 내리 꽂히던 칼날을 닮은 빗방울들. 산화되기 싫은 겨울의 마지막 몸부림인 것만 같더군요. 몸을 동그랗게 말아 모로 누워 눈을 가늘게 뜨고서 커튼 사이로 부서지는 먼지 입자를 세며, 잠시 게으름도 피웠지요. 이윽고 계절과 계절의 사이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겨울에게 일별을 말해야 할 시간이 조금 서운하기도 지만, 빛내린 하늘을 향해 다섯 손가락을 펴고서, 인내심있는 봄에게 인사를 나누었어요. 황령하게 패어진 겨울의 흔적이 아직은 여리디 여린 봄의 향기들로 채워집니다. 

부서지는 모시빛의 햇살을 따라 '이소라'의 목소리를 들으며 까만 커피를 내렸습니다. 무거웠던 육신과 밀도높은 생각들의 중력에 저항하는 가벼워지고 있었지요. 맑은 물에 씻고서, 김 서린 하얀 거울을 손바닥을 펴 문질렀습니다. 거울 앞에 놓여진 한 사람. 거울 속 그는 멀뚱히 서서 저를 빤히 응시하더군요. 눈두덩이 조금 마르고 광대뼈가 조금 드러난 말라버린 얼굴이었지만, 하얀 흰자위와 눈가의 깊지 않은 주름살로 그가 회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찢겨졌지만 덧나지 않은 상처들, 손톱이 파고 들어와 핏물이 고였었지만, 어느새 단단해져버린 굳은 살들. 치유의 상흔들을 가만하게 들여다봅니다.


'보고싶은 Y. 하얗고 가느다란 아픈 손목은 좀 어떠신가요. 여전히 습관처럼 발 끝을 보며 걸으시나요. 가끔씩 얼음송이 같은 굵은 눈물도 흘리시나요. 지금도 불면의 밤을 견디시나요. 아직도 떠오르는 태양을 건너다 보시나요.

그럼에도 봄이 내려앉을 자리를 만들어 두셨나요.'


고민스러울 때면 머리카락을 만지듯이, 입을 크게 벌려 웃을 때면 손으로 입을 가리듯이, 휴일에는 서재에서 나무를 다듬고, 작물을 가꾸며 시간을 보냅니다. 자그마한 씨앗들을 흙과 섞고 축축한 손에 가득 쥐어 땅으로 돌려보내지요. 모든 것이 증발해버린 듯한 혹독한 겨울을 지나 찬란한 봄을 일으키는 건, 언제나 여린 것들로부터 시작됨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미미해 보이기만한 검푸른 결정체에서 하나의 우주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이제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에 잡히지 않는 파리하기만한 허상을 쫒기보다는 저를 뒤따르는 소담한 냉이를 닮은 웃음들과 기쁨들을 오래 들여다보고 기억하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달빛 아래 책상 앞에 앉아 삶을 기록합니다. 그리고 충만해지곤 합니다.

얼마 전 강의를 요청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치유의 글쓰기라는 주제로 한 시간 정도의 강의를 부탁하더군요. 글을 잘쓰는 방법에 대한 강의를 요청했었다면 단호하게 거절했을텐데, 치유라는 언어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 그렇게 하겠습니다.고 답하였지요. 신규임용자 강의와 치유의 글쓰기 강의를 준비하며, 어느 문학지에서 의뢰받은 수필을 쓰고 고치다가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합니다.

그저 으스러질듯 아파쓰기 시작한 이었는데, 어느새 글이 쌓여 다른 세상으로 인도하고 있었는데, 이윽고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특별한 나의 벗이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돌다리를 건너듯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결국 귀밑머리가 하얗게 새어져 있을 에게 닿으리라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리운 Y. 글을 쓴다는 건 그대에게 어떤 의미인가요.라며 언젠가 제가 물었었지요. 그대는 잠시 머리칼을 며 조금 먼 곳을 바라보다 옅은 한숨내쉬며 대답했었습니다.


