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와서, 다시 그렇게 돌아간다.

2부. 적막한 산골에도 꽃은 피고.

by 시골서재 강현욱


내 새끼. 여기 있구나. 엄마도 여기 있어.


박영혜는 얼음물에 빠졌다가 나온 듯한 강이수를 위해 서둘러 밥상을 준비하고 씻을 물을 데웠다. 그러다 순간 묵직하게 아랫배를 짓누르는 뻐근함이 밀려와 짧은 신음을 뱉어냈다. 봉긋한 배에 손을 얹은 채, 허리를 수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경청하듯 떨림과 함께 서있었다. 밥상을 받기 위해 부엌으로 온 강이수는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잠긴 듯한 아내의 표정에 커다랗게 동공이 열렸다. 박영혜에게 황급히 다가가 그녀의 팔을 감싸듯 붙잡고서, 땀이 배어 나오는 아내의 이마를 닦으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는가. 디... 안 좋은가.


삼 년 전, 소박하게 혼례를 치른 후, 이유를 알 수 없는 두 차례의 유산을 경험했었기에 강이수의 목소리에는 짙은 두려움이 섞여있었다. 그때마다 아이를 잃은 슬픔만큼이나 박영혜의 커다란 자책이 강이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가 현재를 놓아주지 않는다며 캄캄한 눈이 되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봤고, 그럴때마다 강이수는 말없이 박영혜의 가냘픈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짧은 신음소리와 길게 내어쉬는 박영혜의 연약한 숨 소리만이, 산을 뒤덮은 적막의 틈새에서 새어 나왔다. 하얀 눈송이 마저 문득 잠이 든 듯한 새카만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을 밝히는 촛불만이 너울거렸다. 하나의 덩어리진 그림자가 부엌 황톳벽에서 부드럽게 넘실거렸다. 마지막 숨이라도 되는 듯, 깊고도 길게 심호흡을 한 박영혜는 창백했지만, 안도감이 스민 표정으로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 동이가 이제 끝까지 내려온 것 같아요. 어미와 아비가 빨리 보고싶은지. 내일 날 밝으면 칠성이 어머님께 미리 언질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좀 더 남았다 생각했는데. 그 놈, 애미, 애비가 많이도 궁금한가 보네. 괜찮겠는가... 날 밝고 가도 되겠는가... 내일 눈 뜨는대로 금세 다녀오면 되겠는가...

오늘, 내일 한다고 칠성이 어머님께 집에 딱 붙어 계시라 얘기해 두겠소. 그나저나 어미를 이리 못살게 구는 걸 보면... 아들이려나...


강이수는 지우지 못한 미소를 가득 물고서, 박영혜의 배를 설핏 보다가, 이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밥상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챙겨 올렸다. 수시로 찾아오던 입덧과 허리를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 그리고 둔탁한 통증으로 힘들었을 아내에게 의식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친 듯해서 미안한 마음이 었다. 강이수는 박영혜의 눈길을 슬그머니 피하며 밥상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부엌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에서 박영혜의 뾰로퉁한 말이 바싹 붙어왔다.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또 어때요... 그래도 뭐... 동이 가졌을 때, 뒷 산 굴참나무 뒤에서 호랑이가 튀어나와 내 품으로 달려드는 꿈을 꿨으니... 아들인 것 같기도 하고... 당신 닮은 아들이면 좋을 것도 같고...


박영혜는 하얀 앞니를 살짝 드러내 웃으며, 밥상을 사이에 두고서 강이수와 마주보고 앉았다. 사실 그녀 또한 내심 사내 아이이길 바라고 있었다. 참혹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자 아이보다는 남자 아이가 조금은 억울한 일을 겪으리라 여겼으니까, 조금은 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박영혜는 살과 뼈와 내장에 새겨진 들어낼 수 없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삶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언제 끝날지도 모를 전란이 인간의 잔인함을 최대치로 허용해 주는 시절이었다. 강이수를 만나 박영혜의 상처는 가까스로 봉합되었고, 아이는 단단한 굳은 살이 되어 그런 상처를 덧대어 주고 있었다. 다시는 검붉은 피를 흘리지 않아도 될 것만 같은 기대를 닮은 예감이 그녀의 명치에서부터 활활 타올랐다.


