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부리 | 3
롭부리에 도착한 건, 한낮의 뜨거운 태양이 도시를 감싸는 오후였다. '원숭이 도시'라는 명성 때문이었을까, 역 앞 광장에는 원숭이들이 거리를 점령했을 거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한산했다. 거리의 주인이라는 원숭이들은 드문드문 눈에 띄었을 뿐이었고, 그 뒤로 고대 크메르 양식의 탑이 묵묵히 서 있었다.
많은 이들에게 롭부리는 ‘원숭이 도시’로만 알려져 있지만, 이곳은 한때 시암 왕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도약하려 했던 무대였다. 그리고 그 꿈은, 역설적으로 왕의 죽음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롭부리는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10~13세기 크메르 제국 시절, 이곳은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요새이자 통치 거점이었다. 프라 프랑 삼 욧의 세 개의 탑은 바로 그 시대의 흔적이다. 흥미롭게도, 일부 전승에서는 훗날 앙코르 와트를 세운 ‘수리야바르만 2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서 세력을 키웠다고 전한다.
17세기 중반, 아유타야 왕조 제27대 군주 쏨뎃 프라 나라이 마하랏이 즉위했다.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동서양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군주였다. 당시 시암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나라이 왕은 그 질서를 흔들고 싶어 했다. 그리고 1666년, 그는 롭부리를 ‘제2의 수도’로 선언했다.
이 결정은 단순한 행정 이전이 아니라 권력 중심축을 새로 짜는 정치적 선언이었다.
프라 프랑 삼 욧 앞에 서면, 세 개의 탑이 서로를 의지하며 버티는 모습이 마치 한 시대를 짊어진 기둥처럼 느껴진다. 원래는 힌두 사원으로, 시바와 비슈누, 그리고 브라흐마를 모셨다고 한다. 나라이 왕은 여기에 불교 사원을 덧입히고, 탑 정상에 황금 불상을 올렸다.
그 변화는 단순한 종교 개조가 아니었다. 과거의 유산을 새 시대의 이념 속에 통합시키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롭부리의 서쪽, 강변을 따라가면 ‘반 위차옌’의 유적이 나온다. 벽돌로 지어진 아치형 문, 유럽식 창문 구조, 그리고 사라진 성당의 흔적. 여기는 한때 프랑스 사절단과 선교사, 기술자들이 머물던 외교 타운이었다.
그 중심에는 콘스탄틴 폴콘이라는 그리스 출신 모험가가 있었다. 원래 무역 상인이었던 그는 나라이 왕의 눈에 들어 외교·군사·재정을 총괄하는 실세로 성장했다. 폴콘은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와의 동맹을 추진하며, 시암을 아시아의 ‘강대국 클럽’에 편입시키려 했다.
이곳 반 위차옌은 그 야망의 거점이었고 당시 외교관들은 이곳을 ‘작은 베르사유’라 불렀다.
하지만 프랑스의 등장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반발을 불렀다. 1620년대부터 시암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던 네덜란드에게, 프랑스의 진출은 영역 침범이었다. 보수적인 시암 귀족들도 네덜란드 쪽에 서서 프랑스-폴콘 세력을 견제했다. 결국 롭부리 궁정은 무역권과 외교권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터’가 되었다.
나라이 왕은 롭부리에 거대한 왕궁을 세웠다. 아유타야 양식과 유럽 건축이 결합된 하이브리드 공간. 궁 안에는 분수와 수로, 정원이 있었고, 외국 사절들이 묵는 별채도 있었다. 여기서 왕은 천문학자, 선교사, 과학자들과 토론하며 새로운 기술과 사상을 흡수했다.
그 모습은 마치 동남아의 루이 14세 같았다. 왕궁은 단순한 거처가 아니라, 시암의 위상을 과시하는 무대였다.
하지만 외세와의 밀착은 부작용을 낳았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은 전통 불교 세력의 반발을 샀고, 민중 사이에서는 “왕이 나라를 외국에 팔아넘기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산 프라깐 사당까지 훼손될 수 있다는 불안은 불길처럼 번졌다.
1688년 5월, 병상에 누운 나라이 왕.
그 틈을 타 장군 프라 펫라차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왕의 후계자들은 숙청당했고, 폴콘은 왓 삭에서 참수됐다. 그의 머리는 대중의 경고로 장대에 걸렸다.
그해 7월, 나라이 왕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는 시암에서 철수했고, 네덜란드가 무역권을 다시 장악했다.
오늘날 롭부리는 원숭이들이 자유롭게 거니는 관광 도시지만, 그 돌길과 폐허에는 한 왕의 야망과 몰락이 여전히 배어 있다. 나라이 왕이 꿈꿨던 개방과 국제화는 시대를 앞서간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민심과 전통의 균형을 무너뜨린 모험이었다.
역사는 종종 묻는다.
‘개방과 주권, 그 균형점은 어디에 있을까?’
롭부리의 바람 속에는,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사라진 왕의 한숨이 아직도 섞여 있는 듯했다.