'마음의 세수가 아닐까.'


글을 쓰며 마음을 닦아내려하지만, 가끔씩은 붙들고 놓치 질긴 것들에게서 지친 듯한 패배감이 느껴지기도 한다.는 저의 말에, 그러니 세수인 거라던. 매일 씻어야하는 거라던, 조금 더러워져도 씻어야하는 거라던. 그대의 말을 고개를 수그리고 가만히 듣다가 주홍빛 잔양 감싸 안은 그대의 옆모습을 지나치, '롤랑 바르트'를 떠올렸습니다. 글을 쓰는 일은 새싹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라던, '롤랑 바르트'의 말이 바람에 실려오는 그대의 향기를 뒤따랐었지.

재생, 치유, 회복. 이런 말들이 글을 쓰는 동안 빛바랜 노트 아래로 배달되어 쌓여갑니다.


하얀 달빛이 서재를 은빛으로 물들이는 밤. 백목련의 봉오리에 살이 올라 살짝 누르면 봄 향기가 터질 것만 같은 밤. 의뢰받은 치유의 글쓰기라는 강의 교안을 쓰기 위해 작설차 한잔을 내어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동그란 조명등을 켜고, 빛바랜 노트를 펼치고, 엄지와 검지로 갈색 연필을 쥐었습니다. 한쪽 무릎을 굽혀 세우고, 한 팔로 무릎을 감싸안고서, 턱은 조금 밀어내고, 파르스름한 산허리를 응시합니다. 달빛은 고요하고, 구름은 단정합니다.

치유를 떠올리다 지금의 적요한 향기를 채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뎠던가. 또 무엇을 잃어버렸으며, 다시 찾았던가를 생각합니다. 상실과 분노, 체념과 우울에 허우적거리며 억장이 무너져 내리고 골수가 흔들리던 그 시절, 솜털이 돋아나 반짝거리며 저에게 내밀던 하얀 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몇년 전, 많은 것들을 잃고서, 걷던 길조차도 보이지 않아 짙은 회색빛 콜타르의 늪에서 처절하게 저항하던 초여름의 어느날. 직장 동료인 J와 투명한 얼음 조각들이 가득찬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었지요. 지나치게 차갑다는 듯, 투명한 잔을 두 손으로 잡고서 조금씩 홀짝이며 그리 많은 말들을 서로에게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이해한다는 듯,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주름을 잡고서 가느다랗게 웃어주었지요. 사는 이야기를 하다가 늑골 너머에서 그악스럽게 명멸하듯 통증이 밀려오면, 지나가는 타인들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잠시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무표정함이 내려앉은 그의 느릿한 문장에 잡고있던 고무줄 가닥을 놓은 듯, 명치에서 올라오는 어떤 뜨거운 것이 안구를 뚫고 나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별것 아닌 그저 소소한 문장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연하고 단순하고 단호하고 강렬했던 그 문장. 지금도 괜찮으니 살아.라고 저에게 말하는 것만 같던 새싹같은그 문장이 빗방울처럼 떨어졌습니다. 그는 시간이 조금 흐르고, 늦은 밤 책 읽으며, 허전할 때 먹어보라며 느닷없이 곶감 한보따리를 손에 쥐어주고 돌아갔습니다. 지독스러운 외로움이 널려있는 차가운 방에 돌아와 그가 부모님과 함께 따고 말려서 손질했다는 주홍빛 곶감을 꺼내었습니다. 주홍빛 알전구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듯, 무렵을 어슬렁거리던 어스름은 밀려나고 있었지요. 달콤하고, 부드럽고, 다정하고. 한 인간을 향한 응원의 언어에 형체가 있다면 아마도 이런 느낌들을 닮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햇살이 바삭한 가을날 감을 따고, 겨우내 얼음같은 한기와 적막한 밤을 견디며 단맛을 만들었을 곶감. 목구멍과 내장을 거쳐 뼛속까지 스며드는 따듯함에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가는 나무처럼 일어서고 싶었습니다. 목울음을 울며 사람을 살리는 일은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소소한 단어와 볼품없는 문장일지라도 누군가의 불행을 지우고 삶을 다시 쓰게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책을 곁에 두고, 글을 지어먹기 시작해 어느새 지난 해 첫 책을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곶감. 저의 삶에 주홍빛 변곡점을 찍던 그날을 어찌 잊을수가 있을까요.

