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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Jun 21. 2021

슬픔이 준 답

슬픔이 커피잔 안쪽 가장자리에 둥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녀에게 나는 언제나 밝고 따뜻한 기운을 전하고 싶어 했지만 이번엔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잘 지냈냐는 물음에 '이만하면 세상에 감사하다'라는 표면적인 대답 대신 내가 요즘 혼자 있는 방 안에서 갑자기 소리 내서 운다-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연인이 아니라, 나를 가장 닮은 친구에게- 나의 밝고 따뜻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나에게-. 어떤 위로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좋은 일이 일어날 거다'라는 식의 위로를 받으면- 힘이 조금 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현명한 그녀는 아이를 배에 담고서 2시간이나 걸려 나를 보러 와 주었고 공원에 함께 앉아 있어 주었고 지나가는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사랑스럽다고 말해주었다. 그녀와 아이의 따뜻한 기운이 오후 4시의 햇살처럼 나를 편안하게 했다. 나는 줄 것이 없었다. 4만 원짜리 꽃다발을 손목에 걸어줬지만 벌써 여린 꽃들이 시들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시든 것인지 아니면 꽃 자체가 여린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러이러해서 힘들었고, 이러이렇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고, 이러이렇게 진짜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라고 말했다. '절대 어둡고 약한 기운을 주지 말자'라는 생각을 짊어지고 조용히 걸었다. 더욱이 친구는 산모였으며, 곧 정신없는 이벤트들을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작고 소중한 입에서 '정말 다행이다'라든지 '너무 놀랐겠다'라든지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결국 하게 만들었다. 미안함이 몰려와 일어나자고 하려던 찰나 그녀의 퉁퉁 부운 다리가 보였다. 건강하고 매끈한 종아리에 하얗고 빨간 반점들이 생겨있었다. 그녀는 "내 다리 많이 부었지."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리곤 우리가 임신이나 출산, 그 후의 양육에 관한 것들에 그동안 너무 무지했다고 했다. 교과서에서 수정되는 것만 배웠지 여자의 몸이 임신으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양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없다고. 그녀는 마치 앞으로 망망대해를 헤쳐나갈 선장처럼 보였다. 다리가 퉁퉁 부운 채로 조타를 잡고 있었다. "무섭지 않아?"라는 물음에 그녀는 평소의 건강하고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하려고. 아기가 거꾸로 있다고 하면 하라는 대로, 수술을 하든 자연분만을 하든." 그리고 비스듬히 앉아 있어 괜찮냐는 말에 연신 괜찮다- 지금 너무 좋다고 말했다. 그녀는 용감한 선장이었다. 인생이 시키는 대로 살아갈 용기가 있는. 대화의 공백 사이로 커피잔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가장자리에 남은 커피 두 방울이 동그란 잔을 따라 하나로 만났다. 슬픔이 답을 준 것 같았다. '맞다'하고. 



글. 강작(@fromkangjak)


추신. 에세이와 단편소설을 편지로 만나는 <친애하는 오늘에게> 프로젝트를 곧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 구독자 모집은 오늘부터인데 포스터 만드는 것을 계속 미뤄놓고 있었다. 늦은 저녁(11시경)에 인스타(@fromkangjak)와 브런치에 함께 공지가 될 예정이다. 아직도 친오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너스레를 떨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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