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적(隱跡)

드러나지 않던 흔적

by 강라마

태국 전쟁사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방콕 북쪽 파툼타니 어딘가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들어진 방공호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 태국의 군부 지도자들, 특히 예전 태국 독재라인 피분 송크람 정권과 관련된 인물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장소는 생각보다 최근인 2012년에야 공식적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방콕이 아닌 외곽의 작은 마을에 이런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그곳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지도에 표시된 위치는 분명 맞는 것 같은데 막상 가보니 쉽게 찾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을 몇 번이나 지나고 작은 수로 위에 놓인 좁은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자 갑자기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방공호.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바로 옆에는 평범한 태국 가정집이 있었다. 거리로 따지면 채 2미터도 되지 않는다.

일상의 공간과 전쟁의 흔적이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는 풍경은 어딘가 묘했다.

방공호의 형태는 거북이 등껍질처럼 둥근 콘크리트 돔 구조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형태는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 주민들과 근처의 한 큰 회사가 함께 협력해 이 장소를 보존하려 노력했다고 한다.

주변은 마치 작은 숲처럼 풀과 나무가 무성했다.

방콕에서 멀지 않은 거리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시골 같았다.

조용했고 사람의 기척은 거의 없었다. 묘하게 으쓱한 느낌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전쟁 당시라면 이곳이 꽤 안전한 장소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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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隱跡) | 2026.03 | Thailand_Pathum Thani | Copyright © llama.foto(Gaeun)

물론 그저 나의 상상일 뿐이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마 한국인 중에서 이곳을 찾아온 사람은 내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각이 스치자 기분이 조금 이상해졌다.

이곳 입장에서 보면 낯선 외국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니까.

마치 오래된 장소가 나를 어색하게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나는 조심스럽게 방공호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쪽은 꽤 습했다. 바닥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고 빈 달팽이 껍데기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살짝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그래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밖은 한낮의 무더위였지만 방공호 안은 생각보다 시원했다.

두꺼운 콘크리트 돔 구조가 더위를 거의 완벽하게 막아주고 있었다.

이 공간은 한때 누군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였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 안을 걷고 있는 사람은 태국인도 아닌 낯선 외국인 한 명이다.

아마 이 방공호도 먼 훗날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태국은 이미 나에게 꽤 익숙한 나라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새롭고 신기하고 가끔은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을 남기는 곳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장소들을 만나는 순간마다 나는 태국이라는 나라의 다음 챕터로 조금씩 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흔적들을 몇 군데 더 찾아가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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