그 마음을 잊지않기 위해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았습니다.


'더이상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사랑하는 타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구조활동이다.'  - '롤랑 바르트' -


겨우내 덮혀 있던 말라버린 가지들과 건조한 잡초들의 잔해를 걷어내니 냉이들이 묵은밭에 저항하며 일어나 있더군요. 참혹한 겨울을 견뎌내고, 마알간 얼굴로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 냉이는 가장 빨리 혹독한 상처를 치유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냉이를 캐내맑은 물에 우리고 잔뿌리를 다듬으며, 고통의 근원이 끝간데 없는 집착이었음에 주억거립니다. 상처는 언제나 지나가버린 시간에서 죽어버린 풀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기며 저를 잠식하곤 했지요. 아랫 입술을 꽉 깨문 침묵 안에서 글을 쓰며 상처를 지긋이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문장들의 그물을 펼쳐 검푸른 빛으로 파닥거리는 통증의 근원을 건져 올리면 푸르스름하게 번지는 애틋한 감정들과 소중한 기억들이 함께 올라오더군요. 심연 속에서 숨죽여 살아가던 어떤 서러운 것들을 문장으로 남기고 투명 햇살 아래 내어놓으니 사무치게 그립기만 시절이 냉이처럼 동그래진 몸을 펴고서 일어났습니다. 지나가버린 계절들의 수많은 낮과 밤들 사이에서 냉이를 닮은 연녹빛 새순들이 널려있더군요. 마음과 감정의 치유는 고통스러운 기억들 속에서 오두마니 서성거리는 자신 힘껏 끌어안아 데려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멸치 육수에  된장을 한 숟가락 넣고서 불을 지폈어요. 하얀 김과 구수한 냄새가 서재를 채우고, 붉은 혈관을 따라 흐릅니다.

평온합니다. 참으로 평온하군요.

다듬어 둔 냉이와 두부, 어슷하게 썰어 둔 대파와 팽이버섯을 넣고 조금 더 끓였어요. 당신께 나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는 냉이의 꽃말처럼 냉이 된장국의 향기는 봄의 전부를 선물해 주 것만 같습니다. 지독한 겨울을 지나 다시 태어나는 봄의 향기는 치유였지요. 어쩌면 글을 쓰기 시작하던 그날의 밝고 환한 밤, 봄은 이미 저의 곁에 있었고, 저는 회복하고 있었습니다. 

냉이 된장국과 쌀밥 한술로 몸을 데우고, 냉이의 잔향이 머무른 책상 앞에 다시 앉았습니다.

그리고 깊고 까맣기만하던 긴 터널을 이제는 충분히 통과했다고 적습니다. 지금은 한 아이의 어미가 되어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J이지만, 그는 저를 존립하고 보행하게 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요. 그런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려 저의 책을 부쳤습니다.

침몰해가던 시간들이 두렵기만 습니다.

당신의 문장과 곶감 덕분에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게 고마웠습니다.

마디게 발음하며 책 표지 안쪽에 검은 만년필로 반듯하게 적었어요. 그리고 이젠 그런 말들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아있노라고 읊조립니다. 비록 듣는 이가 거울 속 그 사람뿐일지라도 말입니다.


소중한 Y. 그러니까,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고 싶었습니다.


덧. 주재료: 냉이, 팽이버섯, 두부, 대파, 된장

       부재료: 멸치육수, 국간장, 다진마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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