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에게는 저마다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
“죽고 싶은 용기로 살 생각을 하세요. 님만 힘든 거 아니고, 세상 사람들 다 힘들게 살아요.”
우연히 어느 기사를 읽다가 본 댓글이다.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훅훅 내리다가 생긴 불상사였다.
무방비 상태로 읽어버린 그 한 줄의 문장이 그날 밤 나를 한참 동안 잠 못 들게 했다.
기분이 불쾌했다.
한동안 저 댓글 하나 때문에 매일 필요시약을 몇 알 더 챙겨 먹을 정도로 예민해져 버렸다.
익명의 누군가가 남긴, 어쩌면 흔한 댓글인데 뭐 그리 유난이냐 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아픈 곳을 더 헤집어 놓는 날이 선 차가운 훈수였다.
그렇다. 나도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삶이 너무 고되고 피곤해서. 희망은 깜깜한 터널 속에 갇힌 듯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그러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화를 못 이길 때는 내 몸에 스스로 상처를 내면서 버티곤 했다. 그런데 기사에 달린 저 댓글을 읽어버린 그 순간,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죽고 싶은 용기로 살아보라는 말. 너만 힘든 거 아니고, 세상사람들 다 힘들다는 말. 이 말들이 너무 차갑고, 무심하게 느껴졌다. 죽고 싶은 용기? 어느 누구에게 죽고 싶은 용기라는 게 있을까. 그리고 세상사람들 다 힘들다는 것. 물론 나도 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고, 아프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힘들다고 해서 자신의 아픔과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언제나 가장 아픈 것 또한 자기 자신이다. 그러니 너만 힘든 거 아니고, 세상사람들 다 힘들다는 말은 결코 위로가 아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 다 힘들게 살고 있는데 눈치도 없이 우울증에 걸려버린 의지박약이냐고? 나는 의지박약도 아니다. 그저 몸속의 호르몬이 우울하고, 무기력하게 만들었고, 아픈 나에게는 주어진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뿐이다.
우울증 혹은 양극성장애 환자들은 늘 죽음의 그림자가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그리고 병이 깊어질수록 그 그림자도 함께 깊어진다. 게다가 무기력의 트랩에 걸려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는 증상이 더욱 심해진다. 깊은 우울감에서 오는 죽음에 대한 충동. 그 무섭고, 외로운 병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과의 전쟁을 치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이 모든 것을 견뎌내는 행위를 '의지'라 쉽게 말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의지로 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면 우리는 때마다 정신의학과를 왜 찾아가고, 그 형형색색의 알약은 왜 시간 맞춰 챙겨 먹는 걸까.
아프고, 힘들고, 죽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또 남들처럼 잘 살아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아픔이 단순한 의지의 문제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상처를 받은 저 댓글도 결국엔 누군가의 의지를 탓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받기란, 혹은 주는 것이란 생각보다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아프고 난 후에야 절실히 깨닫고 있다. 섣부른 위로는 때론 어설픈 훈수가 된다. 그리고 위로를 가장한 날 선 단어들은 상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밤잠을 설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이기에 또다시 위로받기를 원한다. 따뜻하고, 공감받는 위로를. 어쩌면 그 따뜻한 위로가 누군가에겐 용기가 되어 더 단단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 진짜 위로란 이런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