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으면 싫다고, 좋으면 좋다고 왜 말을 못 해?
젊은 MZ라고 불리는 요즘 것들이 좋다. 어떤 이들은 (그들 기준으로) 젊은 MZ세대에 대해 예의 없다고 평하지만, 난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편이다. 1989년 88 올림픽이 일 년 지나 태어났다. 그러니까 나는 MZ이긴 한데 늙은 MZ다.
'착한 아이'가 되려면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곧이곧대로 행해야 한다고 배웠고, '잘 나가는 어른'이 되려면 또한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곧이곧대로 행해야 한다고 배우며 컸다. 그래도 MZ에 걸쳐있다고 성장하며 많이 혼란스러웠다.
- 정말 그렇게 해야만 착한 사람이 되는 걸까?
- 정말 저렇게 해야만 잘 나가는 어른이 되는 걸까?
마치 프롬프트를 받은 AI가 지능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어서, 내가 의문을 제기할 때마다 인간(예. 부모님과 선생님, 그들의 의견에 순종하는 친구들)은 놀라며 두려워했다. 집단의 두려움은 나라는 사람 한명을 쉽게 잡아먹었다. 의문을 잠재워야만 불안과 두려움이 줄어들었고, 그럼 마침내 모두가 안도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의문들을 무시해야만 했다.
생각을 닫아야 했고, 입을 닫아야 했다.
그렇게 내 생각이라는 게 없이 몸이 훌쩍 커버렸다. 하나의 예로, 대학의 전공을 선택할 때도 내가 원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부모님과 선생님이 전망 좋은 과라고 추천한 과에 진학했다. 그들이 결정한 것이=바르고=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적성이라는 것마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바꾸면 좋으련만 불가능했다. 일 년 동안 애를 써보았지만 전공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국문과라든가 철학과 같은 돈 안된다는 과들에 눈길이 갔다. 내가 의문을 갖자, 부모님과 교수님,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직간접적으로 말했다.
생각을 닫아. 입을 닫아.
너도 대기업 들어오면 결국 좋을걸?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고르고, 사회의 현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버릇없다고 생각되어 감히 한 마디도 하지 못했을 시대.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꼭 저고리를 동여매고 아궁이에서 불 지피는 시절 같지만, 그런 먼 과거가 아니라 늙은 MZ가 성장했던 시절만 하더라도 사회적 눈치를 받는 압박이 상당했다.
대학교에서 일하는 친언니가 가끔 젊은 MZ 학생들과 조교들이 퇴근 시간을 엄수하며 일한다든지, 회식을 거부한다든지, 상사가 틀린 것을 꼬집어 말한다며 분노하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속이 다 후련하다.
당시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닫고 미소만 짓고 있다가, 집에 와 이불킥을 하며 '왜 나라는 사람은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을 못 하지?'하고 의문을 쏟아내는 것보다 훨씬 건강한 마인드라고 생각한다. 어서 녀석들이 결혼해서 '예? 제사요?'라고 사회에 뚱한 눈빛을 보내줬으면 좋겠고, 파를 나누는 정치인들에게 '맞는 건 맞는 거고, 아닌 건 아닌 거죠.'하고 딱 부러지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곧 마흔을 앞두고 있는 나이에 아직도 사회에 눈치를 보며 젊은이 뒤에 숨으려는 내가 참 못났다. 그러니 나는 글이라도 열심히 써보는 것이다. 반항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을!
왜 말을 못 해? 그래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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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