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와서, 다시 그렇게 돌아간다.

1부. 깊은 산골에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by 시골서재 강현욱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산골의 겨울은 재촉하듯 까만 밤을 불러왔다.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물며 타오르던 적막은 마침내 온 산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전란 중의 배고픔에 어린 나무들만이 가까스로 고개를 들던 산은, 겨울이 덮치면서 더욱 황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늘 강이수는 운이 좋은 인지, 산에 오르며 놓았던 덫에 회색빛 토끼 한 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또다시 눈발을 토해낼 것만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조금 미안한 마음을 섞어 고맙다고 읊조렸다.

조금만 더. 마치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수도없이 되뇌었다. 곧 태어날 아이와 만삭의 아내를 떠올리다 시간의 흐름조차 놓치고 있던 강이수는 한 순간 어둑한 시야에 놀라 발걸음을 황급히 돌려야만 했다. 그는 주운 나뭇가지와 베어낸 나무를 등에 지고,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이끌어 가파른 산길을 아슬아슬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들려오는 살기어린 늑대의 울음이 메아리가 되어 산허리를 타고 흘렀다. 자신을 겨눈 듯한 공포에 강이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굶주린 늑대들의 무리지은 사냥 방식은 건장한 사내조차도 뼈 한조각 추스릴 수 없음을, 오랫동안 산을 타온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남바위를 깊이 눌러써도 바늘 같은 한기가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살과 뼈를 발라내는 듯한 추위였으나, 그의 이마엔 그를 닮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속에 은신한 돌부리와 나무뿌리에 허리가 꺾여 휘청이면서도 강이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가느다란 목을 길게 빼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면, 하얗게 지워진 길조차도 시야에서 밝아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세상이 이유를 알 수 없는 전란 중임에도 그는 곧 아비가 된다는 생각에 순간순간 넋이 나간 사람처럼 웃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곳간에 남은 거라곤 이젠 보리쌀 조금과 고구마, 그리고 말린 시래기가 전부였다.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는 일에 강이수는 마냥 기뻐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의 몸이 움직이는 만큼, 이 시절을, 이 계절을 세 식구가 비례해서 더 버틸 수 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산골의 겨울은 전란만큼이나 참담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희미한 불빛이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요란스레 짖어대는 누렁이의 환대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썹 위에 맺힌 눈송이를 붉어진 손등으로 닦아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다 사라져갔다. 눈을 밟는 그의 발자국 소리는 가벼웠으나, 또한 묵직했다.


왔네.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사람 참...

이리 늦었어요. 늑대라도 달려들면 어쩌려고. 상 봐올테니 아랫목에 가서 몸 좀 녹이고 있어요.


자신의 어깨에 떨어진 가루 같은 눈송이를 털어내는 아내의 눈동자에 강이수는 왠지 모를 뭉클한 기분이 차올라 황급히 등을 돌리고 곳간으로 향했다. 곳간 한 구석에 짊어지고 있던 장작을 가지런히 부어놓고, 축 늘어진 토끼를 서까래에 조심스레 매달았다. 날이 밝는 대로 손질을 해두고, 곧 있을 아내의 산기에 맞춰서 고아낼 생각이었다. 는 부엌 안에서 바삐 일렁이는 그의 아내를 물끄러미 건너다 봤다. 자그마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한 손으로 덮고서, 보일 듯, 말 듯 움직이는 아내의 모습에 강이수의 눈매는 손톱달처럼 솟아 올랐다. 하지만 비로소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아내를 보자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으나, 이를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괜스레 역정을 부렸다.


혼자 있어도 좀 뜨뜻하게 하고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을 말했는가. 홀몸도 아니면서...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텐데, 뭐든 아껴야지요.


자신을 보며 살짝 미소짓는 아내의 표정에 강이수는 달싹거리던 입술을 바위로 쟁이듯 다물고서, 늘어진 어깨가 되어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낡은 소반 위에는 여느 때처럼, 빛이 바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공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비록 자신은 까막눈이었으나, 글을 읽을 줄 아는 아내가 내심 자랑스러웠고, 든든하기도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하던 아내를 위해 그는 지난 봄에 신원 국민학교를 찾아갔다. 어느 젊은 선생님에게 덜 자란 수탉을 건네며, 애원하다시피 해서 책과 공책, 그리고 연필을 받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지나가다 책을 읽는 아내를 향해 이따금 핀잔을 주기라도 하면, 강이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곤 했다. 그가 유일하게 화를 내는 순간이었다. 아내는 글을 배우고 싶어하지 않던 그의 옆에 바싹 붙어앉아, 강.이.수.라는 이름 석자를 가르쳐 주었고, 자신의 이름은 박.영.혜.라고 또박또박 적어 주었다.


잊지 말아요.


