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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Dec 13. 2017

그래도 생각나 미소 짓는 날이 있어




이별 후, 결코 미화되지 못하는 상처들이 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미화시키려 노력한다. 당신과 내가 나눈 사랑이 악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서툰 사랑', '부족한 사랑'의 경우라면 억지로 라도 과거의 모든 것들을 미화시킬 수 있으리라. 저 머나먼 별에 심어 놓은 한 송이의 꽃처럼 먼 연인은 내게 희미하게 살아있는 존재다. 가끔 생각이나 작은 미소를 띠게 하는. 


누군가는 과거의 연인을 쓰는 것을 무례하다 표현했지만 나는, 내 연인이 아니라 과거 나에게 스쳐 지나갔던 한 송이의 꽃들을 들여다보는 것뿐이다. 나와 사랑과 아픔을 나눴던 그들이 없다면 나는, 그 어떤 글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당신도 작가라면 완벽히 부정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아련하지만 따뜻한 추억이 추운 바람결에 스쳤다.


하나.

20대 초반 나는 남자를 몰랐고, 그저 모든 것이 무서웠다. 내가 접촉을 거부하자 그는 알게 모르게 서운해하는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똑 부러지게 나의 의견을 표명하겠지만 그때는 언급조차 어려워서 피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수술을 받게 된 나는 그동안 마음속으로만 끙끙 앓았던 헤어짐을 고했다. 마음이 아파 회복이 느려져 거의 1년 동안 집에서 요양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낯선 우표가 붙은 편지가 연달아 왔다. 크라프트지 위에 또박또박 적은 알파벳들은 익숙하면서도 생소했다. 첫 번째 편지 안에는 그가 있었다. 두 번째 편지, 세 번째 편지, 열두 번째 편지에 닿았을 땐 그 안에 그가 사랑하는 내가 있었다. 공항에 나와달라는 마지막 편지에 답장을 보내고 펑펑 울었다는 사실을 그가 영원히 알지 못해서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철없던 모습을 탓하며 프라하의 야경을 보고 밤새 서성였다는 그에게도 내가, 지금은 작게 미소 짓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둘.

그는 태양이었고, 나는 바람이었다. 식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그는 과제를 하고 있었고 나는 러시아 책을 펼쳐 주저리주저리 읽고 있었다. 나는 러시아학을 전공하니까 취업도 잘되겠다며 그는 자신이 더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글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웃었다. 뚫어져라 노트북을 보고 있던 그는 갑자기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그리곤 옛날 옛적에 이솝우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를 꼬시려는 심산이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 까르르 웃었다. "어떤 농부가 길을 걸어가는데~ 태양 빛이 너무 뜨거워서 옷을 홀라당 벗었대!" 그가 말하자 나는 짖꿎은 표정으로 "그런데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후~ 불어서 다시 농부가 옷을 꽉 여몄대!" 하고 발버둥 쳤다. 그가 웃고, 내가 웃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웃는다. 차가운 횡단보도에서 헤어진 마지막 밤을 까맣게 잊고 싶을 만큼. 


셋.

군대의 후임에게 나를 소개한다고 강남역으로 부른 날이었다. 나는 거울을 보기 위해 지하철 화장실을 계속해서 들락거리다가 자포자기를 하고 올라갔다. 그와 친하게 지냈다던 친구와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레스토랑으로 올라가 음식을 시키고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그 친구가 내게 속삭이는 말투로 형이 군대에서 계속 여자 친구 이야기만 해서 혼났다고 했다. "정말?"하고 놀란 나는 돌아온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사람이었다. 펑퍼짐한 옷을 입은 내 배 위에 손을 얹고 아빠 연기를 했던 사람.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 전 바로 그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별을 이별이라 수용하기까지 많은 밤을 보내야 했다. 문득 그와의 추억이 깃들 때마다 미움이 아니라 미소가 번지는 날. 나는 우리가 진짜 이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조금 울었고, 곧 미소 지었다.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언젠가 다시 정신없게 사랑할 순간이 올 거라 믿는다.

작게 미소 짓는 날들 중에, 그 언젠가.   



20171212

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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