혹시...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두셨어요?

경복. 강경복. 어떤가? 험한 시절에도 귀하게 태어나 주니 경사스럽고 복되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들이든, 딸이든... 마음에 안드는가?


여명이 감싼 푸르스름한 산능선처럼, 박영혜의 눈이 가늘어졌다. 밥을 먹다말고, 공책을 꺼내 나무에 각인을 새기듯, 강.경.복. 이라고 힘주어 눌러 적었다. 빛바랜 공책을 들어 강경수의 눈 앞에서 활짝 펼쳐 결심과 의지, 단호함이 담긴 말투와 눈빛으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강이수는 그녀가 적은 반듯한 획을 다시한번 아로새기듯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안에 남들이 사는 것처럼 자신도 살아갈 수 있는 기도문이라도 있다는 듯, 그의 시선은 어떠한 미동도 없이 한 점에서 멈추었다. 소란스러운 세상이 문득 조용해졌다.


우리 아이 이름이에요. 살아가야 할 이유.


박영혜는 이어서 문갑을 열어 하얀 무명 배내옷 두 벌을 꺼내 헤지기라도 할까, 한 겹 한 겹 조심스레 펼치고, 구석구석 살폈다. 쌀알을 하나 하나 세듯, 그녀가 지난 가을 내내 바삭한 햇살과 가물거리는 촛불 아래에서 손수 지은 배내옷이었다. 그녀는 기도하는 자세로 하얀 무명실을 꼬아 고름을 만들었다. 아이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다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건 수도없이 으스러지고 쓰러져 본 자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바람이었다.

박영혜의 기도처럼 회청빛 먹구름이 썰물처럼 달려 나가고, 수 천개의 하얀 별빛이 그녀를 향해 무리지어 밀려오고 있었다. 강이수는 길이 지워진 깊숙한 어둠을 뚫으며, 아랫마을 칠성이네를 향해 달렸다. 그의 발이 내딛는 곳마다 빛 내린 하얀 눈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더운 물 좀 더 가져오게. 면포도 더 가져오고. 다 나와가네.

잘 버텨주게. 조금만... 조금만 더...


강이수는 칠성이 어머니를 방으로 들여보내고, 방 앞 툇마루에 서서 한량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방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누렁이도 곧 아버지가 될 강이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마당을 서성였다. 아내와 아이가 모두 건강하기만을. 단지 무탈하기만을. 강이수는 마음 안에서 메아리처럼 수 천번을 되뇌었다. 그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았다. 신이 있었다면 소작농인 아버지가 지주인 일본인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맞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이 있었다면 약 한 첩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어머니를 그리도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이수가 아는 한, 신은 자비롭고 온화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그렇지않다면 신이 아니거나, 신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는 절하게 신을 찾고 있었다. 아무데도 없지만, 또 어딘가에는 있을 신이, 어떤 모습이든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달빛이 세상을 감싸안자 하얀 소금산의 경계들이 까마득한 어둠 안에서 은빛으로 타올랐다.


더운 물 들어가요.


강이수의 마음처럼 희뿌연 수증기가 가득찬 부엌에서 끓는 물을 대야에 받아 몇 번이나 방으로 가져갔다. 그럴때마다 그는 박영혜를 설핏 살폈다. 은은하게 서있는 촛불에 반쯤 가리어진 그녀는 눈을 감은 지푸린 얼굴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쏟아내 반들거렸다. 촛농이 흘러내리다 굳어버리듯, 그녀의 억놀린 신음과 짧은 비명이 작은 입에서 간헐적으로 터져나오고 멈추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행여나 나올 곳을 몰라서 찾아 헤맬 아이를 위해, 이리로 오라며 부르고 손짓하는 어미의 절한 목울음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하나의 연약한 점이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자라나 세상을 향해 조금씩 손을 뻗치고 있었다. 칠성이 어머니는 고귀한 신의 언어처럼, 연신 반복해서 힘주어 말했다.