강이수는 산을 오를 때나 밭을 일굴 때면, 가끔씩 쪼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를 집어 그림을 그리듯 아내의 이름을 땅에다 쓰곤 했다. 위에 그려진 그림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며, 그는 몇 번씩이나 읽고 또 읽었다. 아니, 그건 심장에 새기는 행위였다. 명치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투명하게 물들어 가곤 했으니까. 박.영.혜.

그녀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사는 것처럼, 산다는 걸 그는 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지키고 싶은게 있는 사람이었다.


박영혜는 일제의 강제 동원을 피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와 여러 곳을 전전했고, 결국 이곳 거창의 산골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그녀가 강이수를 처음 만난 건 삼 년 전, 겨울이었다. 그녀는 뼈와 살이 들러붙은 모습으로 골짜기를 따라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마주해 달려오는 하얀 결정체들을 필사적으로 거스르며, 나무와 바위를 더듬고, 짚었다. 강이수는 여느 때처럼 군데군데 덫을 놓고, 까만 나무를 베고 있었다. 베어진 나무 위로 흰 눈송이가 다시 쌓여 눈꽃을 만들었다.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던 박영혜는 거무스름한 사람의 형체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다급한 나머지 얼어붙은 계곡을 무작정 건너려다 미끄러지면서, 차가운 발목이 어긋나고야 말았다. 강이수 단속적인 신음소리에 나무를 베다말고 기울어진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랗고 까만 동공에 믿을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체념이 가득한 송아지의 눈을 한 그녀가, 강이수의 열린 눈동자로 빨려 들어왔다. 오랫동안 말하지 못한 사람처럼, 박영혜의 갈라진 목소리가 적막한 계곡을 따라 낮게 흩어졌다.


다가오지마. 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면, 바로 죽어버릴테니까.


강이수는 덫에 걸린 사슴처럼, 한 다리를 뻗고서 비스듬히 누워있는 박영혜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발목을 주저하듯 살폈다. 그의 짐작처럼 하얀 눈 위로 피가 번지듯, 그녀의 가냘프고 새파란 발목 위로 발그스름한 붓기가 피어 올랐다. 고개를 외틀어 그를 탐색하는 박영혜의 눈빛에는 여전히 얼음송곳 같은 적의가 강렬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이수는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박영혜의 발목을 감싸고 바짝 당겨 묶은 후, 그녀를 향해 등을 보이며 무릎을 굽혀 앉았다. 어떠한 감정도 섞이지 않은 무심한 언어가 단단해 보이는 그의 등에서 새어 나왔다.


여기 있으면 얼어 죽거나, 늑대에게 뜯겨 죽소. 업히시오. 집은 어디오.


박영혜는 그가 두려웠으나, 여전히 살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 또한 두려웠다. 인간의 음흉함과 잔인함에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손에 쥔 물처럼 사라지던 순간들이 수도 없이 찾아왔으나, 아직도 자신이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그것마저 치욕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구원을 보기라도 한듯 그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강이수의 목덜미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따뜻해서, 사람의 목덜미가 너무나 따뜻해서, 박영혜는 그의 목을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등에서 진하게 베어나오는 누릿한 땀 냄새에 그녀의 의식과는 무관하게 무거운 눈꺼풀이 서서히 닫혔다. 떨어지는 눈송이를 헤치고, 포근한 언어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꼭 붙잡으시오. 꼭...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박영혜의 시야가 희미하게 열리고 닫힐 때마다, 견고해 보이는 흙벽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군불을 많이 지핀 듯한 방은 등이 뜨거울만큼 훈훈했다. 낡은 소반 위에 덮여있는 민무늬 상보를 걷어내자 보리밥과 백김치, 그리고 말린 고기를 간장에 졸인 듯한 조림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창자가 꼬이는 듯한 허기짐을 느꼈으나, 사라지지 않은 불안감은 밥상에 손대는 일을 금지시켰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방을 등지고,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하얀 꽃송이를 닮은 눈송이들이 떠오르듯 느리게 떨어졌다. 볏짚으로 두텁게 둘러싼 닭장 안에서 소곤거리는 듯한 닭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방에서 가만히 앉아 설경을 보고 있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살기 위해 도망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불안함에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두려움에 떨며 밤을 지새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낯설기만 했다. 산 아래에서 몽글한 연기를 피우는 하얀 초가집들 몇 채가 공깃돌처럼 자그마하게 보였다. 부드러운 곡선의 설산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듯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박영혜는 이런 감동이 일어나는 자신에게 흠칫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마당에서도, 부엌에서도 보이지 않는 강이수의 그림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마음이 문득 일어나는 자신에게 다시 한번 흠칫 놀라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온기가 빠져나갈까 문을 닫고서 주인 없는 방에 오두마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세상은 무간지옥이라고. 이념 때문에 싸운다고 들었지만, 사실 박영혜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일제만 이 땅에서 물러나면 괜찮을거라 여겼는데, 이념을 앞세워 나라가 다시 쪼개지고, 사람이 사람의 배에 칼을 꽂아도 무방한 세상이었다. 그래서 자신처럼 연약한 인간에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잔혹함이 최대치로 허용되는 세상이기도 했다. 저항하고 항의하는 일은 고향을 벗어나 남하한 박영혜를 어느새 빨갱이라는 대명사로 지칭하게 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선고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당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언어였다. 수십 번을 얻어 맞고 엎어져 하얀 눈 위로 번져가던 검붉은 하혈. 그것이 빨갱이라는 증거였을까. 그 와중에도 살아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희뿌연 날숨이 시퍼런 입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이념의 증거와 생명의 증거 사이에 놓인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싸늘한 간극에서 그녀 앞의 세상은 지옥이었다. 하지만 이곳 산골마을은 혼탁한 세상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듯 보였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그 사람만큼은.

