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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봄을 기다리게 하는 아름다운 에세이

by 봄뫼여울

자전거를 저어서 나아갈 때

풍경은 흘러와 마음에 스민다.

말들아, 풍경을 건너오는 저 새 떼처럼

내 가슴에 내려앉아다오.

거기서 날개소리 퍼덕거리며

날아올라다오.


작가 김훈은 1999년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에 전국의 수많은 곳들을 자전거(그의 오랜 연인인 風輪)로 여행하며 그 감흥을 정리했다. 지금에야 이 책을 발견했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더 늦기 전에 이 시대 최고의 작가가 쓴 여행기를 읽게 된 것이 한편으론 다행이다. ‘연필로 꾹꾹 눌러 쓴 우리시대 최고 수준의 에세이’라는 수식어가 이 책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술술 잘 읽힌다. 다른 사람의 눈과 발을 빌려 자전거 여행을 즐겁게 다녀온 셈이다. 하지만 역시 이 시대 최고의 글쟁이답게 그의 표현은 문학적이요 철학적이라 나처럼 소양이 부족한 사람에겐 눈에 쏙쏙 들어오지 않는 부분도 있었음을 고백한다.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한글로 쓴 가장 아름다운 우리 에세이’란 문구를 달고 나왔을까. 하긴 작가 김훈의 아름다운 문장과 깊고 넓은 인문학적 지식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긴 하다. 몇 권의 소설과 에세이를 읽으며 나 역시도 그 광고 문구에 공감하지 않을 없었다. 스쳐 지나칠 수 있는 순간을 이토록 멋지게 표현해 낼 수 있다니.


미처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껴보지 못했기에 김훈의 화려한 수사(修辭)도 가끔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언젠가는 이 책에 소개되어 있는 곳들을 모두 돌아볼 수 있겠지만 그 때의 풍경은 김훈이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으며 내달렸던 2004년의 그것과는 또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강, 임진강, 한탄강이 모이고, 개성 쪽에서 내려온 예성강이 그 큰 물기에 합쳐지는 늙은 강, 조강의 일몰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며, 갯벌은 여전한 생명력을 그 깊은 속에 감추고 있을 것이며, 광릉 숲은 사람들에게 상쾌한 숨을 내어줄 것이라 기대해 본다.


치욕의 역사가 전해 내려오는 남한산성에 가서는 삶과 죽음이 포개져 있던, 매섭게 추웠던 병자년 겨울의 그 길을 따라 걸어볼 것이며, 꼼꼼함의 힘으로 땅 위에 이루어놓은 거대한 수예 작품과도 같은 수원 화성에서는 끝내 이루지 못했던 정조대왕의 꿈을 떠올려 볼 수 있을 테지.


안성 돌미륵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끌린다. 미륵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며 현실의 고통을 감내케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다시 억겁(億劫)의 세월이 지나 미륵 부처가 인간 세계에 내려오면 이 세상은 뺏고 빼앗기거나 밟고 밟히는 일이 없어진다 했다.


안성 돌미륵을 보니 화순 운주사의 와불이 떠오른다. 그 옛날 사람들도 변치 않는 믿음으로 미륵을 간절히 기다렸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먹고 사는 것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한들 인간 세상의 고통은 여전할 것이니까. 그 개벽의 때는 기약이 없다. 미륵은 여전히 도솔천에서 머물 것이고, 중생의 간절한 기다림은 끝이 없으며 단념을 모른다.


몸은 풍경 속으로 퍼지고 풍경은 마음에 스민다.


다른 건 모두 잊고 이 글귀 하나만 가슴에 새겨본다. 곧 봄이 오겠지. 흙의 알맹이들이 녹고 부풀며 내쉬는 숨들이 뿜어 나와 나무에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노란 꽃들도 피어나 세상을 자신들의 빛으로 채색해 줄 것이다. 봄의 기운 속에서 우리는 또 그렇게 풍경 속으로 퍼지고 스며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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