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걷히면
약지와 소지에 물들인 봉숭아가 조금씩 떨어졌다. 톡톡. 첫눈보다 기다려졌던 것은 아날로그롤링레터. 여름 동안 롤링된 아롤(아날로그롤링레터)에 6월쯤 가을 편지를 채워 보냈었고 10월이면 7명 모두를 돌아 도착할 때가 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난 2일, 집 앞에 기다리던 아날로그롤링레터가 도착해있었다.
내 편지의 시작은 외할아버지의 치매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증상이 심해져서 요양원에 보내지신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영화 <인생 후르츠> 사진을 오려 붙이며 우리네 인생도 늘 달콤한 열매 같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었다.
편지가 롤링되는 동안 아롤 벗들은 외할아버지의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먹먹해서 메모를 남기지 못한 벗들이 많았고, 몇몇은 슬프고 안타까운 감정을 적어놓았다. 그 후 할아버지는 요양원에서 일주일을 보내시다가 요양원에서 소개해준 병원에 갔고, 약을 탔고, 그 약을 먹고 하루 종일 멍한 상태로 계시다, 식사를 하시곤 누워 바로 돌아가셨다. 장례를 도와주신 상조 실장님은 사망 사유를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적으셨다. 그게 편하다고 하셨다.
이런 날들이 있었기에- 아롤을 더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아롤엔 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에.
왜 아롤이 생각보다 늦을까? 생각했는데- 두툼해진 다이어리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벗들은 소장하고 있는 일주일 동안 꽤나 많은 편지를 썼던 것이다. 종이를 오려 붙이기도 하고, 좋은 시나 소설의 문구들을 적기도 하면서.
삶의 소식들은 유쾌하기도 했고 진지하기도 했다. 순서만 다를 뿐 우리 모두 비슷한 고민의 총량과 모양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행복, 건강, 일상, 마음, 직업, 사랑 그리고- 또 행복. 그 안엔 언제나 위로와 용기가 있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네요. 매일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도 매일을 쌓고 있었구나. 대견하네요? 그리고 강작님께 새삼스레 또 놀라워요. 이런 일은 강작님 말곤 하지 못 할 거예요. 배우들은 자신의 모습을 영상으로 간직하고, 음악가는 음악으로 담는데, 저는 아롤에 담게 되었네요. 너~무 감사해요. 아롤은 끝나나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아롤, 수연
모든 것이 걷히고 나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영혼뿐. 나는 그 소중한 것이 아날로그롤링레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계절이 흐르면 찾아오는 롤링 다이어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이 걷혔을 때- 남게 되는 오롯한 것.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나는 인간 본연의 마음.
아롤 겨울 편지를 얼른 써서 다음 주자에게 보내야지 싶다. 그분은 롤링 순서가 내 다음이라 친구들이 쓴 편지를 읽으려면 두어 달은 기다려야 해서- 매일 애가 타 하신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금 양해를 드릴 것이, 나 다음으로 한 분을 더 거쳐야 그분 순서가 되기 때문이다. 멋진 사람을 아롤의 새 가족으로 맞이했다.
그녀는 현재 타투 디자이너인데(내가 알기로 최고의 타투 디자이너, 내가 아는 타투 디자이너가 그녀가 유일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재능이 피카소 수준), 글 솜씨며 감각이며 매우 뛰어나서- 우리 아롤 벗들에게 동의도 얻지 않고 서둘러 초빙한 인물. 다인. 다인이 이 두툼한 아롤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그리고 다인을 편지로 맞이하는 아롤 가족들은.
자꾸만 손을 펴 손끝에 물든 봉숭아를 본다.
곧 첫눈이 올 것 같다.
2018년 가을에 시작한 [아날로그롤링레터: analog rolling letter]는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들과 계절마다 우편 편지를 롤링하며, 마음의 친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날로그롤링레터 참여를 문의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계절마다 롤링되는 편지라 참여 인원을 제한하고 있으나, 가족이 되길 원한다면 참여 희망 메일을 보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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