그런데 그는, 어디 있는 걸까.


하얀 천으로 동여맨 쓰라린 발목에서 오래 묵힌 어떤 나무뿌리 냄새가 맡아졌다. 햇살이 묻어나는 이불보와 하얀 베갯잇에서 엄마가 보이는 듯했다. 몸을 동그랗게 말아 모로 누워, 이불을 머리 끝까지 끌어당겼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져 생경하기까지 한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밀려왔다. 캄캄하지만,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 살아있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한 기분. 이어서 엄마의 손을 잡고 간 밭에 앉아, 작은 돌멩이를 골라들고 공기놀이를 하다가, 호미질을 하는 엄마의 옆모습을 바라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정해진 순서라도 있는 것처럼, 이어서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온전히 느껴졌다. 아무런 저항없이 박영혜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면서.


달그락. 달그락. 오래된 나무 그릇과 숟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녀의 선잠을 깨웠다. 그가 돌아와 부엌에 서서 요기를 하는 것 같았다.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기대감 같은 게, 깊은 한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서 성치도 않은 발목을 절뚝이며 부엌으로 다가갔다. 촛불을 앞세워 너울대는 그의 그림자가 부엌 앞까지 걸쳐있었다. 부엌 안으로 한발을 들여넣자, 비로소 강이수의 얼굴과 표정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서글서글한 눈매와 선명한 콧날, 도톰한 입술. 무뚝뚝해 보이지만,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동그란 표정. 무엇보다도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은 크고 깊은 검은 자위가 박영혜의 불안과 두려움을 조금 더 밀어내 주었다. 박영혜는 강이수와 마주친 눈빛 사이에 서서 아랫입술을 말고,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아직 밥을 안 먹은 것 같던데 들어가서 드시오. 배가 많이 고플텐데... 발목은 어떻소?

괜찮아요. 덕분에... 저기... 안에서 같이 드세요.

나는 다 먹었소. 이건 말린 생강나무 달인 물이오. 발목에 도움이 될거요. 밥 먹고 마셔요.


강이수는 박영혜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그녀 또한 그에게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녹인 물로 익숙하게 설거지를 하고, 아궁이에 장작을 넣었다. 무쇠 솥에 눈을 가득 담아 아궁이에 올려두고, 닭들에게 모이를 넣어 주었다.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모든 감각을 동원하듯, 박영혜는 강이수의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그녀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방 모퉁이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강이수는 처음부터 박영혜가 없는 사람인 것처럼 무심히 들어와, 방안 화로에 숯을 좀 더 넣고서 그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 데워두었으니, 부엌에서 씻어요. 춥지는 않을 거요.


강이수는 자신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을 닫고 옆방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불빛은 사라졌다. 두 사람은 각자의 방에 누워 서로의 숨소리를 오랜동안 추적했다.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면서 위안을 떠올리는 깊은 산골의 밤은 여전히 하염없이 눈이 내렸다.

연약한 것들이 서로에게 포개어져 끈덕지게 견디는 것처럼.


박명의 빛이 아직 다오지 못한 한밤에 일어난 박영혜는 닭들에게 모이를 주고 부엌 일을 했다. 강이수 또한 처음부터 말할 수 없는 사람처럼, 그녀가 내어주는 밥상을 받고 그녀와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베고, 작은 산짐승을 사냥하고, 밭에 심어둔 마늘을 살폈다. 파르스름한 빛이 우듬지 사이를 물들일 무렵이면, 다시 각자의 방에 들어가 서로의 기척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 매일 이어지는 일상이었지만, 강이수는 박영혜에게 어떠한 것도 묻지 않았다. 여기에 계속 있을 것인지. 언제쯤 떠날 것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며 지금껏 살았는지. 심지어 그녀의 이름조차도 물어보지 않았고,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박영혜가 스스로 소리내는 것만을 말없이 들으며, 가끔은 아껴두기라도 한듯 싱긋 웃어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평온에 스며든 침묵을 통해 서로에게 많은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많이 무서웠겠구나.