아직... 조금만 더... 옳지.


격정의 최고점을 향해 치닫는 듯한 박영혜의 모습에 한 순간 얼어붙은 강이수는 솜털의 떨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나 박영혜와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봐 안절부절못하던 그의 꽉 쥔 손은 한기를 잊은듯 축축했다. 강이수는 할 수만 있다면 그녀를 대신해 산고를 앓고 싶었다. 그녀를 대신해 누울 수만 있다면 저 자리에 누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박영혜는 그를 위해, 아이를 위해, 또 스스로를 위해, 고통을 홀로 버텨내고 있었다. 피어난 벚꽃을 닮은 그녀를 살얼음이 낀 계곡에서 처음 만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강이수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사는 게 뭔지를,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알게 해준 그녀였기에 그녀가 없는 세상은 없는 것이었다. 강이수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 한 줄기 빛처럼 눈물 한방울이 스며들었다.


이보게 멀뚱히 서있지 말고 내려두고 나가게. 괜찮대두 그러네. 잘 하고 있다니까.

아... 네...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강이수는 부엌으로 가서 잡아둔 토끼를 넣어 함께 고아낸 미역국을 국자로 저으며 생각에 잠겼다. 강이수는 아내에게 해주지 못한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자라준다면, 반드시 바다를 보러가겠다고 다짐했다. 바다는 무엇으로도 잊을 수 없는 아내의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박영혜는 바다를 보고싶어 했다. 유년 시절의 그녀가 인천에서 살 때는 지겹게도 보았짠내 가득한 바다였다. 고향을 떠나 강이수를 만난 후 시큼한 냄새 가득한 바다가 그녀를 향해 아득하게 밀려왔다. 그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검푸른 바다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의 고된 손은 박영혜의 등과 배를 썰물처럼 쓸어내렸다. 어머니의 온화한 미소는 박영혜의 마음을 밀물처럼 차오르게 했다. 드넓은 바다는 어머니의 부드러운 가슴과도 같았고, 햇살에 부서져내리는 해면의 윤슬은 어머니의 다정한 눈빛처럼 다가왔다. 강이수는 알지 못하는 노래를 박영혜는 나즈막이 흥얼거리며 가끔은 흰자위 위로 선홍빛 실선이 번지기도 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어렴풋한 기억들을 다시 소환하듯, 박영혜가 노래를 흥얼거릴 때면 그녀의 눈망울은 투명한 어둠으로 빛나곤 했다. 그녀의 노래가 하얀 입김처럼 흩어질 때면, 강이수는 자신의 목울대와 쇄골 사이에 팬 곳으로 그녀의 머리를 느리게 당겨 안았다. 그리고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귓볼을 따라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꼭 바다 보러가세. 살면서 한 번도 바다를 못봐서 죽기 전에 꼭 보고싶네. 나 죽기 전에 꼭 당신이랑.


강이수는 미역국을 저으며, 의지와는 상관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다보러 가세. 바다보러 가. 기원, 구원, 다짐. 이런 단어들이 뒤섞인 말을 수 십번을 되뇌고 있을 무렵, 한 순간 산 속의 적막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시에 물러날 것만 같은 절규가 방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온 힘을 다해 내지른 듯한 비명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 듯, 세상은 한 순간 잠잠해졌다. 연주홍빛만이 새어 나오는 고요한 방을 드려다보며 꿰뚫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숨 죽여 응시했다.


뭐가 잘못 되었나. 아니 그럴리가 없지. 아내가. 아이가. 모두가... 도대체 무슨 방정맞은 생각을... 아비라는 사람이...


강이수는 자신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불안감을 쫒아내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입술에 피가 비칠만큼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서, 두 손을 깍지 끼어 늑골 사이의 움푹 팬 곳으로 가져다 대었다. 의 초조한 마음이 문지방을 넘어 전해지기라도 한 듯, 잠시 후 갓난 아이의 울음 소리가 안에서 힘차게 터져나왔다.


