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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작 Jul 10. 2024

차를 가까이합니다

낭만을 음미하는 멋



낭만을 음미하는 멋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고등학생 땐 가정 실습의 하나로 다도(茶道)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한복까지 차려입고 정자처럼 지어진 별관으로 가서 실습을 했죠. 장롱 냄새가 풀풀 나는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은 여고생들은 긴 소반 위에 올려진 작은 찻잔과 둥근 다관을 보며 마냥 귀여워서 시끌벅적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은 마치 조선시대 훈장님처럼 '조용!'하고 저희를 단숨에 집중시켰고, 다도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실습할 때 항상 저는 제 성이 강인 것이 싫었습니다. ㄱㄴㄷ 순서로 실습 순서가 정해졌기에 제가 늘 먼저 선두에 나서야 했거든요. 분명 선생님의 다도 시범을 보았는데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선 차솥에 물을 정성껏 끓입니다. 너무 뜨거워서도 너무 차가워서도 안되는데 물이 끓는 모습을 보고 판단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무 어려웠습니다. 차를 찻잔에 따를 땐 농도를 맞추기 위해 여러 잔에 한 번에 6분의 1 정도로 따르고 왕복하라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립니다. 여러 잔에 나눠 따른 후 다관을 조심히 제 자리로 올려놓습니다. 그때쯤 무릎을 꿇은 다리가 지릿지릿해집니다. 중간중간 여러 번 혼나는 것도 다도의 한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어린 시절 했던 다도 실습은 그렇게 신기하고 고됐던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그 후 이십 대의 성인이 될 때까지 차를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카페에 가면 화려한 음료들이 많은데 뜨거운 물에 티백 하나 넣어주는 차를 선택하는 게 왠지 돈 아깝다고 생각됐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던 때 취재 차 한 병원 원장님을 인터뷰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원장실에 들어가자 반듯하고 하얀 가운을 입은 젊은 남성분이 서서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정형외과라 사방에는 온갖 뼈 모형들이 있어 섬뜩한 느낌이 들던 차에 갑자기 원장님이 제게 물었습니다. "혹시.. 에디터님 다도.. 하세요?" 다도라. 순간 가정 선생님의 얼굴이 번뜩하고 떠올랐습니다. "다도요? 어릴 적에 한번 해봤어요(한번 해봤다고 말하는 이 자신감은 무엇인지)." 그러자 원장님은 치아가 드러날 정도로 환하게 웃으시며 뼈들을 손으로 젖히고 수납장에서 조심스레 다도 세트를 꺼내오셨죠. 

  찻잔에 차를 따르는 원장님에게 물었습니다. "다도를 하시면서 스트레스를 푸시나요?" 모든 찻잔에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듯이 정확한 양의 차를 배분하고는 답했습니다. "네. '차의 더러움 없는 정기를 마시면 대도를 이룰 수 있다.'라는 말이 있죠. 저에게 차를 마시는 일은 일상의 힘듦을 해독하고 다시 맑은 에너지를 채워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어요. 그렇기에 다도에 정성을 다하는 차인이죠. 좋은 물을 얻기 위해 산에 가고, 그 물을 소중히 담아와 찻물을 끓이고, 예의를 다해 차를 우려요. 여기에선 어쩔 수 없이 다도를 할 최적의 환경은 아니지만 집에는 조용한 곳을 마련해 두었죠. 자, 이제 마셔도 됩니다." 

  그때 마신 차맛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할 때마다 입안에 단 맛이 부드럽게 스며들었죠. 왜였을까요? 카페에서 크림이 잔뜩 올라간 음료보다 훨씬 기분을 좋게 하는 맛이었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고 티백을 담가 먹는 차보다 훨씬 깊은 맛을 냈습니다. 아마도 일반 취미생활을 넘어, 다도라는 그 단어 안에 든 의미처럼 삶의 '도'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어느새 뼈 모형이 가득한 원장실은 달빛을 받고 있는 낭만 있는 정자 위가 되었습니다. 


  멋진 차인을 만나 뒤에 저도 차를 즐겨 마시고 있습니다. 여유가 있을 땐 다도를 하고,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커피포트 대신 찻물을 직접 끓여 차를 끓이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차를 마시고 있습니다. 이번엔 배향과 꿀이 들어간 차를 골랐는데, 덕분에 기분 좋게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낭만을 음미하는 차멋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낭만적인 삶은 이렇게 천천히 스며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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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작

@anyway.kkjj


추신. 제가 사는 곳은 오랜만에 하늘이 무척 맑은데요. 남부 지방에는 계속 비가 많이 온다고 하네요. 부디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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