부서질듯 아팠겠구나.

혼자서 쓸쓸했겠구나.

입을 틀어막고서, 목으로 울었겠구나.

그랬겠구나.


그들은 기나긴 겨울밤과 가혹한 눈보라를 서로의 기척에 의지해 그렇게 견뎠다. 산골에도 어느새 눈이 녹아 계곡의 물은 바위틈을 빈틈없이 채웠으며, 봄을 찬미하듯 곳곳에서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냉이는 일어섰다. 서슬퍼런 계절을 지나 생명은 되살아나고 있었다.

달빛이 온 세상을 대낮처럼 밝히던 어느날, 박영혜의 방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무감해 보이는 강이수였으나, 그의 표정에는 당혹감과 불안감,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황급히 이불을 젖히고, 그녀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비스듬히 바닥을 비추는 달빛 아래 반듯하게 누운 그녀는 감은 눈을 지푸리며 위태롭게 소리를 지르면서 울고 있었다. 과거를 떠올리게 한 어떤 악몽 안에서 그녀의 영혼은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는 듯했다.


가까이 오지마. 죽여버릴거야...

짐승만도 못한 네 놈의 아이라고...

난, 잘못한게 아무 것도 없는데...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 했어요.

엄마... 사는게 힘들다. 엄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박영혜는 꿈으로 말하고 있었다. 강이수는 박영혜를 다급하게 흔들어 깨우고서 절규의 늪에 빠진 그녀를 건져내 조심스레 끌어 안았다. 머리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으나, 가슴으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연약한 날개뼈에 손바닥을 얹어 느리게 두드리면서, 나즈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이제 괜찮소. 그냥 꿈일 뿐이오. 당신은 잘 살아갈거. 우린,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했잖소.


박영혜의 떨림이 잠잠해지자, 강이수는 조용히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은빛으로 물든 세상이 방안으로 다시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과 하나가 된 방에서 그녀는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지한 눈빛으로, 퉁퉁 부은 목소리로,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가지... 말아요. 내 곁에 있어줘요.


박영혜는 과거와 화해하지도, 과거를 용서하지도 못했지만, 강이수가 있다면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명한 달빛 아래에 앉아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는 슬펐으나 맑았고, 고요했으나 갈망했다. 그들은 서로의 보잘 것 없는 육신을, 서로의 특별한 육신에게 포개고, 또 포개었다. 하얀 깃털이 가라앉듯,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듯, 하얀 꽃잎이 떨어지듯. 그들은 서로를 위해, 또 서로를 향해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려는 듯, 수없이 내려앉았다.

붉게 물든 달은 그런 그들을 말없이 밝혔다.


강이수는 여느 때와 달리 달콤한 잠에서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었다. 문살에 발린 몇 겹의 창호지에 스며든 환한 햇발의 간지러움에 눈을 떴을 때, 박영혜는 여느 때처럼 아침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필요한거라도 있는 사람처럼 부엌 앞에서 서성였다. 잘 잤어요? 수줍음이 잔뜩 묻은 표정으로 그녀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인사를 대신해 그녀의 동그스름한 어깨를 당겨 가만히 안았다. 그는 밥을 먹고서, 닭장에서 달걀 두 알을 꺼내고, 사냥한 꿩 두 마리를 보자기로 싸서 단단히 묶었다. 그런 강이수를 불안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영혜는 머뭇거리다가 혀 끝에서 다시 되돌아가는 듯한 소리로 말했다.


어디... 가시려구요?

당신 괜찮으면 읍에 같이 갑시다. 오늘 장이 서는데 개를 좀 키워보려고.

갑자기 개는... 왜...


강이수와 박영혜는 손을 마주잡고 인적드문 산길을 걸어 읍내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산에서 나무를 베고, 사냥을 하는 동안, 그녀의 곁에 듬직한 무언가가 남아있길 바랐다. 그녀가 혼자라고 느껴지지 않도록. 그녀의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도록. 그녀의 고통이 희석될 수 있도록. 그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있는 힘껏 부풀어 오른 벚꽃을 두 사람은 입을 크게 벌리고서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보며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 사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덧. 구상만 해두었던 소설을 주저하고 주저하다 습작으로 한번 써보기 시작했습니다. 습작은 태어나고 다시 돌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 시절을 배경으로 하기에 간과한 부분이나, 오류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겨울이 떠나기 싫어 마지막으로 투정을 부리는 듯, 추위가 매섭습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건강 잘 챙기시고,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