잘 했네. 잘 했어. 고생했네. 이봐 이수. 들어오게.


강이수는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실줄기 같은 찬바람이라도 방안에 새어 들어갈까,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박영혜는 감은 듯, 만 듯한 눈으로 자신의 젖가슴에 엎드려 있는 아이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눈물 길이 그녀의 발그스름한 뺨을 따라 이어지다 베갯잇을 적시고 있었다. 그녀가 내쉬는 느리고도 깊은 숨은 캄캄한 어둠 너머에서 건너오는 듯했다. 그녀는 차분히 숨을 내어쉬다 남은 힘을 다해 말하는 것처럼,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읊조렸다.


우리 아이에요. 경복이.


강이수는 온 몸의 살갗이 일어서는 생경한 감정을 느꼈다. 말이 될 수 없는 충만한 기쁨, 눈물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터질 듯한 행복, 뼈와 근육이 끊어진 듯한 피곤함. 삶이 보내준 이런 낯선 기분들에 그저 감사했다. 삶의 신비와 경외 앞에 강이수는 본능적으로 낮은 탄성을 질러야만 했다. 눈과 코와 입이 있었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있었다. 아이는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 아내의 몸 안에서 안간힘을 다해 스스로를 만들었을 것이다. 아이의 까맣고 짧은 머리칼이 머리에 축축하게 엉겨 달라붙어 있었다. 다 닦이지 않은 피얼룩이 군데군데 묻은 자그마한 육신이 무릎을 오므렸다가 온 힘을 다해 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 다시 세차게 울었다. 푸른 잔핏줄이 보이는 박영혜의 부풀어 오른 가슴에 아이는 새끼 손가락보다도 작은 입술을 대고 오물거렸다. 강이수는 아이의 자두빛 볼에 자신의 거칠고 딱딱한 손가락을 살짝 데었다가 불에라도 덴듯 흠칫 놀라며 급히 떼었다. 박영혜는 그런 강이수에게 우는 지, 웃는 지 모를 미소로 나즈막이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은 아버지잖아.


박영혜는 아이와 맞댄 심장에서 억누를 수 없는 묵직한 전율을 느꼈다. 처음 느껴본 불가해하고도 거대한 감각들에 놀라면서도, 기적이 만져진다면 아마도 이렇게나 뜨겁고 부드럽고 물컹하고 연약한 느낌이리라 생각했다. 눈을 감은 채 아이는 희미한 빛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단 하나뿐인 어미라는 빛을. 은은한 촛불이 그런 박영혜와 아이를 밝히고 있었다.


귀한 사내 아이구먼. 인천댁도, 아이도 모두 무탈하니 걱정 놓게. 자네도 고생했네. 탯줄은 항아리에 넣어서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두게. 아이 이름이 경복이라구? 이런 시절에도 꽃이 피는구먼. 복된 일이지. 참으로 복된 일이야. 축하하네.


강.경.복. 강이수는 참아낼 수 없는 눈물을 훔치며, 아이의 이름을 글을 읽듯이 말했다. 그는 자신과 달리 아내처럼 아이가 글을 공부하길 바랐다. 여느 아이들처럼, 국민학교에 입학해서 선생님께 배우며, 친구들과 글 공부도 하고, 자맥질도 하길 바랐다. 어른이 되면 산골 마을이 아닌 서울이나 부산에서 좀 더 넓은 세상을 만나며 당당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신처럼 고운 아내를 만나 남들 살 듯이 살아가기를 바랐다. 다른 사람들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보길. 바랐다.


어머님도 고생하셨어요.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겁니다.

진이 다 빠져서 녹초가 되었을텐데, 인천댁 미역국 한 사발 가져다 주게. 잘 먹어야 젖도 잘 나올테니. 늦어서 나는 이만 가봐야겠네.

상만 차려두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강이수의 한 손에는 칠성이 어머님께 드릴 암탉 한마리와 고구마가, 또 한 손에는 칠성이 어머니의 앙상한 팔이 꼭 쥐어있었다. 하얗게 일어서는 두 사람의 입김이 서로를 향해 번지다 사라졌다. 고라니의 갑작스러운 기척에 조금 놀라기도 하면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어둑한 산길을 내려갔다.


