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대신 헤베꽃 - 2
20대를 돌이켜봤을 때 스스로 가장 황금기라고 생각하는 때는 26살에서 27살이었던 2018-19년이다. 새로운 경험들과 다양한 생각을 하며 나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보다 나 자신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깨달은 듯하 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어쩌면 그렇겠구나 생각한것도, 그리고 사람 이 본인을 객관적으로 자각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안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래서 사람관계가 어려운 것이구나, 오해와 갈등이 생기는 것도 그때문이었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사람 마음이 다 내맘같지 않다는 것도, 단순히 머리로가 아닌 경험을 통해 인지할 수 있게 됐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꽤 어렸을 때부터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 착하고 바르다는 것은 나보다 남을 위하고 배려하는 행위를 말하는 도덕성에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타로카드 뽑듯 골랐던 위즈덤 카드에서 '나눔 (contribution), 마음의 향기가 따뜻한 여자가 될 것이다' 라는 글귀가 써 있었고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그랬을까. 자아가 형성되고 보니 나는 사람들에게 항상 착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부모님에게 뿐 아니라 다른 많은 환경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항상 그렇게 지내다 보니 다행스럽게도 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래왔던 나의 성격에 혼란, 이른바 현타가 온 것이 26살때였다.
나는 착하고 이타적인 사람이다. 그래야만 했다. 오랫동안 그래왔고 주변 사람들이 보 는 나 또한 그러한 사람이기에 내 선에서 이기적인 생각, 사람들을 상대로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은 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 스스로 큰 장점이자 강점이라 생각했고, 그 강점을 나는 철저하게 잘 유지해왔다고 믿었다. 그러나 몇 가지 사건 이후 내가 생각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이타적이라 자부하며 나처럼 착하고 배려심있는 사람은 없을거란 허영심에 빠지기도 했었다는 사실도, 그리고 누구나 살아가면서 결코 이타적일 수만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론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기도 했지만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내가 착한 '척'을 더 많이 해왔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타심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이기적인 행동을 많이 해 왔다는 것도. 그리고 그랬던 내 자신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착하게 행동했다고 생각했다. 낮았던 자존감 때문에 그렇게라도 내 뜻대로 무언가를 해나가야 했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당시의 나를 온 전히 알 수는 없다. 생각의 꼬리가 쉴새없이 물려 진짜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의 생각을 곧이 곧대로 내려놓을 어떤 것이 필요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탄생한 나의 곡 제목이 <본성(本性)>. 3학년이었던 2018년 1학기 중간곡이다.
2018년, 3학년이었던 마침 편입준비 후 26살에 정착한 학교에서는 입학하자마자 현대음악을 써야 했다. 편입 이전에는 써보지 않았던 타악기가 포함된 3중주 이상의 곡 을 써야 했는데, 담당 교수님의 조언을 받아 바레즈의 'Ionisation(이온화)' 이라는 곡 을 듣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40여개의 악기를 13명의 연주자들이 7분가량 연주하는 곡이다. 각 악기들은 각자의 역할을 따로 따로 해내는 듯 하면서 후반부에 하나의 소리로 어우러진다. 다채롭지만 복잡한 색채와 불규칙한 리듬, 타악기와 함께 울리는 피 아노의 불협화음, 무엇보다 곡의 초반부터 서서히 그리고 점차 강렬하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는 내가 쓰고싶은 곡의 주제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각자의 역할을 하지만 어떻게든 어우러진다'는 곡의 감상은 나에게 이렇게 와닿았다. 서로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색깔과 리듬대로 가더라도 어떻게든 어울릴 수 있다는 것. 그렇기에 나를 굳이 착한 사람으로 포장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착 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곡에서 중간 중간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마치 이기적인 내가 이타적인 척을 할 때 나를 찌르는 양심의 소리인 것처럼 들렸다. 이후엔 나의 생각을 어떤 방법으로든 오선지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본성>에 적용한 악기는 바이올린, 클라리넷과 타악기이다. Ionisation을 듣고 받은 영향으로 클라리넷은 이타적이려 노력하는 나의 행동들, 바이올린은 그 생각을 방해 하는 이기적인 마음, 트라이앵글과 스네어 드럼을 포함한 타악기는 흔들리는 양심을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타적인 마음과 이기적인 마음을 둘 다 가지고 도덕성과 양심 사이에서 매일 고민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그 때부터 조금씩은 알게 되었다. 2018년 26살, 돌이켜보니 당시 그런 고민을 했던 내가 참 측은하게 느껴진다. 아무래도 세상을 살아가려면 이기적이어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젠 알고, 이타적과 이기적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모두가 각자의 기준 안에서 고민하며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이 새삼 야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