자네가 신원에 들어온 지 한 사 년 되었는가? 아이도 태어났으니 이젠 호적 신고도 하게. 전쟁통에 불탄 호적들이 많아서 다시 신고받는다 하니 이 때 해두게. 그나저나 칠성이가 명자 만나러 간다고 아침에 나갔는데... 이 놈이 아직 집에를 안들어 왔어. 명자... 자네도 알제? 대현리에 사는 명자. 칠성이 놈이 명자를 마음에 두고 있는가 보더라고. 산청이며 함양이며, 엊그제는 신원에도 국군이 들어왔다고 아랫마을 김씨가 얘기하던데. 빨치산 잡겠다고 국군이 들어와가 난리라면서... 이럴 때 집에 가만히 있으면 효자 소리 들을 것을... 칠성이한테는 아무런 일도... 없겠제?


. 너무 걱정마세요. 명자 오빠 명석이랑 술 한 잔하는 가 봅니다. 칠성이가 명자한테 장가들고 싶어서 명석이한테 잘 보이려고 열심히 술 마신다고... 곧 아침이니 조금 있으면 집에 돌아올겁니다.


그렇겠제... 무슨 일이야 있을라고... 네. 아무튼 자네도 애 아버지니 이제부터는 몸을 더 아껴야 한대이. 빨치산이든, 국군이든... 보이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 가그라. 사람이 제일 무서운 세상이니까. 우리처럼 산에 둘러싸여 전쟁이 난 지도 모르는 가난한 마을이 나라에 뭐 도와달라고 한 게 있는가. 나라에 해 되는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한테 해코지 할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까. 별일은 없겠지만서도. 데려다줘서 고맙네. 닭이랑, 고구마는 집에 두고 경복이 애미나 먹일 것이지. 아무튼 잘 먹겠네. 경복이 애미한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달려오고. 살펴서 가게.


강이수는 다시 산길을 타고 아내와 아이를 향했다. 그의 세상 전부가 그곳에 있었기에 발걸음은 빨랐고 가벼웠다. 누렁이와 닭 울음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지며 까만밤을 밀어내고 있었다. 박명의 빛이 조금씩 온 산을 푸르스름하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기분에 강이수는 잠시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아이의 세상이 열릴 것이다. 환한 금빛으로 밝힐 아침이. 들녘이 따스한 꽃빛으로 물들어갈 계절이.

순간 콩을 볶는 듯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오고, 이내 멀리 보이는 산 허리춤에서 불빛이 일어나고 번졌다. 불빛은 캄캄한 어둠 깊숙한 곳에서 심지가 타오르듯 자그마한 점처럼 보였다. 새카맣게 불타버린 무언가가 창백한 재가 되어 눈송이처럼 하늘을 향해 떠오르듯 날았다. 강이수는 산을 오래 탔기에 사냥꾼들의 총소리를 익숙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날카로운 마찰음은 총소리였으나, 하나를 멸하기 위한 조준 사격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난사해서 하나의 종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소리였다. 절멸시켜야만 하는 짐승은 도대체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봐도 수 없었다. 총소리의 근원지는 신원에 들어와 가장 오래 알았고, 가장 친밀한 칠성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대현리 방향이었다. 강이수는 불안한 마음이 되어 방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곳에는 달콤하게 잠든 박영혜와 강보에 쌓여 젖을 물고 있는 경복이 있었다. 불안은 이내 흐릿해지고 발 끝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차올라 강이수의 목구멍을 따라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잠든 둘을 마치 삶이라는 듯 오래 들여다보았다. 너무나 다른 불길이 이곳과 저곳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덧. 삶 안에 죽음이 있고, 죽음 안에 삶이 있음을 생각합니다. 지루한 글. 오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한 시절을 배경으로 하기에, 제가 간과한 부분이나, 오류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투정인 듯합니다. 다시 찾은 봄을 반갑게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건강 잘 챙기시고,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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